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와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다. 참... 가보긴 했다만 벚꽃을 보러 간 건지, 좀비 행렬에 끼러 간 건지, 벚꽃만큼 많은 가판의 음식들을 먹으러 간 건지 도무지 구분이 안되어 ‘사람으로서 갈 곳은 좀 못 되는 것 같다’고 종종 털어놓는다.
벚꽃 하면 사실 경복궁 옆 정독도서관이다. 한가로이 뜰에 앉아 벚꽃이 바람 따라 수수수 흩날리는 장면을 만끽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지금은 ‘모두의 도서관’이 되어 나 살던 시절과 다르게 적지 않은 인파가 찾아오기는 하다만, 일단 도서관 하면 대부분 ‘정숙’을 떠올리기 때문에 관광인들은 대개 입구에서 기웃대다 지나치기 일쑤다.
책 한 권 들고 가서 정독하기엔 너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곳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이 곳 나이가 여든이 넘는다. 정원에는 굵직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사이사이에 벤치가 줄지어 있어 연애의 정령이 커플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봄이면 하늘하늘 머리 위로 내려앉는 하얀 꽃들이 온 주위에 가득하고,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뛰놀고, 물레방아 힘차게 돌아가고, 그 옆 원두막은 ‘수박 드시오’ 써 두어야 할 만큼 정겹다. 이런 곳에서 공부라니. 도서관이 잘못한 거다.
경복고 학생이라면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우리 학교랑 상당히 구조가 비슷한데?’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원래 경기고 자리였다. 우리나라 원조 3대 명문고 하면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였다. 서쪽 동네에 경복고가 있다면, 동쪽 동네에는 경기고가 있었다. 길게 뻗은 언덕진 진입로를 오르자면 그 옛날 ‘학생의 헌병’ 선도부와 몽둥이를 든 교사들이 진을 치고 등굣길의 아이들을 검문했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경복고를 다녔으니까.
경기고가 1977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강북 일대 학군이 요동쳤다. 그 여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곧장 도서관 간판을 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 의도와는 다르게 도서관은 청춘남녀의 공식적인 교류의 장으로 기능했다. 주변의 중앙고, 덕성여중/고, 대동상고, 풍문여고, 경복고 학생들이 얼쑤 하고 모여들었다.
여성전용, 남성 전용 학습실을 구분해놓은 들 별 의미가 없었다. 다들 책 펼치고 30분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교재만 남겨놓고 드넓은 정원으로 나가 놀았다. 농구장도 있어서 남학생들은 땀과 열정을 슬램덩크에 바쳤다.
학생들 굶지 말라고 매점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실로 매점을 가장한 식당이었다. 거기 우동이 참 면발도 탱글탱글하고 국물 맛도 MSG 팍팍 첨가에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래 푹 쉬다 가렴’ 하는 분위기로다가 식사메뉴도 다양하고 간식도 없는 게 없었다. 화장실도 많고 넓어서 심지어 노숙자 아저씨들도 여기 와서 씻고 가곤 했다.
학생복지에 이만한 도서관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정독도서관은 국민이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중 가장 큰 메리트는 자료였다.
대출실의 서적량과 그 질의 수준은 공립 중에서 톱클래스였다. 거의 없는 자료가 없었다. 사서들도 베테랑이었다. 찾는 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서고까지 탈탈 뒤져서 가져다줬다. 소요시간까지 알려줬다. 자료실에는 간행물이 실시간으로 들어왔다. 국회도서관 연결 시스템까지 있어서 컴퓨터에서 논문자료까지 유료 이용이 가능했다. 굳이 강남까지 내려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이곳에서 정말 공부한 건 대학원 시절이었다. 하루에 10시간이고 앉아 자료만 쭉쭉 뽑아 이 펜 저 펜 끄적끄적 그려 나가며 생각의 조각을 맞춰 나갔다. 여기서 난 논문 수상작, 등재지만 여덟 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