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직도 모른다

2002년 10월

by Ten

때는 바야흐로 대학을 미리 합격하고 팽팽 놀러 다니던 고3 어느 날. 한참을 맘고생하다가 사귀게 된 여자친구에게 푹 빠져있던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참 순진한 사랑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마중 나가고 막차 타고 집과 완전 반대방향인 여자친구의 집으로 바래다주고, 헌신의 끝판왕이었다고나 할까? 지금은 순진하다고 말 못하겠다.... 슬프다. 여하튼 그때는 내 인생의 낭만기였다.


고대하던 데이트 날, 오후 12시에 종로 3가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전날부터 두근거리는 설렘이 잠 못 이루던 나는 2시간 빠른 오전 10시에 종로 3가역에 도착했다. 그땐 이성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긴장이 되는 나이였는지 소개팅이든 뭐든 여자를 만날 땐 2시간 전에 항상 미리 도착했다. 그 날도 당연히 2시간 전에 미리 도착하여 어디가 재밌을지, 어디서 밥을 먹을지 탐방을 했다. 참 시간이 남아도는 나였을까.


고등학교를 안나갔기 때문에 나처럼 대학을 미리 합격한 친구들과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서 텝스를 배우고 있었는데, 종로3가역에서 그 어학원까지 가는 길 사이에는 빠스라는 상점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브랜드지만 그땐 엄청난 트렌드였다. 바로 '고구마 맛탕'이다. 그 빠스 상점 형님이랑 우리는 매우 가깝게 지내곤 했다. 아 참, 내 여자친구도 그 같이 공부하던 무리들 중에 하나였다.


빠스 이야기를 한 이유는 여자친구가 오기 전에 시간도 많이 남고 해서 빠스 형님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다. 둘이 재잘재잘 거리다가 문득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역시 난 그때부터 아이디어 뱅크였던 것 같다. 그 당시 UN이라는 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녀는 UN을 굉장히 굉장히 좋아했다. UN 노래가 나오면 정말 신나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문득 그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에 여자친구랑 길거리를 걷는데 온 거리에서 UN 노래가 나오면 여자친구가 얼마나 좋아할까? 방실방실 웃으면서 이게 웬일이냐며 너무 행복하다고 펄쩍펄쩍 뛰어다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에 빠스 형님에게 부탁을 했다. "형, 이따 20분 뒤에 여자친구랑 여기 지나갈 건데 UN 노래 틀어주실 수 있어요?" 그땐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기라 길거리에서 캐롤이나 가요를 쉽게 틀어 놓을 수 있던 때였다. 형님은 흔쾌히 OK를 외쳤다. 그리고 나는 작전을 수행했다.


여자친구를 만나고는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빠스 가게를 지났다. 계획한 대로 UN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는 예상대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어머! UN 노래다! 완전 좋아!
노래 좋지? 좋지? 아, 신난다~"

아.. 성공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미소가 참 예뻣다.


누군가를 만남에 있어서 상대방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야근하는 사무실에 몰래 걸어 놓은 남자친구의 야식 선물, 흘려 말한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 선물하기, 우연을 가장한 이벤트 당첨 같은 유치한 일들 말이다. 나는 유치한 남자였다.


20대 때는 고급지고 싶었는데 30대가 되니 유치하고 단순한게 좋아진다. 그래서 빠스 사건에 대한 기억이 좋다. 그리고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 그녀는 아직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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