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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Apr 08. 2022

<인생 3막에 대한 계획표>

  


 뒤늦은 나이에 전공분야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의료인 친구가 논문 준비에 필요하다며 나의 인생 3막에 대한 계획을 물어왔다. 바야흐로 백세시대, 이미 정년을 맞았거나 그 문턱에 다다르고 있는 우리 연령대 사람들 대상으로 하는 조사란다. 간략하게나마 글로 적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글귀신 붙들고 있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가끔 글을 부탁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글 좀 쓴다는 걸 뽐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지 선뜻 승낙하는 일이 잦았다. 점점 그 일에 대한 부담을 느꼈던 것이, 글이란 쓸수록 어려워지고 특히 내 일이 아닌 남의 인생과 관계되는 것을 대필한다는 자체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만용이란 생각에 정중하게 거절하는 용기도 갖게 되었다.  

    


 코로나에 감염돼 일주일이상을 무기력하게 보냈다. 혹시나 하던 것이 예외 없이 나를 찾아와 두 손 두 발을 묶은 채 침대위에 덩그러니 던져놓았다. 그렇게 긴 시간 일상이 파괴된 적이 있었던가 싶다. 무의미한 시간 속에 속절없이 나를 내맡기고 보니 그녀가 던져준 명제가 생각났다.

 

 요즘같이 모든 것이 인공지능화 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우리의 인생지표도 지능화 돼야 할 것 같은…,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려는 의지를 가지니 얕게나마 심장이 팔딱인다.  인체공학, 의학적인 설계도면에 근접하며 살아가는 인생과 수동적으로 시간을 축내는 사람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리라.

 이 나이에 열정적으로 학문에 진입하는 그녀와 침대바닥으로 점점 가라앉는 나의 대비가 낮과 밤처럼 선명해 기어이 노트북을 펼쳤다.   

   

 인생의 마디를 정하는 일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30 년 주기로,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를 1막, 결혼 후부터 정년퇴직할 연령 60세까지 2막, 그 후부터 3막으로 구분 지었다.

 올해로 61세에 접어든 나의 인생 3막을 어설프게나마 스케치해본다.    

  



 *봉사*

 90년대 초 남편유학길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리나라처럼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자동차가 발인 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운전면허 취득하는 일이었다. 한국에서조차 운전면허증을 갖지 못하고 간터라 기초이론부터 시작해야 했다.

 남편은 학교일로 바쁘고, 나 혼자 운전면허증 준비를 위해 Transportation Office(운전면허 관리기관)를 찾았다. 서툰 영어 실력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70~8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다가왔다.

-May I help you?

정년퇴직을 벌써 하고도 남았을, 표현하기 뭣하지만 불쌍하게 생각될 정도로 걸음걸이조차 조심스러워 보였다.

-Do you work here?

-Yes, I’m a volunteer.

 당시 나는 volunteer(자원봉사자)란 단어가 생소해 직원이란 뜻인지 아닌지 헷갈렸지만, ‘Yes’란 단어에만 의지해 그녀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무사히 필기시험을 치르고 나오며 고개를 갸웃한 것은, 여기저기 나 같은 사람을 맞이하며 필요한 서류를 챙겨주거나 장소로 안내하는 노인들이 몇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세계 최강 선진국에서 오죽 일 할 사람이 없어 저렇게 늙은 사람을 부려먹지? 복지가 그렇게 잘돼 있다고 들었는데….   

   

 그날의 기이한 경험이후 도서관, 박물관, 지역커뮤니티 센터 등,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란 이름표나 어깨띠를 달거나 두른 노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한 듯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미국생활을 이어갔다.

     


 한국으로 무대를 옮긴 후 나는 서울시내 어느 아파트단지 상가 내에 미용실을 열어 운영하고 있었다. 단골고객 중 한 사람이 암 진단을 받고, 수술에 이어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머리카락이 빠진다며 아예 싹 밀고 갔다. 가끔씩 미용실 주변을 산책하는 그녀가 눈에 띄기도 했는데, 가족인지 간병인인지에 의지해 간신히 걸음을 떼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수개월이 지난 후 그녀가 미용실에 나타났다. 한동안 보이지 않기에 불행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활기차고 건강해보였다.

-어머나! 몸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렇죠?

 그녀의 머리는 어느새 부숭하게 자라 있었다. 항암치료 후 미용실 첫 나들이, 파마를 하고 싶단다. 머리를 하는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암 수술에 이어 항암치료를 받으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녀아파트 12층에서 수시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 정신과를 찾게 되었는데 의사가 치료의 일환으로 봉사를 권하더란다. 자기 한 몸 가누기도 힘든 상황, 남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고. 그러던 중 지인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되고, 교회에서 하는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단다.

-봉사는 남을 위해 하는 것으로 착각했지요. 미용봉사도 많이 필요하던데…,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저와 같이….



 미국에서 귀국한 뒤 인생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시기라 그녀의 ‘함께 하자’란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돈 안 되는 일에 시간과 노동력을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그럴 형편 또한 되지 않았다. 봉사는 돈 많은 기업체나 그 대표, 고위공직자, 표 받을 것을 계산한 정치인들의 전유물쯤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점점 건강을 회복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몇 년 전 어느 봄날 집 근처 공원에서 산책 겸 운동을 하고 있었다. 공원 한쪽엔 매주 한 번씩 어느 교회주관으로 무료급식이 제공되고 있었다. 그날이 그날이었던지 장소에 천막이 쳐지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공원을 몇 바퀴 도는 동안 급식소 주변이 특별히 소란스럽고 웅성거렸다. 발길을 멈추고 들여다보니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봉사자란다. 곧이어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환자와 함께 주변인 두 명까지 병원으로 떠났다. 봉사자 세 명이 한꺼번에 없어지니 한 끼 식사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얼떨결에 그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한 영향력*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우여곡절 끝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학교로 돌아갈 나에게 등록금과 생활비 등을 마련해 줘야 하는 엄마가 이 집 저 집 돈 빌리러 다닌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친척뻘 되는 부잣집 안주인을 만났다. 우리보다 촌수가 높아 엄마보다 젊은 그 사람을 엄마가 높여 불렀다.

-아지매! 면구스럽기로…, 자아 학교 보내려면 돈이 좀 필요해서…, 품삯으로든 돈으로든 갚을끼요….

-하찮은 가서나(계집애) 공부 시킨다고 온 동네 돈 빌러 다니노! 형편도 되지 않으면서…, 공장에나 보내버리지….

 멸시와 비난 섞인 말에도 엄마는 시종일관 웃음으로 일관했다. 엄마의 비굴한 웃음을 더는 참을 수 없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에서 만난 엄마에게 무안함과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돈 빌렸어?

-…, 선한 끝은 있다. 형편이 되면 베풀고 살아라….

 동문서답으로 얼버무리는 엄마의 한숨이 내 가슴에 정체모를 씨앗으로 던져졌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내 인생의 텃밭에 뿌려진 volunteer, 암으로 인한 우울증을 봉사로 치유해가던 미용실 고객, 자라면서 보고 듣고 느낀 씨앗, 씨앗들이 수 년 혹은 수십 년의 세월을 묵혀있다 공원에서의 그 일(!)로 스위치 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손만 삐죽이 내밀며/ 며느리가 밥을 차려놓았는데 일부러 여기 와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노라, 애써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내는/ 못내 부끄러운 듯, 미안한 듯 표정을 짓는 사람, 사람들….

 한때 찬란했을 시절도 있었을…, 이분 저분들과의 유대감을 느끼며…, 철옹성처럼 자리한 내면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게워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성인이 되며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결혼 전에는 기업체에서, 결혼 후에는 남편 학업이 길어진 까닭에 전투적인 삶을 살아야했다. 당시는 특별한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갖지 않은 고졸학력의 기혼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 식당 주방 일과 홀 서빙, 가사도우미 등이어서 선택의 여지없이 골고루 전전했다.

 

 타고난 기질인지 가난하게 자란 환경의 영향 탓인지, 어느 곳에서 일을 하든지 나는 대표(주인)가 버는 수입을 예측하며 나의 급여를 비교하는 버릇이 있었다. 내게 주어진 일 대비 수입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주인에 대한 호감도가 갈리며, 하는 일에 비해 수입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처음 계약조건에 상관없이 대표나 주인에게  적대감이 생기곤 했다.     

 


 직원들이 적대감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내 바로 앞에 놓인 가장 큰 임무일 것이다. 나보다 남의회사 생활을 더 오래 한 남편도 이 부분에서는 인식을 같이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도록 객관적 위치에서 균형감각을 일깨워주는 것,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이보다 더 우선시 돼야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 나 혼자 행복이란 있을 수 없고, 기업체를 운영하며 나 혼자 번 돈이 있을 수 없다.

    


     

*글쓰기*

1.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다. 남은 인생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회사와 특수고용관계를 맺고 있다. 회사는 자체 원천특허기술을 보유하고 운영하는 활성탄 전문제조업체로 우리 부부의 인생 자체다. 벽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생산설비를 남편이 직접 개발하고 제작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회사설립 배경부터 개발, 성장과정을 세세히 기록, 책으로 낸 바 있으며,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나의 본업이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정신적 유산이며 가문의 역사서가 될 것이기에.

      

2. 논제가 생길 때마다 틈틈이 생활에세이 브런치에 소개하기.

    



<인생 후반 사용설명서 >
*봉사활동: 시간, 경제적으로 많이 할애할 자신은 없으나 '선한 영향력 행사'에 초점.
* 주말과 공휴일, 특별한 일정이 있는 날 제외, 하루에 최소 1시간 이상 글쓰기.
*건강: 1. 운동: 주 3회 이상 (수영, or 필라테스)
         
 

 

(아쉽게 공원 무료급식은 코로나로 인해 잠정 중단되었다. 머리로만 생각하던 봉사의 개념을 실행하게 한 첫 단추였던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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