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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Jul 27. 2019

최후의 방어막, 익선동 할머니

익선동에 정착하기까지

           나는 못 말리는 천방지축 꼬마였다.



장난을 몹시 좋아했다. 좋은 말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나쁜 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번은 학교 건물 귀퉁이에 사는 달팽이 수십 마리를 잡아와서는 집 장독대에 모조리 풀어놨다. 아마 움직이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꿈틀이 세상의 대참사를 확인한 엄마는 눈에 불꽃을 번쩍이며 회초리를 들고 번개처럼 달려왔다. 나는 늘 그랬듯 생쥐처럼 찍찍찍 할머니 방으로 도망쳐서는 할머니 등 뒤에 쏙 숨었다. 그러면 백발이 성한 할머니는 “얘가 때릴 데가 어딨냐. 네가 좀 참아라” 하고, 엄마는 “고모가 자꾸 감싸니까 애가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예요!” 씩씩하며 방을 휙 나가버렸다. 익선동 할머니는 내 최후의 방어막이었다. 

엄마가 잠잠해지면 나는 “할머니 고마워요” 큭큭대고, 할머니는 “에이구 싱겁기는” 하고 웃어버렸다.

내 나이 서른을 넘기고서, 언젠가 엄마에게 그땐 왜 그렇게 무섭게 나한테 그랬냐 물었더니 엄마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좀 생뚱맞은 답변을 했다.

할머니 모시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익선동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유독 엄마를 좋아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너는 두테비(일산 성석동. 두텁바위가 위치한 김해김씨 집성촌) 나와야 잘 산다” 하며 계속 엄마의 상경을 권했다. 엄마가 일산 상고를 졸업하고 고려은단(당시 경동시장에 위치)에 취직하면서, 엄마는 익선동 고모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엄마 외에도 두테비 김씨 집안의 많은 젊은이들이 고모집을 통해 서울 정착을 시도했다. 그러나 모두 고모의 불같은 성격에 벌벌 떨며 다들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오직 ‘똑순이’ 엄마만 고모를 견뎌냈다.

엄마가 늘 들려주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가 ‘ㅇㅇ은행 가서 돈을 뽑아와야 하는데 동전 바꿔올게 많으니 같이 가자’ 하여 엄마는 동전 챙길 가방을 들고 삼환빌딩으로 향했다.

문제가 제대로 터졌다. 돈의 일부를 동전으로 달라고 하자, 창구의 직원이 귀찮은 듯 500원짜리 동전 뭉터기를 퉁명스럽게 던지듯이 주다가 뭉터기 하나가 비닐이 찢어져 동전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앉아있던 할머니가 불같이 달려와서는 올려놓은 동전을 전부다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30년 단골인데 이딴 식으로 사람을 개취급해! 지점장 당장 나와!”


‘할머니 전성시대’를 엄마는 그 일화로 압축하여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는 익선동 사람들과 섞이는 걸 몹시도 싫어했다고 한다. 동네에 친구라고는 동네 만신 할머니와 ‘곱게 늙으신 여관 뒷집 꼬부랑 할머니’ 이렇게 두 명이 전부였다.

엄마가 아빠와 결혼을 하면서 익선동 집을 떠날 때, 할머니는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할머니가 심장판막에 이상증세가 생기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병원에서는 “지금 5초 내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소견을 줬다. 미국의 외동아들이 돌아왔다. 의사인 그도 할머니를 데려가려 했지만 비행기를 도저히 탈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결국 두테비에 SOS를 쳤다. 할머니는 혼자 살다 죽겠다고 버티다가 계속되는 아들의 설득에 조건부를 달았다.

“영희 아니면 난 싫다.

이렇게 하여 엄마아빠는 할머니 임종까지 임시로 보살펴 드리기로 하고 다시 익선동 집으로 들어왔다. 병원의 소견은 완전히 빗나갔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13년을 더 사셨다.

할머니 임종이 다가올 무렵, 엄마는 산소호흡기를 차고 있는 고모의 곁에서 하루 종일 팔다리를 주무르며 “고모 극락왕생하세요. 극락왕생하세요. 이생에 힘든 일 다 잊고 극락 가서 행복하게 사세요. 고모는 할 만큼 다했어요. 극락왕생하세요” 기도했다.

나는 지금껏 엄마가 할머니 모시는 게 힘들었던 이유가 단순히 노인네 수발의 어려움인 줄 알았다. 실은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고 아껴주었던 든든한 고모가 심장병으로 드러눕고, 치매를 앓다가 숨을 거두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그 시절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엄마는 절에 가시면 익선동 할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도한다. 엄마는 익선동을 떠날 수 없다.


할머니는 여전히 엄마의 방어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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