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한 살의 연세에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여미시고, 불편하신 몸에도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다. 큰 절 드리는 와중에 굽어보시는 역력함이 기운으로 느껴진다. 돋보기안경을 반듯하게 세우시고서는 우리 부부의 결혼 앨범을 찬찬히 들여다보신다. 고쳐 앉게 된다.
2016년 여름, 처 외조모님의 첫인상을 적은 일기장의 내용이다. 할머님과의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아 어른이란 호칭은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거구나’ 하는 뭉클한 마음이 내 한구석에 묵직하게 들어왔다.
여성이 소외되던 그 시절, 할머님은 일찍이 여학교를 졸업하시어 배움의 끈을 질기게 이어 가셨다고 한다. 서화에도 타고난 재주가 있으셔서 소싯적 화첩까지 만들어 두셨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양반가의 빼어난 규수’였던 셈이다.
꽃다운 열여덟, 할머님은 구례 한 마을의 조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셨다. 부군과는 더없는 금실로 사이가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소박을 맞네, 첩을 두네 하던 당시, 집안에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님에게는 집안일 말고 다른 일이 주어졌다.
학교 선생님이었다.
해방 직후, 고장에 학생을 가르칠 교사가 부족하자 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아 줄 인재들을 백방으로 찾고 있던 중, 당신의 시아버님께서 학교장을 찾아가셔서는 “우리 집에 영어도 가르칠 수 있는 신여성이 있으니 선생 몫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오” 추천하여 그로부터 수년 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시게 되었다.
그것이 복으로 돌아온 것인지는 몰라도, 할머님은 20대가 저물어 갈 무렵 첫아들을 보셨다. 그로부터 연달아 육남매를 낳으셨다. 기다리던 자식이 태어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슴 타고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테다.
작년 봄, 할머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간호사가 발견했을 때, 할머님은 편안한 자세로 참선하듯 앉아 계셨다고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치시고 얼마 지나 심정지가 찾아왔고, 할머님은 그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향년 94세.
입관 전, 할머님께서 간직하고 계셨던 혼서가 가족 앞에 펼쳐졌다. 근 80년에 가까운 이 문서에는 하동 정씨 집안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혼서는 개인과 개인의 가약을 넘어, 집안과 집안 간의 영원한 동맹을 선언하는 굳건한 약조 문서였다. 집안을 대표하는 한 인간으로서 타지를 고향 삼아 깊은 약속의 무게를 지고 한 세기를 살아간다는 것은 나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당신 생전 유언에 따라, 할머님은 직접 지으신 하얀 수의를 입으시고 손에는 혼서를 쥐신 채 연살구빛 천 덮개에 드리워져 할아버님 곁으로 모셨다. 할아버님 생전에 할머님을 ‘우리 키다리’라 애칭을 만들어 부르셨다니 부부의 연은 세월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뜻에 따라 피는 것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할머님은 4월의 봄에 오셔서 4월의 봄에 가셨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사실 같은 질문이 아닌가 싶었다. 이제 우리 부부 양가의 큰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