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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Oct 03. 2019

'삼청동 맛집'의 탄생

인사동에서부터 시작된 '동네다움 만들기' 실험




삼청동은 교통이 불편했다. 



삼청동-서울역 간 마을버스를 제외하면 마땅한 대중교통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정거장을 가겠다고 하면 안국역까지 약 15분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난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찾아오기 힘들고,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는, 정말 소담한 마을이었다.


인사동 관광거리 조성이 본격화되고 진짜냐 가짜냐 ‘인사동다움’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윗동네도 같이 흔들거렸다. 인사동의 번잡스러움과 비싼 임대료에 이골이 난 골동상과 화랑 주인들이 사간동, 안국동, 화동, 가회동 일대로 서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변 기와집들은 문화예술의 격을 높여줄 수 있는 DP 모빌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것이 ‘북촌’ 탄생의 시작이다.

[커피가 있는 하루], 색연필, 2011.11.4 / 백약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삼청동 일대도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정독도서관 앞에 커피빈이 들어섰다. 이 조그만 동네에 대형 프랜차이즈라니. 곧이어 수많은 음식점, 베이커리, 카페들이 동네 골목 곳곳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종로 2가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나면 나는 인사동을 거쳐 풍문여고-덕성여중고-정독도서관-삼청파출소 라인을 타고 걸어 올라왔다. 새벽녘 가로등을 따라 타박타박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걷던 그 길은 사색에 잠기기에 더없이 좋았다.


그 즐거움도 잠시였다. 인사동 포화상태가 일어나면서, 내가 걷던 그 길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마을의 대다수 주택들이 상점으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누가 이 바닥에서 생존할 것인가 하는 역동적인 서바이벌이 시작되었다.


개발 전, 정독도서관 앞에서 뭘 먹겠다 하면 먹쉬돈나와 라땡(라면땡기는날) 딱 두 곳이었다. 먹쉬돈나는 떡볶이에 이거저거 넣어 볶아먹는 신당동 떡볶이식의 메뉴였다. 손님 열의 아홉은 풍문/덕성 여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만 주르르 줄 서서는 ‘아줌마 언제 자리나요?’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먹쉬돈나가 너무 줄이 길어 포기한 학생들은 그 바로 옆옆 블록의 떡볶이집으로 갔다. 거기는 그래도 종종 자리가 남았다. 하지만 그 군중 사이에 나 혼자 가서 냠냠 먹겠다니. 생각해 볼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먹쉬돈나 맞은 편의 라땡을 자주 갔다. 대부분 도서관 등하굣길에 수험생들이 후루룩 먹고 가기에 좋았다. 맛이 썩 괜찮았다. 수프 대신 육수를 끓여서 보글보글 뚝배기에 라면을 끓여줬다. 그 집은 일찍부터 가정집을 터서 가게로 썼다. 집 안까지 모두 상이 놓여있었고, 점심 저녁 시간은 항상 기다려서 먹어야 했다.


가장 먼저 잭팟을 터뜨린 건 먹쉬돈나였다. 우리보다 일본 쪽에서 먼저 관심을 보였다. 갖가지 일본 잡지에 실린 식당의 모습이 문 앞에 가득 붙어있었다. 매출액이 급증하자 식당은 길가에서 보다 안쪽으로 깊숙하게 이동했다. 알아서들 찾아오니까. 그러면서 항상 제2인자에 머물던 그 옆의 떡볶이집도 제법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 맛집 열풍이 몰아치면서 먹쉬는 명실공히 브랜드를 걸고 전국 체인점으로 거듭났다. 주방에서 늘 땀범벅이시던 사장 아주머니는 어느덧 대한민국 맛집의 대모로 우뚝 섰다. 이쯤해서부터 학생들을 포함한 옛 단골들은 등을 돌렸다. 맛이 달라졌다.


라땡도 매체로부터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이전도, 확장도 하지 않았다. 손님도 원래대로 받을 만큼만 받았다.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덕분에 맛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종종 들르곤 한다.


이 변화의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소격동 쌀집이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관광 패턴을 파악하고는 곧 팔소매를 걷어올렸다. 쌀집 앞에 ‘어디 쌀로 만든 떡볶이’ 내걸더니 가판에서 떡볶이를 만들었다. 컵떡볶이가 불티나게 팔렸다. 쌀집 벽면이 셔터형으로 개조되고 쌀창고로 쓰던 내부가 테이블 공간으로 변신했다. 꿩 먹고 알 먹고 대박이 터졌다. 온 가족이 투입되어 가게를 봤다.


바로 맞은 편의 쌀집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으로 만든 호떡’을 팔기 시작했다. 줄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호떡네는 떡볶이네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호떡네는 집의 일부를 구두가게에 임대를 줬다. 구두가게는 호떡네까지 깔끔하게 겉모습을 단장시켜줬다.


선의의 경쟁에서 불꽃같은 경쟁으로 변한 것은 식혜 사건이 생기고 나서부터였다. 떡볶이네가 신메뉴로 식혜를 팔자, 호떡네도 질세라 식혜를 팔았다. 보이지 않는 수 싸움이 물밑에서 이루어졌다. 용도변경 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놓고 싸웠다가는 공멸이기 때문에 서로 조심히 경계만 했다.


완전한 이방인으로 들어와 성공한 커피집 두 곳이 있다. 커피방앗간과 커피팩토리. 다 정독도서관 맞은편에 있다. 이 둘은 일찍부터 터를 잡고 초기자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임대료가 오르자 두 가게 모두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에 꿈쩍 않고 커피 잘 팔고 있는 거 보면 아마 건물을 통째로 산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수많은 카페무덤 속에서 단단히 고개를 들고 살아남은 가게들이다.


몇 년 전, 삼청동 거리에서 인력거 끌고 다니는 청년들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삼청동은 이제 생활, 생업, 관광이 얽히고설켜 별의별 사례를 만들어내는 실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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