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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r 12. 2020

애는 엄마가 키우는 게 맞다는 아빠의 역사

82년생 육아대디



자식이 엄마를 따르고 아빠를 등한시하는 건 본능이다.


‘자식농사’에 별 관심이 없는 내 주변 남성들이 늘 달고 다니는 말 중의 하나다. 자식이 엄마를 절대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아빠는 크게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희한한 생물학적(?)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술 마시러 간다.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아빠가 애 봐야 혼만 내고 때리기만 하지', '그냥 애들은 아프고 하면서 알아서 잘 커! 아무 걱정하지 마!' 이런 조언(?)을 해주는 대개의 아빠들은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 출생자들이다.  생년이나 세대가 다 그런 육아을 가지고 있다 단정 짓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카테고리 안의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된 가족관이 분명 존재하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가부장의 몰락은 곧 아버지의 역할 소멸을 뜻한다.  


이들은 대개 '혼내는' 아버지와 '다독이는' 엄마 사이에서 자라나, 형제간에는 장남을 '아버지 직무대행'으로 모시며,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배제하는 가족생활을 경험했다.


이 때는 가부장 즉, 아버지가 집안의 대장이었다. 대장의 명령은 집안의 이었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오직 가부장만이 판단하는 것으로 그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감히 꿈꿀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저리 나오시니 따라야지. 너가 좀 참아라.' 하는 엄마의 위로가 도움이 되었으려나.


가부장제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악습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종종 본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집안의 강력한 결정권자가 있고, 가족 구성원이 주어진 역할에 따라 착착 움직이는 경직화된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급한 사회적 상황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즉, 가부장제는 전쟁과 사회적 위기가 만들어 낸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가부장은 17세기,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터진 시점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병자호란으로 전 국토가 초전박살이 나면서 백 명이 나누어 먹을 파이가 열명이 나누어 먹어도 턱없이 모자랄 판으로 주저앉는다. 비교적 평화로웠던 영조, 정조 시대도 잠시 19세기부터 수탈과 배고픔에 분노한 농민들의 봉기, 쏟아지는 외세의 침략으로 조선반도는 온통 수렁에 빠진다. 20세기 36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가까스로 빠져나오니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이 과정에서 수천만의 국민이 죽었다.


전쟁의 일선에 나가는 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이었다.  노약자, 여성, 아이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 때는 아빠가 집을 통솔할 전권을 가지고, 엄마는 집안 안정적으로 운영할 보조적 역할을 맡았다. 남자에게 '몰빵' 하는 남존여비 사상이 불같이 일어나고, 남녀평등 균등분배와 역할의 규칙은 깨졌다. (유교 탓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상은 단지 실행을 위한 명분과 도구일 뿐이다.) 똑같이 일해도 남자는 바깥양반, 여자는 집사람이 되었다.


2020년


근 70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산업의 구조도 바뀌었고, 업무의 내용과 성향도 세심함과 세련미를 요구하는 비중이 점점 커졌다. '평화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남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여성 독자의, 또는 여성 중심의 산업영역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여성의 시대가 왔다.


여성이 산업 주역에 동참하면서 자연스레 맞벌이 부부 비율도 죽죽 올라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엄마들의 위상이 올라가는 반면, 기성 아빠들의 사기 크게 꺾였다는 점이다. 집안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찬밥 신세'로 전락한 아빠들은 앓는 소리를 한다. 가부장이 무너지니 집안이 제대로 안 돌아간다고.


이어령 선생은 자신의 가부장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권을 신장하는 것이 남자의 기를 죽이고, 가부장제가 몰락하고, 아버지 부재의 가족을 만드는 것이라면 여성을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 책 「읽고 싶은 이어령」 중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거기에 한 술 더 뜬다.


아버지라는 것만으로는 가정에서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오히려 어머니의 조수 정도로 편하게 이용해 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보스가 되고 아버지는 조수가 되어, "여보, 여기 좀 닦지!" 하면 "넵!" 하는 느낌으로 있으면 가정에서는 '그럭저럭 쓸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책 「어른 없는 사회」 중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만으로 가정에서 존경과 지위를 누리겠다니? 엄마도 일하고 아빠도 일하면 애는 당연히 같이 돌보고, 집안일도 같이 해야지, 아빠는 예전처럼 돈만 벌면 땡이고 엄마는 일도 하고 애도 보고 집도 치우라니까 당연히 가모장 사회가 오는 거다.


가모장 사회의 결과는 90프로 아빠의 책임이다. (나머지 10프로는 엄마의 상황 방관) 왜 아빠가 먼저 나서서 가정일을 할 수 없는가? 조수가 아니라 엄연한 가장으로서 주체적으로 육아일, 집안일에 나서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가? 아직도 보스와 부하로 가족 구성원을 바라보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우리 가정에 군권적 사고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회의 엄마들이 힘겹게 끌고 왔던 숱한 집안 업무에 대해 아빠들이 경시하는 풍토가 남아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시대가 변하면 가장의 역할도 변한다. 아빠는 명령권자가 아니라 운영권자가 되어야 한다. 별 4개 장군마냥 어흠하면 집안이 싹 치워지고 저녁은 언제 되나 하면 후다닥 가족이 모여 진지 잡수십시오 하는 세상은 소설에서만 보도록 하자.



그때가 좋은 때지. 지나 봐라 고생 시작이다.


육아 이야기가 나오면 이런 말 하는 사람 되게 많다. 물론 우스갯소리로 하는 소리일 수도 있겠고, 그때의 자식 모습을 그리워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말 자식 키우는 일을 마치 인생의 고된 과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1. 배 안에 있을 때가 좋지.

2. 산후조리원 나와봐. 잠은 무슨 잠.

3. 기어 다니면 그다음부턴 전쟁이야.

4. 걷기 시작해봐라. 뛰어다니다 다 까지고 감기에 열에 병원 다니느라 정신없고.

5. 애가 말하잖아? 미운 세 살이 괜히 미운 게 아냐.


여기에 중고딩 애들 둔 부모는 말년 병장이다.


6. 그때는 옆에서 엄마아빠하지. 이제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와 비슷하다.


1. 이등병이야? 후.. 그냥 평생 난 안 나온다 생각해.

2. 군대 나와봐라. 취직 준비하느라 정신 하나도 없다.

3. 취직해봐라. 내 시간이 어딨냐?

4. 결혼해봐라. 내 시간이 어딨냐?

5. 애 낳아봐라.  시간이 어딨냐?


결국엔 다 이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조언의 결론은 하나다.  


인생은 고달픔의 연속이다.  


이렇게 자기 인생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 별 영양가가 없다. 자기 일에 몰두한다고는 말하지만 실상은 늘 그렇게 자기 인생을 관망하듯 수동적으로 살아온 거다. 언제간 즐겁겠지 하며 현재의 상황을 불행으로 규정한다. 불행하게도 언젠가 즐거운 그 날은 오지 않는다. 유명한 누군가가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던, 생각하지 않던 상관없다. 결국엔 생각하는 대로 된다.




아기가 9개월 차에 접어들면, 사실상 완벽한 인간이다. 구르고, 기고, 타고, 짚고 올라가는가 하면, 어른의 귀로 들어서는 외계어와도 같은 괴성을 지르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웃음과 울음을 터뜨리는 것, 이 모든 것이 그가 구사하는 인간 진입 과정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밤 열두 시에서 한 시가 되면 애가 깨어 엄마를 찾는다. 본능적으로 라텍스에 기어 올라와 컴컴한 가운데에서도 엄마 젖을 찾아 파고든다.


네 시쯤 되면 아들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는 엉금엉금 내 얼굴로 다가와서 수차례 뺨을 때리고 얼굴을 부빈다. 팔에 드러눕고, 배 위에 올라타 멍을 때리다 이내 다시 품에 안겨 대 자로 뻗어 잠을 잔다. 엄마와 아빠가 내 곁에 있는지 이 아이의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아이가 10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내가 출근하려고 현관 근처라도 가려고 하면, 요 녀석은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에~~~”하고 울려는 통에, 이제는 아내가 아파트 경비소 앞까지 아들을 안고 나와 곰세마리 노래 부르고 볼뽀뽀를 마치고서야 본격적인 출근길에 나선다.


언젠가, 바쁜 아침 통에 출근길 배웅인사는 생략하고 아들에게 뽀뽀만 해주고 후다닥 출근하고 보니, 아내가 톡으로 사진 세장을 쐈다.


[아빠 그냥 갔다고 문 앞에서 대성통곡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뿌듯하지?]

[내가 저랬는데 세월이 이렇게 갔나....격세구만...]




나는 대문을 보면 예전 출근길 아빠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빠가 회사 간다고 옷이라도 갈아입을 참이면 나는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가지 말라고 괜한 생떼를 썼다. 세네 살쯤의 까마득한 어릴 적 일이니 얼마나 아빠가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지금도 그 생각이 날까 하는 감회마저 든다.


어느 날은 아빠가 출근하다 말고 엉엉우는 나를 달래다가 잠시 내가 한눈 판 사이, 휙 하고 대문 밖을 나가버렸다. 나도 엄마가 잠깐 빈 틈을 보인 찰나에 대문을 열고 뛰어 나가 아빠를 쫓아갔다. 그때가 아마 처음으로 나 혼자 집 밖을 나선 때였던 듯 싶다.


눈물콧물 질질 흘리면서 대로변으로 뛰어나와 익선동 사거리를 직진하여 모범약국(현재 뜨레비앙 아파트 자리 부근)까지 약 200미터를 뛰어간 모양이다. 오! 저 앞에 아빠가 보였다. 잽싸게 뛰어가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보니 아차, 뒤를 쳐다보는 사람은 웬 처음 보는 아저씨가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자지러지게 울었다. 화들짝 놀란 엄마는 쫓아와서 황급히 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작년 겨울, 서울집에 갔다가 옛날 앨범을 들춰봤다. 꼬꼬마 하나가 커다란 기계 뭉치 사이 테이블에 앉아 찍은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직원분들이 나를 앉고 찍은 사진들도 보인다. 아마 '아빠 찾아 온동네' 사건이 있은 뒤부터 아빠 회사를 출입한 모양이다. 이 못 말리는 녀석 때문에 엄마 아빠는 수년간 얼마나 골치를 앓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내가 육아휴직할 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항상 내 퇴근길에 맞춰 애를 유모차에 태워 청사 공원까지 마중을 나다. 내가 멀리서부터 반갑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면 아들은 신난다고 꺄핫핫 함박웃음을 짓는다. 하루가 다 녹는다. 나는 이 맛에 더 쫀쫀하게 일을 끝낸다.


아빠에게도 육아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빨리 아들과 만나는 것으로 그 가족의 평생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 하나가 생길 테니까.


다 커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붙어 있어야 한다. 노래를 부르던, 춤을 추던, 블록놀이를 하던 뭘 하던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함께 뭉쳐 다닌다. 오늘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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