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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27. 2019

그림을 보려면 니가 그려봐 4

피아노로 군면제를 받았다고요?



선생은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고 오직 팔의 힘, 어깨에서부터 손가락까지 이어지는 전체의 떨어지는 중력으로만 건반을 눌러야 한다고 했다. 레슨이면 이 연습만 선생과 나란히 앉아 10분을 반복한다. 이따금 선생이 “어! 지금 그거! 딱 그렇게 해보세요!” 하는데 내가 친 이전의 것과 별 다른 차이를 알 수 없다. 머리로도 이해가 안 가고, 몸으로도 쉽게 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바이엘 찔러보기’를 하겠다고 한다. 전에 했었던 파트 아무거나 선생이 찍으면 제대로 하는지 못하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선생은 자신이 쿡 찔러도 내가 꿈쩍 않을 때, 그러니까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쯤이면 ‘피아노 명곡집’이나 이루마 정도의 곡은 아주 쉽게 칠 수 있다고 했다. 선생은 바이엘주의자다.

“학원 가면 쭉쭉쭉 책 한 권 다 넘어가잖아요. 그냥 그때그때 칠 줄 알면 체르니 100, 30, 40, 50 막 건너가는데... 체르니 50치는 사람한테 바이엘 딱 들이밀고 쳐보라고 하잖아요? 십중팔구가 못 쳐요. 왜 못 치냐? 제대로 안치고 넘어간 거예요. 그래 놓고 막 밖에서는 내가 체르니 50번까지 했다느니 뭐 이러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왜? 못 치니까! ”

선생은 가끔 열정이 폭발하거나, 마음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면 토해내듯 기본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손가락이 눌리진 않았는지, 손등이 너무 내려가진 않았는지, 팔꿈치에 힘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본다. 농구로 따지면, 자유투 점프의 자세, 공을 쥔 손 모양, 뿌리는 손가락의 힘 같은 것을 체크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시다시” 소리가 귀에 박힌다.

고개를 갸웃하며 띵띵띵 같은 음을 눌러본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것은, 체르니도 분명히 연습하라고 만든 교재인데 그건 대체 언제 친단 말인가.

“체르니요. 왜 가르치는 선생들이 그걸 안 알려주는지 모르겠지만... 음... 샘도 애호가니까 알겠죠. 체르니한테 배운 대표적인 음악가 누구죠?”

“리스트요?”

“리스트예요! 그 리스트라고! 프란츠 리스트 가르칠 때 교본이 체르니라구요! 그걸 그냥 나간다고? 이게 진짜 잘못된 겁니다!”

일전에 어느 책인가에서 체르니가 어린 리스트를 처음 만나 그의 연주를 접한 소감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토록 열정과 영혼이 넘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건 기교가 아니라 기본이다. 나는 그것을 가르치는데 주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리스트가 아니다 ㅜ

“바이엘이랑 체르니랑 그렇게 격차가 큰가요?”

“격차가 있죠. 지금 샘이 치고 있는 차이코프스키는 체르니 100은 떼어야 사실 진도 빼는 곡이에요. 그럼 자! 우리가 체르니 100을 왜 배우냐? 모차르트 치려고 배우는 거예요.”

음? 모차르트? 모차르트??

“체르니 100은 모차르트의 기본 화성법을 이해하려고, 심도 있게 치려고 배우는 거예요. 거기에 다 들어있어요. 그럼 그다음 30, 40, 50은 왜 있냐? 베토벤 치려고! 근데 베토벤 치실 건 아니잖아요?”

음? 칠 건데요?

“아... 뭐... 그렇긴 하죠.. 하하..”

“그차나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냥 생활에서 피아노를 즐겁게 치면서 하는 건 이 책을 완전히 마스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 목마르다. 냉커피나 한잔 마시죠!”




티비 앞에 앉아 선생과 앉아 이런저런 잡담을 한참 늘어놓고 있으려니, 훅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파란 운동복 차림에 크로스 백 차림을 한, 환한 인상의 청년 한 명이 들어온다.

“오. 왔어. 샘 연습 좀 하고 있어요. 잠깐만.”

바이엘, 트로이메라이, 사계 10월. 찬찬히 악보를 넘겨봤다. 난이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의 나로선 셋 모두 어렵다. 풋살 두 번째 날, 다리가 후들거려 내 뜻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던 그때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 밖에서 현란한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린다. 대단한 연습생 한 명이 또 들어왔나 보다.

어라.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을 친다? 2번 카덴차를 친다. 살짝 문을 열어놓고 들어 본다. 청년은 유려한 손놀림을 유지한 채 선생과 대화를 나눈다.

“제 평생 이 거 한번 공연해 보는 게 소원이에요.”

우와. 라흐마니노프 3번으로 넘어간다. 본인이 좋아하는 구간구간을 악보를 넘겨가며 친다. 이번엔 좀 버거워한다. 선생도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한마디 한다.

“이건 칠 수가 없어. 곡 전체가 다 카덴차야. 이걸 어떻게 쳐! 봐봐. 여기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 넘어가는데.. 우와 이걸 와... 말이 안 되지.”

빼꼼 문을 열고 나와 그의 뒤에 서서 한참을 감상했다. 선생에게 입모양으로 ‘누구세요?’ 하니 ‘어제 말한’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 최건반씨.

“저기 초면에 죄송한데요. 혹시 라흐마니노프 3번 1악장 카덴차 한번 들려 주실 수 있나요?”

“아뇨아뇨 그건 못 쳐요. 그걸 치면... 하하하하.”

선생과 최건반씨 모두 손사래를 친다. 선생이 손가락을 딱 치며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간만에 또 왔는데 손 좀 풀어야지. 여기 우리 샘이 또 열정이 대단한 분이세요. 샘. 이 친구가 스크리아빈 전문가예요.”

“아 형 왜 그래요.”

“자 우린 여기 앉아서 들읍시다! 자 최건반! 최건반!”

“푸핫. 그럼 뭐 칠까요?”

“어 너 치고 싶은 거 아무거나 다 좋지!”

스크리아빈 소나타, 이어지는 쇼팽 전주곡 1,2,4,8,14,15,24번에 나는 물 한잔 안 마시고 감상했다. 연주가 끝나고, 나는 두 손을 쉐킷하며 연신 브라보를 외쳤다. 최건반씨는 멋쩍었는지 연거푸 고개 인사를 했다.

“와. 선생님 얘기대로 아 오늘 저 여기 오길 잘했네요! 와. 돈 주고 봐야 되는데 이거 뭐 술이라도 대접해야 하나. 정말 잘 들었습니다!”

“스크리아빈의 왕자! 우리 최건반! 유튜브 인기 남이에요! 검색해서 나중에 한번 들어보세요! 이렇게 또 좋은 연주자가 학원에 와서 분위기를 확 올려줘야 재미가 있지! 굿! 좋습니다 좋아요!”

“아까 라흐마니노프 피협칠 때 이거 누구야 하면서 진짜 놀래서 나왔어요. 야. 이거 연습할 때가 아니구나. 장난 아니구나.”

“아녜요 아녜요 하하. 그건 저의 꿈인거구요. 아무튼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근데 형?”

“왜?”

“내일 전설의 피아니스트는 안 오나요?”

“아 맞다 맞다! 내일 오후에 내려온대. 샘! 내일도 오세요. 내일은 진짜 꼭 와야 돼! 별일 없으면 오세요? 알았죠?”

“누가... 오나요?”

“누가 오냐면... 우와... 이 분은 누구냐면... 피아노로 군면제받은 사람 봤어요?”

“피아노로 군면제를 받았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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