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대로라면 물길 따라 산책도 좀 다녀오고, 미용실도 다녀오고, 4주년을 축하하는 그림도 그리고, 오붓하게 세 식구 외식하는 것이 시나리오인데... 휙! 통째로 날아갔다.
지난 주말에 화장실까지 말끔히 싹 치워놨더니 어메이징! 누가 흑마술을 부렸나 집안이 사흘 만에 개판 5분 전이 되어버렸다. 바닥의 수북한 먼지며, 폭격 맞은 화장대, 머리카락, 쓰레기, 먹다 남은 아들 밥에 장난감은 산과 바다를 뒤덮었다. '지구촌이 병들고 있다' 다큐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건 분명 외계인의 계략임이 틀림없어!
목, 금 어린이집 방학이라 우리 둘 다 연가를 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래 결혼기념도 있고 마침 건강검진도 받고, 애 예방접종, 영유아검진도 싹 쓸자하여 목요일 오전은 그렇게 강행했다. 일과 육아에 지쳐 다크서클이 무릎에 걸친 아내와 어린이집 긴급보육(맞벌이 부부에 한해 돌봐주는 것)에 텅 빈 공간에서 고독을 씹은 아들은 방전이 되어 다시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적막함이 도는 먼지 자욱한 집안. 혼자 거실에 앉아 사태를 둘러본다.
아... 이 난관을 어찌한단 말인가...
일단 차분한 클래식을 틀어놓고 위스키를 전용잔에 조르르 따라 향을 돌려 들이켰다. 코를 찌르고 훅 들어오는 뜨거운 알코올을 후하고 뿜어내며 나를 진정시켰다. (나는 담배 대신 이렇게 짧고 굵은 스트레이트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랜다.) 거실에 널브러진 이불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예전 아빠와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세상만사 다 제쳐두고 매일같이 사람 만나 술 마시고 노는 게 그날그날의 낙이었다. 하루는 술떡이 되어 아침 늦게까지 이불에 뭉개고 있는 아들을 보며 아빠가 말했다.
"야. 방이 이게 무슨 꼴이냐. 일어나서 이불 개고 청소하고 나가서 술이나 좀 깨고 와라!"
"나중에 치우면 돼요... 뭐 좀 있으면 또 지저분해질 텐데."
"아~~ 그럼 밥은 왜 먹냐? 좀 있으면 또 배고파질걸."
"어!? 진짜 그렇네!? 하하하하!"
"어휴... 저거 어따 갖다 쓰나 저걸... 빨리 일어나 임마!"
현타가 뒤통수를 뙇! 후려치더니 나도 모르게 푸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치!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나 하하하하하!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안방 화장대부터, 옷장, 거실, 주방, 피아노방까지 쓸고, 닦고, 걸고, 정리했다. 이거 구슬땀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열심히 집구석구석의 잔 때를 밀어냈다. 나중엔 아이고아이고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크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특히나 글 좀 쓴다고 깨작깨작하는 나 같은 인간일수록 뭔가 인생의 '대작' 한방을 꿈꾸곤 하는데 결혼과 육아만큼, 가정 돌보기만큼 따끔하고 매서운 회초리도 없다.
너 혼자 세상 짐 다 지고 사냐?
자아는 파면 팔수록 깊고 좁은 동굴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결국 빛이 나오는 탈출구를 찾기도 하고 그에 준하는 나만의 환한 내적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에 남는 건 쓸쓸한 나 하나뿐이다. 그때 주변을 둘러보면 늦었다. 내가 주변을 너무 멀리 떠나 왔으니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전부에 나를 쏟고, 나머지를 나에게 준다. 나머지가 없으면? 없는 거지 뭐.
이렇게 인생관을 바꾸면 걸음걸이가 가벼워진다.
꼭 내가 빛날 필요는 없다. 집 청소로 집안이 빛나는 것만으로 나는 존재한다.
뭐 내가 대단한 슈퍼스타도 아니고 유명 작가도 아니고 꼭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이 들면 마음에 여백이 생긴다.
푹 자고 일어난 아내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며 오디션 평점 매기듯 특급칭찬을 해줬다. 그리고 더덕무침, 갈치, 순두부에 달래무침, 된장국 한 상을 내어주면 그것으로 하루의 완벽한 코스가 짜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