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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Jul 21. 2019

대전의 검객들

머리칼을 다듬고, 옷매무새를 갖추고, 구두를 닦는다.



나는 대전 '선생' 미용실만 다닌다. 정확히 말하면, 이선생에게만 커트 예약한다. 한 번은 바빠서 동네 어느 미용실 갔다가 흑마술을 부려놔서 그만 감자 머리가 되어 버린 이후 더더욱 이선생을 신뢰하게 되었다.

미용사는 세 부류가 있다. 머리를 잔디로 보는 자, 나뭇잎으로 보는 자, 산으로 보는 자, 이렇게 있다. 이 중 산으로 관찰하는 자가 가장 우수하다. 이선생도 그중 한 명이다.

미용사만 탓할 일도 아니다. 내 머리도 상당히 곤란하다. 나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알았다. 옆머리는 곱슬, 윗머리는 생, 앞머리는 제멋대로, 뒤통수에는 제비꼬리다. 한마디로 지랄 맞은 머리다. 감식안을 가진 미용사도 알면서 건드리지 못한다. 그럴 땐 함께 한 숨을 쉬며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주세요"하고 만다.

이선생은 머리산의 세, 골, 향을 본다. 산세의 지형을 보고 골의 흐름에 따라 머리가 어느 방향으로 자랄 것인지를 중점으로 두고 커트한다. 처음 갔을 때  "세 가지 특성이 이러하니 어찌해드릴까요" 물어, "개성 부릴 직업은 아니라 깔끔하고 똑 떨어지는 느낌으로 해주세요" 답했다. 그다음부턴 가면 그냥 알아서 해준다.

말도 안 건다. 커트에만 신경 쓴다. 보통 커팅하면 30분 내로 다 끝나는데, 이 양반은 기본이 50분이다. 그래서 예약을 반드시 해야 한다.

두상이 민감하여 바리깡 많이 쓰는 미용사를 지양한다. 이 양반은 옆머리 칠 때만 바리깡을 쓴다. 하루는 바리깡으로 옆머리를 쌀짝 밀더니 잠깐 거울을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 "코드선 가져와봐" 하더니 바리깡에 끼워 다시 커트를 시작하길래, "뭐가 이상한가요" 물으니 전력에 따라 미세한 길이 차이가 생긴다고 답한다. 음 그렇구나 하고 눈 감고 잠을 청한다. 편안한 상태에 접어든다. 미용 이상의 안식이다.

커트를 마치면 이리 보고 저리보고 머릿결대로 드라이해준다.


 "근데 원장님은 똑같이 만원 받으세요?" 하니

 "잘하잖아요" 싹 웃는다.


달리 더 물을 게 없다.



세탁소 아저씨는 비 오는 날 옷을 맡기러 오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세탁소는 기름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정장에 수분이 묻어오면 그만큼 소요되는 시간도 늘어나거니와 무엇보다 양복의 수명이 줄어든다'라고 했다.

빗물 스민 양복을 한 손으로 받치고서 다른 한 손으로 방울방울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튕겨낸다. 다리미로 지그시 눌러 한참 동안 면을 말린다. 옷을 아이 다루듯 하여 일종의 경이로움마저 느껴다. 찾을 옷을 꺼내더니 비닐로 씌워 하단은 살살 돌려말아 비를 맞지 않도록 꼼꼼하게 스템플러를 박아준다.

수선을 맡기러 갈 땐, 입고 있는 지금 바지도 가져가야 한다. 체격으로 봐서는 백화점에서 재어준 길이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두 개 비교해보면 여지없이 차이가 난다. 하얀 초크를 조심스레 집어 들어 날카롭게 베어내듯 싹 긋는다. 그리고는 항상 소요 날짜를 알려준다. 그 전에는 끝낼 수 없다고 못 박는 거다. 할 수 있는 역량 내에서만 작업하고 9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세탁소 아저씨의 세탁은 세탁 그 이상의 하나의 의복 보존철학이다. 상하게 하지 않고 최대한 온전히, 그리고 오래 입는 방법을 고려하면서 옷을 만진다. 한 해 입고 버릴 셈 산 옷 가져가면 한번 만져 보고 단번에 알아챈다. '오래가는 옷을 입어야 체형도 변하지 않고 좋다'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매일 자기 전에 구두를 닦는다. 먼저 먼지를 걷어내고, 약을 묻힌 후 다른 미세사 걸레로 삭삭 문지른다. 그렇다고 군대처럼 물광 내는 식은 아니고, '아 구두 관리 잘하네' 소리 들을 수 있는 정도만.



일을 하다 보면 늘 책임의 문제가 따라다닌다. 책임을 누군가가 지면 그만이지만 누구의 책임인지 알 수 없는 경우, 더 나아가 책임을 전가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경우, 이럴 때 갈등의 소지가 활활 불거져 오른다.

갈등을 머릿속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 대신 나는 역할론에 입각해서 상황을 리마인드 한다. 어차피 공중에 뜬 책임 따지고 들어가면 결과는 볼멘소리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산이 없다.

구두를 닦으며 생각한다. 잘잘못을 떠나 나는 내가 가진 역할에 오늘 하루 얼마나, 몇 퍼센트나 충실했을까? 내가 충실했으면 만족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내일 더 잘하면 된다. 남이 뭘 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남의 잘잘못은 그 사람의 몫일뿐이다. 내 인생이다. 오늘 하루 내일도 고생할 내 구두에 심력을 불어넣는다. 가지런히 현관문을 향해 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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