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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파 강성호 Jul 27. 2023

꽃 진 자리에

그냥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나이 가늠하기 어렵게 고운 교수님, 그리고 함께 배우기 시작한 동료들의 첫 만남은 「성북구 평생학습관」에서 2018년 상반기 프로그램 중 “내 인생의 스토리텔링과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스토리를 발견하여 자서전을 쓰는 글쓰기 강좌였다.


가끔 블로그에 끄적거리는 일상의 이야기들이 한 단락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또는 새로 개업한 집 번창하라고 지인들이 걸어주는 성경 구절처럼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나의 글쓰기는 시작만 창대했지 그 끝은 늘 미약했다. 그래서 늘 내가 끄적거렸던 글을 다시 보고 있노라면 한 입 베어 먹고 맛없어 던져버린 덜 익은 풋사과 같은 꼴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나도 언젠가 한번쯤 써볼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그래 나의 내면에는 뭐가 숨어 있는지 한번 끄집어 내보자는 오기가 발동하여 글쓰기 강좌에 등록을 하였다.     

몇 주간의 수업이 지나가고, 이번 주 수업에 참석하였을 때 교수님께서 다른 문인들과 함께 역어 낸 영롱한 보석글에 낙관과 서명까지 하셔서 선물을 주셨다. 당연히 지금 글쓰기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 문인들은 어떤 구조로, 어떤 단어를 선택하여, 어떻게 글을 엮어나가는지 볼 심산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오롯이 한 단어, 한 줄, 한 문단을 분석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처음 접하는 단어는 사전까지 찾아보며 읽어나가는데, 처음 생각대로 분석하겠다는 마음은 어디가고, 단어들 하나하나는 살아 움직이며 내 감성의 세포를 후벼 파고 벌려, 세포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오버랩 되어 텅 빈 육신의 껍질만 남기고 홀연히 떠난 내 엄마는 살아 돌아와 나는 괜찮다고 내 어깨를 토닥거리고 어루만져 주셨고, 또 다른 글에 오버랩 된 내 아버지는 나를 찾아와 빙그레 웃음을 보내 주셨다.


분명한 것은 내 엄마와 아버지는, 작가들의 엄마 아버지와 일면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삶과 내 부모님의 삶은 닮아있었고, 누군가의 엄마 아버지가 아닌, 우리들의 엄마 아버지로 환생하여 독자들 앞으로 돌아오셨다. 이 땅에서 동시대에 살았던 삶이라 닮은꼴은 아니었고 “어버이 사랑”이라는 공통점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책은 내 가슴속 내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 주었다. “꽃 진 자리....” 처음 교수님께 책을 받았을 때 느낌은 책 표지 그림처럼 자태 고운 분홍색 꽃잎 그대로였다. 그러나 한 장 또 한 장 넘기면서 “꽃 진 자리”는 내 부모님의 이야기로 치환되었고, 따뜻하게 엄마 손 한번 잡아드린 기억이 없는 나를 질책하게 만들었다.     

지난 봄, 이제 막 동풍이 불어 올 무렵 내 엄마는 이생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8남매 키우느라 쭉정이 된 육신을 남기고, 오셨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엄마는 몇 년 전 대퇴골 수술 후 가장 먼 나들이가 아닐까 싶다. 오래전 아버지가 먼저 가시면서 못내 아쉬워 어루만지던 엄마의 아픈 무릎은, 대퇴골 수술 후 엄마의 의지로는 더 이상 거동이 어려워 요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모시고 염습을 하고 상례를 하는 동안 내 머리 속에서는 “저 다리로 어떻게 가실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누군들 가 본 길은 아니지만 멀고도 험하다는데 “어떻게 아버지 곁으로 가실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염을 하는 동안 엄마의 무릎만 만져드렸다. 그것이 따뜻하게 잡아드리지 못한 내 마지막 손길이었다.     


벽제 승화원에서 내 작은 아이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아빠 합골하는 것을 할머니가 원했어? 아닐 수도 있잖아....”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이의 입을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청 큰 몽둥이로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지만 달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둔 것이 없었다. 아이의 당연한 질문에 왜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을까? 한 번도 아니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만 내 머릿속에는 엄마의 아픈 다리로 어디도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화장을 하고 아버지와 합골하여 용미리에 모시고 난 뒤, 몇 번이고 혼자 찾아갔다. 잘 계신지 찾아갔고, 자식들은 잘 살아 있다고 찾아갔다. 집에서 모시지 못하고 요양원에 모신 것 용서를 빌려고 갔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가 만나 뵙고 주절주절 말씀드리면 불효로 막혔던 내 마음 속 응어리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주셨다. 49재 길상사에서 모실 때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49재를 끝으로 1년 기제사 때까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시간들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 이제는 “아버지와 이승에서 못다한 말, 도란도란 이야기 하실 시간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랬다. “저승에서 편히 쉬고 계실 엄마를 자꾸 불러 귀찮게 해 드리는 것이 죄송.”해서 그랬다. 49재 때 엄마의 영정을 사를 때 마지막 꺼져 가는 불꽃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파도 이별 해야지...     

아파도 이제는 이별 해야지...     

그렇게 살아생전 자식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먼 길 여행 떠난 엄마, 그 시간까지도 나의 푸념을 들어주셨고, 나는 엄마에게 칭얼대는 어린 아기였을 뿐이었다.     

며칠 후 어버이날에는 이제 칭얼대지 않는 장성한 자식으로 카네이션 한 송이 들고 찾아가 그 후 이야기를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나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꽃 진 자리...” 이름 참 곱다. 꽃은 졌어도 그 자리에 남은 “어버이 사랑”은 내 이야기였고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남은 것은 흘린 눈물을 훔쳐 낸 휴지 조각들만 책상위에 쌓여있다.     

2027년에는 엄마와 아버지 남은 육신도 훨훨 보내드릴 생각이다.     

그리고...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생에 만나는 날, 살아생전 죄송하다는 말씀드리지 못해 응어리진 내 마음, 속죄하고 또 속죄하면서 살았다고 말씀 드리려한다.


18.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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