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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30. 2019

그림을 보려면 니가 그려봐 5

쇼팽 발라드 1번



안경태.

영심이 쫓아다니던 순애보 안경태. 그것도 나이 든 안경태.

임 프로를 봤을 때 첫인상이었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셔츠 사이로 불룩 나온 아랫배, 검은 바지 위에 얹어놓은 듯한 낡은 구두. 내가 만약 그의 눈빛을 보지 않았다면, 주저 없이 연습실을 나와 바로 집으로 갔을 것이다.

금테 안경 사이로 희끗 지나가는 샤프한 시선, 눈썹 사이로 힘차게 그어진 ‘내 천’ 자의 미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까탈스러움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의 자리 맞은편에 앉아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먹고 있으려니 피아노 선생이 곧 바깥문을 열고 들어온다.

“오 ! 연습 끝났죠! 자자자! 어제 말씀드린 우리 임 프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형. 저 피아니스트 아니에요.”

무뚝뚝한 말투. 냉랭함 그 자체.

“아 이런 겸손함까지 갖춘 우리 임 프로가 학원에 친히 왕림을 했습니다!!! 인사하시죠!”

방에 들어가 있던 '건반'님이 나와 한 술 더 뜬다.

“저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분이 진짭니다! 아  이런 기회 쉽지 않죠!”

“우리 임 프로가 휴가 차 또 왔는데 살짝 또 우리 팬들을 위해서 맛보기 한번 가야지!”

“아뇨아뇨아뇨아뇨. 안쳐요. 연주 안 한 지가 언젠데... 이제 피아노 보면 싫어져서 안 해요.”

“아... 무슨 일이 있으신지...”

“학생들 가르치다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꾸 정 떨어지고... 안쳐요.”

“아네... 강습...”

“네. 가르치다 보면 화가 나서... 안쳐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안 보인다.

“에헤이~! 그냥 조율 한번 봐준다 하고 딱 한곡! 진짜 딱 한곡 치고 나가자!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오늘 그냥 코스로 가자!”

“그럼 형......... 중국집 갈까요?”

“오 좋지! 완전 좋은 데가 있어요! 거기 가자!”

 사람 뭐지...????? 이렇게 쉽게 되는 거야?

“피아노가 구리긴 한데 그냥 맛보기다 하고 한번 갑시다! 어떻게! 잠깐  좀 풀까? 이 방 비었는데 여기서 풀래?”

“우리 임 프로님께서 몸 풀고 계시는 동안 우리는 경건하게 앉아있죠! 자 감상하실 분들 다들 소파로 오시죠!”

연습생까지 다 모이니 남자 다섯 명이다. 임 프로가 아무 말 없이 연습 방으로 들어간다. 조용히 선생에게 물었다.

“연주해주신다는 거죠?”

“아 그럼요 그럼요! 내가 그래도 형인데 동생이 형 부탁 한번 들어주는 거죠! 몸 풀려면 한 삼십 분 정도..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근데요... 피아노로 군면제받으신 거죠?”

“국제 콩쿠르 우승에 빛나는 군면제죠! ㅇㅇ야! 임 프로가 무슨 콩쿠르이었지?”

“프랑스 에피날 콩쿠르!”

“아아 맞아 맞아! 이게 다 면제되는 게 아니고 국가에서 지정해 준 콩쿠르에서 우승을 해야 면제를 시켜주는 거예요.”

“아하. 그런 것도 있네요. 그럼 파이널에서 뭐 치셨어요?”

“쇼팽 피협 1번 맞지?? 네네! 우리는 아무도 못 치는 거!”

“아하... 아이고. 어려운 분 만나 모처럼 좋은 기회 잡았네요!”

갑자기 방문이 열린다.

“형. 칠까요?”

“어??? 벌써?? 5분밖에 안 지났는데? 천천히 해~!”

“그냥 치죠뭐.”


건방지다고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자신감?

“뭐 칠까요?”

“너 치고 싶은 거 아무거나 쳐!”

“뭐 치지...?”

머리를 긁적인다. 쇼팽 녹턴, 베토벤 열정, 바흐 골든베르크, 프로코피예프, 뭐 가릴 것 없이 남자들의 주문이 쏟아진다. 임 프로가 건반을 보며 턱을 슥슥 문지른다.

“쇼팽 발라드 1번 할게요.”







천장과 샹들리에 사이의 고정대를 정교한 톱으로 주욱주욱 밀어 자른다. 툭 하고 마지막 끊어지는 순간, 눈을 찌를 듯한 유리 빛깔 하나하나가 사방에 흩어지며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다.

샹들리에 곳곳의 유리 문양이 지면에 닿으며 열 조각, 스무 조각, 많게는 수백 조각으로 나뉘어 대리석 위를 데구루루 구른다.

임 프로는 확실히 연습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미처 자르지 않은 열 손가락의 뭉둑한 손톱이 건반 위에서 탁탁탁 요란한 소리를 냈다. 피아노 옆에 타악기가 추임새를 놓는 것 같았다.

단 한 음도 틀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쇼팽을 오늘 나는 만났다. 비 내리는 마요르카 섬의 저택에서 외출한 조르주 상드 부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침내 지쳐서는 악보를 갈기갈기 찢고서 머리를 한 가득 움켜쥐다,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아 밖 풍경을 보며 냉랭하게 가늘고 긴 손가락에 분노를 집중하는 그 한 사람이 재림했다.

선생은 피아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선생의 열정이 붉어져 올라온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넘을 수 없는 좌절감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다만 타건, 자세, 페닯 속속들이 살펴보는 그 눈만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딴 단단단단단단단단단단단 딴! 쾅............’




갈채 박수, 박수의 박수, 악수의 악수, 선수의 겸손, 겸손의 힘줄. 가지런한 손 모음. 일동 기립 속에서 임 프로는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때. 최건반님께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런 날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죠. 명사와의 즉석 토크를 제안합니다! 밥시간이 멀지 않으니 빨리빨리 물어보세요!”

압도적인 연주 속에 모두가 쪼그라들어 감히 손을 들지 못했다. 뻔뻔한 내가 먼저 깃발을 올렸다.

“선생님, 멘털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일동 동그란 눈으로 주목. 임 프로가 돼 쳤다.

“멘털 관리는 정신수양 이런 거를 얘기하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니고... 일종의 그런 거 있지 않나요? 리사이틀이라던지 콩쿨이라던지...생각만 하면 얼어붙을 것 같은데요. 야구를 예로 들자면 타자가 매일 연습을 꾸준히 해서 시합에 나갔는데 생각보다 실수가 많은 겁니다. 윤디 리 같은 경우도 최근에 그랬고요. 이렇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그.. 뭐랄까.. 대처를 어떻게... 하시나요?”

임 프로가 단호히 되받아쳤다.

“윤디 리는 연습을 안 한 겁니다.”

“예?”

선생이 의자에서 되돌아 앉는다.

“야구는 양자 간의 싸움이니까요. 그걸로 예시를 들긴 힘들고요. 양궁으로 비유하면 더 맞겠네요.”

“양궁이요..

“네. 10점 만점이라고 하면 최소 9점 이상은 맞춰야 박수를 받겠죠?”

“그렇겠죠. 아무래도...”

“방법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연습 밖에는 없어요. 마찬가지예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전제로 두고 치는 겁니다. 치는 도중에 핸드폰이 울린다던지, 갑자기 조명 하나가 꺼진다던지, 피아노가 조율이 이상하던지 그런 것들이죠. 다 시나리오에 두고 가상 연습을 합니다. 상황 발생! 즉시 대처! 이런 거라고 설명드리면 맞을까요?”

“그렇겠네요...”

“양궁 선수들이 바람을 계산하듯이, 저도 그런 하나하나의 상황들을 미리 확인하고서 무대에 올라갑니다. 고통스럽죠.”

“고통스러우면 왜 연주 하나요?”

“사는 게 마냥 즐거우세요? 이리치고 저리치고 하다 보니까 즐거움도 찾고 그런 거잖아요?”

“그럼 제 입장에서 또 질문드릴게요.”

“네.”

“제가 2014년 이후로 새로운 글을 못 내고 있습니다. 저는 글을 못 내면 몸이 아파요. 그런데 아직 제 성에 못 찹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면 되죠.”

“뭐를... 어떻게 내죠?”

“지금 쓰고 계신 게 있나요?”

“예...... 그냥... 두런두런.”

“쓰세요.”

“네... 쓰고는 있죠.”

“네. 더 잘 쓴다고 하면 기운 빠져요. 그냥 계속 쓰세요. 계속 쓰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다 보면 9점도 맞고 운 좋으면 10점도 맞고 하는 거니까요.”

선생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종로 부암동에 교습실이 있단다. 놀러 오란다. 술 한 병들고 찾아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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