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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24. 2019

그림을 보려면 니가 그려봐3

트로이메라이

                                슈만- 트로이메라이




토요일 레슨에서 트로이메라이 중간점검을 받았다. 선생은 다 듣고 나더니,

“하하하! 와... 정말 한놈만 패는군요!”

“네. 저는 보통 죽자는 식입니다.”

“일취월장! 일취월장! 좋습니다 좋아요! 이제 반복연습뿐이네요. 여기서 기본기가 붙을수록 칠 때마다 뭔가 아 이 느낌이구나 싶은 그런 게 생길 테니까 꾸준히만 하시면 돼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제가 실은요. 올해 목표로 최소 세 곡은 마스터하려고 그러거든요.”

“아 세 곡?”

“네. 아들 돌이 1월 5일이니까 그때까지가 데드라인이다 생각하고 있어요.”

“이야~ 아빠 잘 만났네요! 자 그럼 다음 곡은 뭘 하시고 싶으세요?.”

“그... 참... 이거는요! 그냥 희망사항인데 혹시나! 정말 혹시나!”

“그니까 그 혹시나가 뭘까요?”

“리스트의...”

“아! 리스트... 리스트! 리스트 어떤 거?”

선생 얼굴에서 실소가 번진다.

“위안이요.”

“위안?”

“예! 콘솔라시온!”

“아 위안! 안됩니다! 지금은 안된다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예! 그냥 희망사항이었어요. ㅋㅋㅋㅋㅋ”

“다른 거 또 없어요?”

“있죠!”

“혹시 운 소스피로(탄식) 아니죠?”

“아뇨아뇨 ㅋㅋㅋㅋ 그 정도로 허무맹랑하진 않아요 ㅋㅋㅋㅋ “

“좀 쉽게 갑시다 ㅋㅋㅋㅋ”

“그.... 전에 선생님한테 한번 얘기했던 곡인데.. 선생님이 트로이메라이보다 3배는 어려울 거라고 했던 그 곡이요.”

“그게 뭐였죠? 기억이 안 나네?”

“차이코프스키.”

“차~~~! 아~~~! 차이코프스키 어떤 거?”

선생이 킬킬킬 웃으며 소파에 앉는다. 그래도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다.

“사계 중 10월이요.”

“10월... 10월... 음... 뭐였지? 그거 생각이 안 나네? 틀어줄 수 있어요?”

선생이 스피커로 1분 정도 듣더니,

“가능합니다! 일단 곡이 천천히 가니까 연습하면 됩니다. 다음에 올 때 악보 출력해서 가져오시면 돼요!”

“오! 감사합니다! 근데요. 제가 10월 중순까지 마스터될까요?”

“될 거 같은데요?”

“10월 말이 집사람 생일 이어서요.”

“아이고야! 되죠 물론이죠! 연습만 꾸준히 하면 됩니다~”

일요일 밤, 나는 9시 반부터 트로이메라이만 죽어라 쳤다. 다행히 연습실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결국 12시에 거의 다다라서야 비교적 매끄러운 완주곡을 얻어냈다. 아내에게 이 미약한 노력의 결실을 녹음으로 ‘헌정’했다.

2014년, 서울 예당 정명훈 리사이틀 맨 앞자리에서 지켜봤던 곡이다. 건들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족히 5백 번은 넘게 쳐도 그 장인의 손맛에는 털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슈만처럼 못 칠 바에 내 방식대로 친다.


생겨먹은대로 산다.



학원에 가면 그랜드 피아노 옆 진열대에 놓인 액자 하나가 늘 눈에 밟혔다. 액자 속에는 어느 오케스트라 협연과 함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선생이 있다. 신중하게 한 음 한 음을 고르는 표정이며 손가락이며 자세며 그 주위를 둘러싼 바이올린의 차분함이며 세세한 공연장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생은 한마디로 재미난 사람이다. 레슨 때를 제외하고는 평소 별다른 진지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피아니스트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예능감과 말솜씨, 유쾌한 제스처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동갑이었다. 여러모로 말이 통했다. 가벼운 농담 따먹기만으로도 선생과 나는 급격히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늦은 밤 학원에 가서 연습을 마치고 방을 나오니, 선생이 혼자서 야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화를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한화 팬이세요?”

“아요 당연하죠. 제가 대전이 고향인데.”

“아... 그럼 서울에서 대학 마치시고 내려오셨어요?”

“고거는... 조금 텀이 있죠. 바로 내려온 건 아니고... 내려온 지는 한 일 년 됐어요.”

“아.. 얼마 안 됐네요?”

“그렇죠. 대전 내려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는 이제 4년 됐나? 입사하고 왔으니까 대충 그 정도 됐는데... 아직도 대전 잘 몰라요.”

“저도 외지 생활을 많이 해서 대전 잘 몰라요. 청사 근처나 뭐 맛집 이런데나 알지 저도 따지고보면 사실 대전 토박이 이런 건 아니죠.”

선생 얼굴에 살짝 그늘이 스쳐간다. 하긴 서울에서 학교생활했으니 타향살이를 꽤 했겠구나. 아. 그래. 저 사진 뭔지나 물어보자.

“선생님. 근데 저 사진이요.”

고개를 획 돌려 두리번거린다.

“어떤 사진이요?”

“저기 협연 사진이요.”

“아! 저거! 그냥 옛날에 했던 건데...”

말을 흐리며 실실 웃기만 한다.

“무슨 곡이었어요?”

“어... 저게... 베토벤 3번 아세요?”

“예.”

“어? 아세요?”

“밤~밤! 빰빠밤바밤바밤바밤!”

“야~~~ 아시는구나!”

“듣기만 했죠. 근데 어디랑 협연하신 거예요?”

“저게... 폴란드 사람들인데... 하하”

“어!? 바르샤바 필하모닉인가요?”

“아니 아니 진짜는 아니고... 바르샤바에서 오긴 왔는데 하하하! 약간... 뭐 짝퉁 같은 거죠.”

“하하하! 짝퉁이란 표현은 너무 좀 그렇잖아요!”

“진짜 짝퉁 맞아요! 연주 끝나고 났더니 바이올린 하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보고 사인을 해달라고 이러고 앉아있고 아놔 진짜 그때 웃겨가지고.”

약간의 헛웃음. 머리를 한쪽으로 살살 쓸어 넘기는 멋쩍음으로 선생은 남다른 소회를 풀고 있다.

“연주회 또 언제 하실 예정이세요?”

“아이고아이고 이제 안 할 거예요. 안 합니다.”

“왜...?”

“제가 총 두 번 리사이틀했었는데... 아... 이건 정말... 할 게 못되요.”

“그니깐.. 뭐가 제일 힘든...?”

“다 힘들죠. 다 힘든데... 일단 공연 일주일 전부터 잠이 안 와요. 연습을 여덟아홉 시간 해도 이건 제정신으로 하는 게 아냐. 막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캬...”

입맛까지 다실 정돈가?

“그 정도로 압박감이 큰가요?”

“내 이름 걸고 하는 거니까. 크던 작던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왜냐면 한 음도 틀리면 안 되니까. 암보로 하는 겁니다.”

“악보를 두고 치면...”

“그럴 수가 없죠.”

“왜 예전에 대전예당에 백건우 선생님 오셨을 때 보니까 악보 보시면서 하시던데요. 안 되나요?”

“아하... 그건 대가들만... 진짜 대가들만!”

“아... 그런 게 있구나.”

선생은 대전에 피아니스트가 리사이틀할 수 있는 장소가 30여 개가 넘는다고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귀국 연주회니, 투어 연주회니 갖가지 공연이 열리는 곳이 대전이라고 했다.

“서울 사는 제 친구가 얼마 전에 대전에서 공연했었어요. 요기서 좀 거리가 있긴 한데... 아무튼 주민센터보다 조금 큰 무슨 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을 했는데... 그래서 여기 와서 일주일 연습을 하는데... 나 참 웃긴 게... 쇼팽 녹턴 20번을 아무리 쳐도 암보가 안 되는 거예요. 꼭 틀리는 부분에서 그냥 넘어가질 못하고 계속 반복해서 틀리니까 결국에는 그 날 그 곡만 악보 펴고 했어요.”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무언가가 있었나 보죠?”

“조성진, 랑랑 뭐 이런 사람들은 정말! 진짜 정말 스페셜한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리사이틀 한 번 하고 나면 5킬로 이상 씩은 빠져요.”

“선생님도 완전 고통스러우셨나 보네요.”

“들어가기 한 두어 시간 전쯤에 심장 안정제를 먹거든요? 그걸 먹으면 그래도 최소한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의 긴장감은 막아주거든요. 아요~~ 못해 못해 괜히 했어! 이젠 진짜 못해.”

손사래를 친다. 무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건반에 손을 얹을 때까지 시간이 테이프가 늘어난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그 고통은 떠올리기 싫다고 했다. 첼로의 전설 로스트로포비치도 마지막 연주회까지 극도의 공포감 속에서 연주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자신이 길러낸 제자들이 이젠 자신의 역량을 넘어, 코 앞에 앉아서는 눈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자체부터 고통이었다는 고백을 했다 한다.

“저 같은 사람은 맘 편하게 연주할 수 있겠네요!”

“아뇨. 막상 연주회 한다고 해 보세요. 죽어요. 죽습니다.”

“그래도 전 틀려도 되잖아요 하하하!”

“사람 욕심이 그게 아냐 아냐. 막상 해보면 알아. 진짜 나중에 한번 해 보세요. 맛을 봐야지 이건 말해서 몰라.”

“그렇겠네요.”

“그래도.. 그런 걸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죠. 멋있는 사람들이에요.”

“뭘로 이겨낼까요?”

“하나밖에 없어요. 상상을 초월하는 연습량! 이거 하나로 쪼개는 거예요. 아!!!”

선생은 불현듯 뭐가 떠올랐는지 박수를 짝짝 치며 ‘아아 그러면 되겠다’를 몇 번 되뇌더니,

“시간 되면 내일 밤에 한번 오세요. 시간은 제가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운데... 제 후배 중에 좀 치는 애가 오거든요. 내일 밤에 언제 온다니까 시간 맞으면요. 한 번 인사라도 하고 그러시죠.”

“오. 좋습니다. 근데 누구시길래...?”

“일명 최건 반이라고... 다른 건 몰라도 스크리아빈은 얘가 꽉 잡고 있어요.”

“스크리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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