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면은 기억이 난다.

2012년 X월 X일

by Ten

여자들은 사춘기 시절에 아버지와의 안 좋은 사건이 생기면 어떤 특정 장면이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문제에 대해 오해를 풀고 사과를 받아도 그 감정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데나...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런 잊혀지지 않는 장면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남자니깐.


근데 그 말을 듣고 지나간 사랑들을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다. 사실 헤어지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생각나겠느냐만은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하나씩 있는 거 같다. 17살 때 여의도 불꽃 축제에 가서 걷던 그 장면 하나만 생각이 나고, 19살 때 떡국 먹고 온 여자친구와 첫 키스하던 장면 하나만 생각나고, 22살 때 비 오던 날 마술로 커플 목걸이를 주려다가 실패해서 민망해했던 장면이 떠오르고, 28살 때 여자친구가 손을 머리에 올려 하트 모양을 그리던 장면만 떠오른다. 물론 다른 추억도 깊이 생각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만 그 사람 하면 딱 떠오르는 장면은 하나씩 각인되어 있나 보다.


반대로 나는 어떤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는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굉장히 다르다는 건 사실이다. 학창시절 공부만 하는 조용한 학생으로 기억하던 나인데 동창들은 난 그때부터 말 많고 육갑(?)을 떨었다고 한다. 뭐 여하튼.. 나는 어떤 장면 속에 들어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그 장면이 각인되는 시간은 몇 초? 길어봤자 몇 분 정도이다. 결정적 1초라고나 할까? 그 짧디 짧은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다. 하물며 소개팅에서도 그 짧은 만남 동안 결정적 인상을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었나 싶다.


여자친구가 되기 전,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곳이 대학로 11번 출구 앞이었다. 시뻘건 립스틱에 딱 달라붙은 치마에 버건디색 구두를 신고 왔는데 어찌나 야해 보이던지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내 취향은 아담하고 귀여운 스타일이다 보니 섹시한 스타일이 그다지 내겐 매력적이지 않단 말이다. 여하튼 사귀고 나서 그 얘길 다시 꺼내 물어봤더니 꼭 소개팅 할 때만 그렇게 꾸미고 간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 시뻘건 립스틱과 버건디색 구두를 신은 장면만 생각나는 걸 보니 결정적 1초가 계획대로 들어맞았나 보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는 게 내 마음대로 되겠느냐 만은 오늘도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포즈를 취해본다. 도촬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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