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이 망하는 이유

2000년대 중반

by Ten

학생 시절 소개팅을 참 많이 해본 것 같다. 뭐 이런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보니 나랑 잘 어울리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의 아내를 잘 만난 것 같다.


소개팅을 많이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내가 경험한 케이스도 있고, 친구들에게 들은 케이스도 있는데 사실 소개팅이란 게 참 답이 없긴 한다. 그래도 보편적으로 '그건 좀 아니다'라고 할만한 사건들은 꼭 있기 마련이다.


이런저런 망한 소개팅을 보면 망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단답

1) 말하는 사람

소개팅을 나갔다. 상대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과묵한 게 더욱 매력적이다. 소개팅 분위기를 업 시켜보고자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네', '아니오' 뿐이다. 혼자서 계속 질문하다 보니 이제 더 이상 할 질문도 떨어진다. 그러자 침묵이 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어색하게는 만들지 않으려고 말을 계속 꺼내본다. 헛소리가 나온다. 상대방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2) 듣는 사람

소개팅을 나갔다. 상대방이 매우 별로다. 그냥 보자마자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여 예의상 시간 채우고 귀가해야겠다. 이 사람 나에게 질문이 많은 거 보니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근데 어쩌지, 난 전혀 호감이 안 생기는데... 질문에 답할 에너지도 안 생긴다. 예의상 답은 해줘야지. '예예..', '아니에요..' 귀찮다. 빨리 시간아 가라.. 이 사람 헛소리까지 한다. 소개팅 나와서 무슨 한미 FTA 조약 얘기를 꺼내냐? 에휴..


자기 이야기

1) 말하는 사람

자, 소개팅이다. 원샷원킬! 짧은 시간에 최대한 빨리 내 매력을 어필해야지. 자랑도 은근히 하고, 스펙도 은근히 말하고, 다양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도 말해줘야지. 아참, 내가 외국 나가서 재밌었던 일도 얘기해 줘야겠군. 어이쿠, 벌써 3시간이나 지났네. 그래도 이 정도 얘기했으면 후회 없이 나에 대해서 다 이야기한 거 같다.


2) 듣는 사람

오늘은 제발 괜찮은 사람이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이 사람 허우대는 멀쩡한데 정말 자기 자랑 심하네. 내가 뭐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밑 빠진 독처럼 줄줄 자기 얘기만 하네. 저 사람 일대기 들으러 나온 게 아닌데 무슨 강의 듣는 것도 아니고.. 3시간째 별 얘길 다 듣네. 귀가 지친다.. 가족관계부터, 군대, 취업, 연애관, 친구관계, 동아리 활동.. 이제 더 이상 들을 것도 없겠다. 뭐라고 반응해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소개팅 나와서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네. 의문의 1패를 당한 거 같다.


미래계획

1) 말하는 사람

나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니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걸 어필해야겠어. 그리고 저 사람도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뭐, 나는 미래지향적이라 이런 생각과 계획이 있다는 걸 어필하면 날 좋게 보겠지?


2) 듣는 사람

아.. 부담스럽다. 처음 만나서 미래를 이야기하다니. 미래를 함께 할지 말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 10년, 20년 후의 계획을 만나자마자 들어야 한다니!!! 미래 가능성에 대한 사업제안도 아니고! 난 아직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처음 본 사람과 그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ㅠㅠ


연봉 묻기

1) 묻는 사람

친구가 소개팅을 해줬다. 이제 나도 30살이니 현실적으로 재야겠어. 이 사람은 그래도 대기업 다니고 좋은 대학은 나온 거 같고, 근데 대기업이라고 연봉이 다 높은 건 아닐 텐데.. 그래 어차피 둘 다 30대인데 쿨하게 물어보자. 거기 초봉 얼마니? 우리 회사 초봉은 이 정돈데.. 응? 그 회사 그 정도밖에 안된다고? 별로 안 높네?


2) 듣는 사람

친구가 소개팅을 해줬다. 아니 뭐 처음 보는데 연봉을 묻는 사람이 다 있냐.. 근데 또 생각보다 낮다고 말하는 노매너는 뭐여.. 아 진짜 뭐 이딴 사람이 다 있냐.. 나이 먹으면 이리저리 잰다고 하지만 초면에 실례 아닌가.. 정나미 팍 떨어지네


빈대

1) 지불하는 사람

자, 식사는 내가 샀으니 후식 커피는 저 쪽이 사겠지? 응? 지하에 있는 커피숍이 아니라 스타벅스를 가자고? 스타벅스를 좋아하나? 그건 아니라네. 그냥 가자고? 뭐 그럽시다.. 자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나는 그럼 뒤로 슬쩍 빠져서 내가 먹을 메뉴만 말해줄... 응? 이 사람 어디 갔지??? 어랏. 문자가 왔네. 그 사람이네? '저는 오렌지 주스요' 헐... 뭐야 언제 벌써 2층으로 올라가 있었어? 아씨.. 노매너네.. 그냥 나가버릴까.. 그래도 주선자 봐서 다 사주고 그냥 가야겠다..


2) 대접받으려는 사람

점심 먹었으니 이제 커피를 좀 마셔볼까? 응? 지하로 가자고? 거긴 노브랜드잔아. 건너편 스타벅스로 가야지. 커피는 스타벅스지~ 별로 내 스타일도 아닌데 후식까지 먹고 그냥 집에 가야겠다. 애도 착해 보이는데 커피까지 사게 해도 괜찮을 거 같네. 계산할 때 민망하니깐 내가 자리 맡는 척하면서 2층 가있어야겠다. 그럼 오렌지 주스 갖고 오라고 톡 보내야지~


취소

1) 기다리는 사람

아.. 뭐야 1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못 만날 거 같다고? 주말 약속 하나도 안 잡고 지금 나가려고 씻고 꽃단장 다 해놨는데.. 아오.. 욕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아무리 일이 생겨도 당일날 약속 취소하는 건 진짜 아니지ㅠㅠ 그것도 초면에.. 이건 안 보자는 거지.ㅠㅠ


2) 늦는 사람

소개팅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사진 보고 안 하겠다고 하기도 주선자한테 미안하고... 한다고 하긴 했는데 영 마음도 안 내키고, 만나도 시간만 낭비할 거 같고 찝찝하네.. 그래. 어차피 만나서 나도 시간 낭비할 거 같고, 이 사람도 희망고문당하는 거 별로 안 좋은 거야. 그래 핑계 대고 오늘 못 만나겠다고 하자. 다음에 보자고 하고 연락 안 하면 뭉개지겠지.


고백

1) 하는 사람

오호~ 너무 마음에 든다! 매너도 좋은 거 같고, 얘기도 잘 통하는 거 같은데? 이 사람도 나 마음에 드는 거 아냐? 지금까지 한 소개팅 중에 제일 괜찮은 사람 같다. 이런 사람 또 못 만날 거 같은데.. 아 두근거려.. 티를 좀 팍팍 내야겠다. 적극적으로 표현해야지!


2) 받는 사람

응? 이 사람 초면에 너무 적극적인데.. 초면이니깐 예의상 좋은 시간 보내려고 한 건데 내가 오해의 소지를 준 건가? 싫은 건 아닌데 이렇게 훅 들어오니깐 부담스럽네. 지금 본 지 1시간밖에 안됐는데 금사빠인가.. 경계를 좀 해야겠다.


속마음

1) 하는 사람

이야기하다 보니 대화가 잘 통하는 거 같다. 그래, 사귀게 될 사람이라면 솔직한 게 좋지. 내 고민이랑 걱정도 털어놔봐야지. 이렇게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거리가 있는 게 좋은 거 같다. 내 얘기도 잘 들어주니깐 좋다. 이 사람한텐 다 털어놔도 될 거 같아.


2) 듣는 사람

후.. 힘들다고 하니 들어주긴 하는데.. 소개팅에서 이 무슨 집안문제까지 이야기하고.. 그래서 아버지는 중학교 때 도박으로 빚만 남기고 도망가셨고, 어머님이 지금 빚 갚고 계시는 중이라고? 그래서 지금 걱정이 많다고? 전에 사귀던 사람이 바람을 펴서 트라우마가 있다고? 그러셨구나.. 아 초면에 너무 진지해졌네. 난 밝고 즐거운 연애를 시작하고 싶은데.. 로맨틱 코미디를 꿈꿨는데 다큐멘터리 소개팅이 되어버렸네.. 부담스럽다.


뭐.. 소개팅에서 망하는 케이스긴 하지만, 짚신도 짝이 있듯이 저래도 다 맞는 사람이 있긴 하다. 약속에 늦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고, 단답형으로 말하는 게 더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속마음 털어놓는 게 더 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다.


나도 소개팅에서 누군가에게 면접 보는 거 같다는 소리도 들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때와 같은 남자인데 지금의 아내와는 즐겁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청춘들이여~ 소개팅에서 망하더라도 굴하지 말지어다! 어디엔가 다 짝이 있을 지어니!! 망하더라도 계속해서 도~전~ (그래도 개선할 수 있다면 개선하는 게...)


배경사진출처 : http://www.ardillustration.com/Living-France-Magazine



강선생 하우스 : http://kangsunse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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