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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Feb 02. 2023

그 여자네 집

한국산문 2023년 2월호 게재 수필

 


 7남매 맏며느리인데다 시어른과 남편이 집권 보수당(?)이어서 크고 작은 집안 행사를 내가 손수, 집에서 자주 치르는 편이다. 예전에는 혼자 억척스럽게 몇 날을 두고 일해 왔지만 요즘은 손님도 많이 준데다 그마저 당일치기로 다녀가기도 해서 일이 많이 간소화되었다. 하지만 세월 따라 내 몸도 낡아져 시아버지보다 일이 더 무서워지니, 행사의 경중에 상관없이 도우미를 부르는 게 일상처럼 돼버렸다.


 얼마 전 도우미를 부를 일이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얼굴 맞대고 가사를 하다보면 가정주부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자연히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게 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알고자하는 나의 개인적인 성품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부엌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이는 오십대 후반이며 아들 유학비용 대느라 늦은 나이에 도우미로 나섰다는 사실까지 접근하고, 별 생각 없이 어디 사는지를 물었다.

-구의동요.

-구, 구의동요?

-어머, 왜 그렇게 놀라세요?

-어디 사신다구요?

-구의동요.

-구의도옹? 어디쯤요?

-흐흐, 저희 집에 오시기라도 하게요? 아들 놈 유학시키느라 시부모에게 물려받은 자그마한 단독주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높은 빌딩들 속에 파묻혀….

 ‘아들 유학’, ‘구의동 단독주택’이라는 말에 전류에 감전된 사람마냥 순간이 정지되었다.  평상시 내 성격으로는 집 번지까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지만, 더 이상 파고드는 건 실례일 것 같아 그쯤에서 멈췄다. 도우미가 일을 마치고 우리 집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30여 년 전의 나로 빙의한 듯 한 그녀를 따뜻한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화양동 반지하방에서 시동생 세 명과 함께 살았다. 나의 소설이나 수필 여기저기서 많이 우려먹었지만, 남편 유학준비자금 모으느라 단 하루도 신혼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남편과 나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전문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다 대구에서 막 올라온 신혼여성에게 서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은 살림대로 해야 했던 터라 어디고 매일 형편도 되지 않다보니 결국 파출부에 눈길이 갔다. 당시 그 일은 하루 일당이 3만 원, 근무시간이 08:30~17:30시로 이런저런 형편의 내 처지에 맞았다. 파출부 사무실이 구의동과 화양동 사이에 있어, 일자리가 주로 화양동과 구의동, 성수동 공장단지 구내식당 쪽으로 주어지곤 했다.


 신혼의 단꿈은커녕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주부에게 계절의 감각조차 없었다. 어느 날, 구의동 단독주택에 내 일이 떨어졌다. 사무실에서 일러준 대로 버스를 타고 어느 지점에선가 내려 골목안쪽으로 접어 들었다. 주소가 적힌 종이를 손에 들고 몇 번인가 눈으로 확인해가며 비로소 그 집 앞에 섰다. 웅장한 목조대문 사이로 비치는 정원의 나무들이 형형색색의 단풍들로 물들어있었다.

-아아, 가을이구나!


 햇빛조차 들지 않는 지하방에 사는 신세로 너른 정원의 각양각색인 나무들의 현란한 춤사위를 보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 류의 부유층집 앞에선 한참을 바깥에서 떨고 있어야 겨우 주인이 나타나는, 극의 시나리오를 혼자 상상하며 가방에서 콤팩트를 꺼내 댁에 걸 맞는 단장을 하고 있었다.

삐걱 대문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부랴부랴 집어넣었다.

-누구시죠?

-혹시 파출부 요청한 댁 맞나요?

-네에. 맞습니다만….

-제가 오늘 일하러….

-그으래요? 아아, 네에 들어오세요.

 여자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나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현관문을 열자 너른 거실 한가득 고추가 쌓여있었다.

-김장용이랍니다. 오늘 저 고추를 닦는 일을 할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여자가 내 눈치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거 다하고, 또 할 일 뭐 있습니꺼?

-오늘 할 일은 이것뿐인걸요. 다른 일은 김장할 때 한 번 더 모시려고 합니다만….

 여기저기 나누어 줄 곳이 많아 김장을 많이 한다며, 다시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주인여자와 나는 거실에 앉아 사이좋은 자매처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고추를 닦아 나갔다. 이야기 끝에 나는 남편이 유학준비를 하고 있으며 자금이 마련 되는대로 떠날 거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일을 하며 육체적 노동에 많이 노출된 편이라 고추 닦는 일은 일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중간 중간 나의 빠른 손놀림을 칭찬하며, 몇 번이나 감탄사를 연발했다.


생각보다 빨리 일이 끝나 집안 청소라도 하려고 덤볐으나 여자가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풀타임으로 가더라도 예상보다 일찍 끝나면 일당에서 삭감하는 게 예사여서 나는 여자에게 삯을 깎으라고 했다.

여자는 함빡 웃음을 지으며 알았다고 했다. 아마 3시쯤 그 집을 나온 것 같은데 손에 쥐어준 봉투의 느낌이 달라 골목길을 돌자 마자 열어보았다. 10만 원과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큰 성공을 거둘 분으로 여겨집니다. 부디 목표 하시는 바 이루길 바라오며….  

   


 도우미가 다녀간 지 며칠이 지나고, 시간을 내 구의동을 찾았다. 박완서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에서, 주인공이 먼 옛날 마음을 주고받던 남자네 집을 찾아 그 동네를 둘러보며 기억을 더듬어가던…, 주인공 행세를 하며 그 여자네 집을 더듬었다.

당시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선지 모든 거리가 아리송했다. 이 골목으로 들어가 저 골목으로 나오고, 저 골목으로 들어가 이 골목으로…, 몇 번을 빙빙 돌았지만 기억 속 동네는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왜 단 한 번도 그 여자네 집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김장철이 돌아오니 마음이 한층 스산하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들 유학 뒷바라지 하느라 이집 저집 다니는 도우미아줌마의 고된 뒷모습과, 열정적으로 불태웠던 내 신혼시절의  순간들이 머리에서 뒤죽박죽 얽혀 나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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