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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Sep 29. 2019

삼청동 골목길엔...(4)

없어졌어. 집이.



열아홉 살, 그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2층 안방에서는 엄마와 동생이 느긋하게 누워 TV를 보고 있었고, 아빠와 나는 내 방에서 고3 하반기 공부전략에 대해 이것저것 짚어보고 있었다. 수험생의 매일매일이 그랬던 것처럼, 그날도 모든 것이 일상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빠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뭔가 메스꺼운 냄새가 가까운 어딘가에서부터 스멀스멀 날아왔다. 창문을 닫았지만, 코를 찌르는 탄내는 점점 심해졌다. ‘뭔 일 있나?’ 확인 차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찰나, 방 가장자리에서 일제히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건 고기를 태워먹었을 때 나는 연기와는 완전히 다른, 그야말로 새까만 암흑이었다. 


어? 


방을 뛰쳐나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 딛기 무섭게 ‘와장창’ 소리와 함께 시뻘건 화염이 계단 문을 초전박살내고서 벽을 타고 솟구쳐 올라왔다. 나자빠진 채로 뒷걸음질 치며 고래고래 엄마와 동생을 불렀다. 네 사람이 내 방 창문으로 나와 옆 집 지붕을 타고 빠져나갔다. 그리고 골목길 한복판에 내려와 소방차를 기다렸다.


옆집에서 난 불이 이웃집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소방차보다 불이 빨랐다. 3분 만에 총 네 집이 탔다. 특히 우리 집의 피해가 가장 컸다. 기둥만 남겨놓고 거의 모든 것이 다 탔다. 돌이켜보니 그 집은 마치야 형식(1층 상점, 2층 주거공간)의 옛 일제식 가옥이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시작한 공부의 정리물은 책상 위에서  검은 액체로 뭉개졌고, 작은 용돈을 아끼고 아껴 바로 며칠 전에 샀던 필라 운동복과 소니 워크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년 동안 모으고 또 모았던 SES 사진첩, 서태지와 아이들 전 앨범, 이 소중한 나의 모든 재산이 잿더미에 묻혔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우리 가족 네 사람 모두 무사했다는 것.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불을 낸 옆 집 할머니의 시신은 오른 팔만 남았다고 한다.


마침 주머니에는 700원이 있었다. 나는 집 앞 구멍가게 공중전화로 가서 영뽀의 번호를 눌렀다.


“영뽀야 나다.”

“어. 왜?”

“우리 집에 불났다.”

“진짜? 어디에? 부엌에?”

“그게... 다 탔다.”

“뭐??”

“없어졌어. 집이.”
 


영뽀는 쌩쌩 자전거를 타고 10분도 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 이렇게 큰 불이 났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녀석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하다. 연달아 동네 친구들이 도착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교과서와 자습서, 옷가지 등 당장에 필요한 생활물품들을 들고 왔다. 모든 것이 차차 피부로 다가왔다. 나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아니, 속이 다 후련했다. 그냥 ‘푸하하 이게 대체 뭐야’ 하며 크게 웃었다.



“그래! 기왕에 타버린 거 시원하게 잘 탔다.”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여름이면 찌는 듯이 덥고, 겨울이면 방에서 입김이 나오는, 올라가는 나무 사다리 계단은 또 어찌나 높은지, 여하튼 그 집에서 이제 그만 나오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아마도 옛 회사의 직원이었던 것 같은데 예전 밀린 월급을 달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떼인 돈 대신 받아들입니다' 아저씨 2명이 찾아왔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골방으로 밀어 넣고 이불 덮고 누워있으라 했다.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반대편 방에서는 실랑이가 붙어 이러쿵저러쿵 말이 오고 갔다. 두세 시간 지났을까,  아저씨 두 사람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덩치 큰 아저씨 한 명이 나를 쳐다봤고, 나 역시 아저씨를 쳐다봤다. 그들은 곧 돌아갔고 나도 이불속에서 나왔다.

가정에는 분노와 좌절, 망연자실한 차디찬 공기가 늘 가득했다. 모두 날이 서 있었고, 아빠 엄마의 말다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뻥뻥 터졌다.

아빠는 곧 일어설 거라고 했지만 나는 절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도 노력하지 않았고, 노동일만 찾았다. 아무리 어린 고등학생이라도 그 정도 집구석 돌아가는 모양은 쉽게 알아먹었다.

명절날, 친척 중 누군가 덕담이라고 "그래. 올해는 작년보다 많이 좋아질 거야." 하길래 내가 답해줬다.

"그런 소리 마세요. 더 많이 안 좋아질 거예요."

실제로 내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 와서 더욱 깊은 지옥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쏟아지는 그 지옥불을 마주하는 앞에서, 느닷없는 맞불이 놓인 것이다.

우리는 과연 재만 남은 이 땅을 거름 삼을 수 있을까?



아빠 엄마가 새 집을 알아보는 동안, 나는 이웃집 친구네에서 묵고, 동생은 영뽀의 여동생인 영아의 방에서 묵었다. 거의 보름의 시간 동안 그렇게 생활했다.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셨다. 교복도 나누어 입게 하시고, 늘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꼼꼼하게 챙겨주셨다.

 
영뽀 어머니는 중병을 앓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동조차 하기 힘든 몸을 이끄시고서는  ‘운현 어머님’들을 불러 모으셔서 우리 집을 도와줄 방안을 마련하셨다. 영뽀 어머니는 우리 엄마의 수십 년 친구였다.

 
많은 부모님들이 따듯한 정을 보내주셨다. 영뽀 어머니가 대표로 우리 엄마를 찾아와 당장에 필요한 생활비를 손에 쥐어주셨다. 그때 맨돌이 어머니가 엄청난 도움을 주신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친구들과 부모님들께 갚지 못할 큰 빚을 졌다.



이사는 불과 100미터 옆으로 갔다. 새로 이사 간 집에서 아빠 엄마는 익선동 집에서처럼 매일같이 화초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매년 여름이면 보랏빛 나팔꽃이 소담스레 피어 엉금엉금 을 타고 지붕을 넘어가는 그 모양을 보는 맛이 꽤 좋았다. 청소기 돌리기, 물걸레질, 물건 정리, 설거지, 화장실 청소할 것 없이 일단 시작하면 기가 막히게 마무리 짓는 나의 청소 습관은 이때 완전히 굳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볼품없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건물이었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성장해 나아가는 집안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집], 색연필, 2012.12.24 / 백약



모두가 만들어 준, 모두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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