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졌어. 집이.
마침 주머니에는 700원이 있었다. 나는 집 앞 구멍가게 공중전화로 가서 영뽀의 번호를 눌렀다.
“영뽀야 나다.”
“어. 왜?”
“우리 집에 불났다.”
“진짜? 어디에? 부엌에?”
“그게... 다 탔다.”
“뭐??”
“없어졌어. 집이.”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여름이면 찌는 듯이 덥고, 겨울이면 방에서 입김이 나오는, 올라가는 나무 사다리 계단은 또 어찌나 높은지, 여하튼 그 집에서 이제 그만 나오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아마도 옛 회사의 직원이었던 것 같은데 예전 밀린 월급을 달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떼인 돈 대신 받아들입니다' 아저씨 2명이 찾아왔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골방으로 밀어 넣고 이불 덮고 누워있으라 했다.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반대편 방에서는 실랑이가 붙어 이러쿵저러쿵 말이 오고 갔다. 두세 시간 지났을까, 아저씨 두 사람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덩치 큰 아저씨 한 명이 나를 쳐다봤고, 나 역시 아저씨를 쳐다봤다. 그들은 곧 돌아갔고 나도 이불속에서 나왔다.
가정에는 분노와 좌절, 망연자실한 차디찬 공기가 늘 가득했다. 모두 날이 서 있었고, 아빠 엄마의 말다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뻥뻥 터졌다.
아빠는 곧 일어설 거라고 했지만 나는 절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도 노력하지 않았고, 노동일만 찾았다. 아무리 어린 고등학생이라도 그 정도 집구석 돌아가는 모양은 쉽게 알아먹었다.
명절날, 친척 중 누군가 덕담이라고 "그래. 올해는 작년보다 많이 좋아질 거야." 하길래 내가 답해줬다.
"그런 소리 마세요. 더 많이 안 좋아질 거예요."
실제로 내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 와서 더욱 깊은 지옥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쏟아지는 그 지옥불을 마주하는 앞에서, 느닷없는 맞불이 놓인 것이다.
우리는 과연 재만 남은 이 땅을 거름 삼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