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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Oct 16. 2019

고양이의 99번째 이력서

혼술 아니라 자작이라고.

8년 전, 서울



열한 시쯤 되었으려나.


급 졸음이 쏟아져 이제 막 단잠에 든 참이었는데 갑자기 폰이 ‘붕붕붕’하고 울린다. 실눈 뜨고 보니 친구 놈이다. 아... 이 놈 특성상 십중팔구 술 마시러 나오라 할 것은 뻔한 것. 그리고 지금 딱 요 시간대에 전화를 걸었다는 건 어디서 이미 한 잔 시원하게 걸치고 신이 난 상태임이 분명하다.

‘으으... 하필 또 지금 깨우고 지랄이냐...ㅠㅠ... 아... 꺼두고 잘 걸ㅜ’


급격한 후회감이 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거절을 누른다. 허, 자식 봐라. 또 건다. 또 안 받았다. 다시 또 건다. 안 받았다. 이게 벌써 한 3, 4년 되었나 보다... 어느새부터인가 이놈과 나는 이런 ‘전화걸기&거절하기’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놈도 꽤나 더러운 오기가 있다. 받을 때까지 건다. 역시 또 ‘붕붕붕’이다. 에이 젠장, 어차피 잠 깼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터치.

“여보세요.”
샤발 연예인이냐. 전화 전나게 처안받네.”
“잠 좀 자자 샤발탱아. 넌 어디서 또 술 처먹었냐?”
“알 꺼 없잖아.”
“알 꺼 없으면 끊어 븅신아.”
“니네 집 앞이야. 나와.”
“아니 또 왜 우리 집 앞엔 와서 자는 사람을 나오래냐! 난 내일 어떡하라고!
“그냥 죽어 내일. 나랑 마시고 오늘 죽던지.”
“뭔 일 있냐?”
“일단 나와 임마.”
“기다려. 세수만이라도 하고 나갈 테니까.”

날씨가 제법 쓸쓸하다. 츄리닝 바지에 후드 하나 걸치고 큰 길가로 나오니 저 지하철 출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빠는 인간 하나 보인다. 뭐에 신이 났는지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막 쿵쿵 뛰고 혼자 염병을 한다. 날씨도 거지 같고, 기분도 거지 같다.

“소주 좀 빠셨구만. 누구랑 마셨냐?”
“누구랑 먹긴. 혼자 마셨지.”
“예예, 아주 잘하셨습니다. 이젠 혼자서도 잘해요”
“응, 나 혼자서도 술 잘 마셔요~~”
“어디서 애교야 삽질아.”
“야, 치킨 먹자. 배고프다.”
“밥은 먹고 다니냐?”
“밥...? 뭐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래. 가자. 치킨을 먹든 뭘 먹든 먹자.”

지천에 널린 게 치킨호프라 어딜 갈까 두리번거리는데, 저 앞에 무슨 고인돌에 나올 것 같은 희한한 바위 모양 인테리어의 치킨호프집이 보인다.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님도 별로 없고, 조명은 어두운데 시뻘건 느낌도 나고 해서 우중충한 맛이 아주 지금의 마음 상태와 딱 맞아떨어진다. 나쁘지 않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 마셨어?”
“아~~ 나 맨날 가는데 있잖아. 종로 공평빌딩 옆에 포장마차 거기. 이모, 여기 참이슬 클래쉭으로 시원한 거루요!
“하여튼 마차는 우라지게도 가요.”
가면 서비스 완전 많이 주지. 그건 그렇고... 오늘 자축 기념도 좀 할 겸 같이 술이나 한잔 할라고 불렀다.”
“뭘 기념하실라고? 아 이 새끼 또 자작하네.”




주인이 소주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혼자 흔들어대더니 뚝 다서는 지 혼자 따라 마신다. 그런데 참 이 놈은 술을 맛있게 먹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술을 넘기는 소리가 좋다고 해야 맞겠다. “꾸울꺽”하는 큰 목젖 소리와 함께 “크우~”하고 소리를 내지르면 생각 없던 상대방도 술이 울컥 밀려온다. 한잔 받아 마시고 있으니 밑반찬으로 과자랑 김치가 나온다. 환상의 조합. 헛웃음만 난다. 치킨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고... 둘이 김치만 집어먹는다.

“야, 너 이력서 써 봤지?”
“맨날 하는 짓이 그 짓인데 뭘 물어보냐?”
“내가 오늘 몇 번째 이력서 낸 줄 아냐?”
“몇 번 짼데?”

대답을 미루고 또 한잔 스스로 따라 마신다.

“천천히 마셔 새끼야. 누가 너 안 쫓아와.”
“내가 내 컴 들어가서 다 세 봤거든? 오늘이 99번째더라구.”
“야. 그거 멋있다. 무슨 여우가 아흔아홉 번째 인간 잡아먹고 하나만 더 잡아먹으면 승천하는 거 뭐 그런 거 같은데?”
“하여튼, 지 전공 아니랄까 봐 지 같은 소리만 한다.”
“그래서 어디 면접 보러 오라는데 있어?”
“그랬으면 내가 거기 갔겠지 널 불렀겠냐?”
“........ 그래 마셔라. 먹구 승천해라.”
“우리 99번째 기념으로 빠져 죽을까?”
“어디 가서 죽을래? 참고로 난 안 죽는다.”
“가까운데 있잖아~청계천!”
개울에 누우면 참 잘도 빠져 죽겠다. 아니다. 비둘기가 와서 죽은 놈인 줄 알고 떼로 몰려와서 뜯어먹을 수도 있겠다. 지금 가서 누워.”
“그럴까? 하하하.”

노래 제목 마냥 이 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입술을 삐쭉삐쭉 대고, 천장을 쳐다보기도 하고 턱수염은 텁텁하게 자라 덥수룩한 꼴이 정말 말이 아니다. 그러더니 이내 땅이 꺼지도록 고개를 숙인다. 가만히 턱을 괴기도 하고, ‘스윽스윽’ 라이터 불을 테이블에 자꾸 그어대기도 한다. 담배는 피우지도 않으면서.

“너 테이블 값도 내고 갈래?”
“야.”
“왜?”
“이력서가 뭐냐?”
“뭔 뜬금없이 이력서가 뭐냐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되냐?”
“그니깐 이력서가 뭐냐고?”
“이력서는 ‘나 이런 사람이다’ 하고 자랑 질 좀 하는 거 아냐? 그짓말도 좀 쳐 가면서.”
“아 이 새끼 뭘 좀 아네. 한잔 먹자.”

‘짠’하고 부딪히니 뜨끈한 후라이드 치킨이 나왔다. 밤늦게 나와 별로 땡기진 않았지만 빈 속의 술도 싫어서 다리 하나 잡고 우걱우걱 뜯어먹었다. 그런데 맛이 썩 없다. 맛도 없으니 닭도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 집 다신 오면 안 되겠다고 다짐한다.

“아는 놈이 왜 묻고 그래?”
“그냥... 아... 요즘 내가 왜 전공을 철학을 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한다.”
“허허, 슈퍼 O대 엘리트 대철학자님께서 웬 신세타령이쇼?"
“그래서 더 괴로운 거 같아.”
“왜? 이력서도 철학적으로 보이냐?”
“오케이! 바로 그거지 하하하. 그럼 안 되는데. 이력서는 그냥 이력서고 나는 그냥 난데 말야. 근데 말야. 신기해. 이력서를 이것저것 쓰다 보면 그 회사에 내가 맞춰줘야 하잖아. 아는 척도 좀 해야 되고. 그렇잖아? 그런데 그 맞춤형 이력서를 쓰다보면 있잖아. 어느새 내가 수십 가지의 인간으로 변신을 하는 거야. 아, 그래. 처음엔 변신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게 한 육십 개 칠십 개가 넘어가니까 이건 변신이 아니고 분열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킵 고잉.”
“내가 만약에 고양이라고 하자. 그런데 A회사에서 범을 뽑는다 치면 나는 억지로 범이라고 구라를 치는 거지.”
“구라 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안 배웠냐?”
“개소리 말고 들어봐. 여기선 범을 뽑고, 저기선 독수리를 뽑고, 다른 곳에선 사자를 뽑아. 어! 저기선 악어를 뽑네? 근데 난 고양이란 말야. 태생이 고양이인거야. 그럼 나는 말 그대로 종이 짝에 범이고, 독수리고 크레파스로 쓱싹쓱싹 그려서 얼굴에 갖다 붙이고 그럴듯하게 분장도 해서 이력서라는 틀 안에 싹 맞춰서 응시원서에 끼워 넣는다는 거지. 처음엔 썩 나쁘진 않았어. 내가 글발이 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내가 색깔을 임시방편식으로다가 바꾼다라는 그런 생각보다는, 그나마 고양이였던 나마저도 서서히 없어지는 거야. 너도 인문학해서 알잖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왜 고양이도 없어지지?”
“이치는 간단하지. 두 가지야. 먹이사슬의 최정상에 있는 육식동물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해도 해도 안되니까 그 바로 아래애들 있잖아. 하이에나라든지 까마귀라든지 걔네들 말야. 왕급 클래스 애들이 먹은 거 기웃대고 있다가 걔내들 다 먹고 떠나면 2차로 투입해서 남은 고기 뜯어먹는 애들, 딱 고 스펙 느낌으로 바꿔 보는 거지. 그래, 요 정도면 나도 먹히지 않을까? 그래, 고양이도 그런 애들이잖아. 아니지, 살쾡이라고 해야 맞나? 암튼 우리가 다 먹고 버린 쓰레기봉투 뜯어서 뭐 먹을 거 있나 킁킁대고 하잖아.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말야. 일단 한잔 먹고.”
“아주 이젠 자작이 생활이구나.”
“냅둬~먹다 뒤지게. 하여튼 중요한 건 나는 지금 그 고양이 취급마저도 못 받는 거야. 너 까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난 너보다 연구 실적이 더 많아. 넌 영어 안되지? 난 영어 점수도 높아. 그나마 외국서 좀 살았다고 대충 이빨로 까불어 댈 수도 있어. 근데도 안돼. 고양이 수준으로도 취급 못 받는 거야. 왜인 줄 알아? 나 같은 놈들이 지천에 널렸거든. 그리고 난 인문학 전공자야. 갈 데가 영업밖에 없어. 그런데 그 영업도 뭐 인턴? 지랄들 하고 있네. 작년에 그거 6개월 하고 끝. 없어. 디 앤드. 오케이?
“그래서, 난 과연 고양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뭐 이런 회의감이 든다 이거지?”
“그렇지. 난 그냥 고양이도 아니고, 생쥐도 아니고, 뭐 방아깨비 정도라고 하면 맞나? ㅋㅋㅋㅋㅋ.”
“옛날에 방아깨비 진짜 많이 잡았었는데, 요즘은 방아깨비도 없다.”
“그래. 다 제쳐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고양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있기야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말야. 그나마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마저 이젠 갈기갈기 찢어진 거야. 이 뭣 같은 99번째 이력서의 과정을 거치면서 말이지. 이젠 변신이 아냐. 분열이야. 분열된 이 상태에서 온전한 고양이였던 나마저 의심스러워지는 거지. 너 그거 아냐? 미국 유명 영화배우들은 한 작품 끝나면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약 반년을 정신치료를 받는대. 그게 정석이라고 하더라. 나도 영화를 꽤 많이 찍었지. 면접도 연기잖아 안 그래? 그리고는 치료는 받지 않았지. 히스레저도 그래서 죽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 철학이 니 발목을 제대로 잡고 있구나. 내가 얘기 하나 해줄까? 우린 크게 두 가지 포인트를 간과하는 실수를 했어. 첫째, 대한민국은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2만 불? 선진국? 멀었어. 당장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공자왈 소크라테스왈이고 지랄이야. 알게 뭐야? 뭐 헤겔? 따귀 맞아 ㅋㅋㅋㅋㅋ. 둘째, 공부를 열심히 하면 돈도 따라올 것이다. 너도 수도 없이 봐서 알지? 공부 열심히 안 한 사람이 취직 더 잘해. 아니. 아예 공부 안 하고 장사하는 애들이 더 잘 나가. 어깨 쫙쫙 피고 다녀 걔네들은. 왜? 돈이 있으니까. 우리는 왜 쫄고 있냐? 돈이 없으니까. 우린 그냥 학문적인 만족만 하고 산거야.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자위행위와도 같지.”
“어디 좋은 데 알아?”
“그럴 돈 있으면 보약이나 쳐 지어먹어라 새끼야. 얼굴은 그지 꼴을 해 가지고... 근데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그렇게 죽을상은 하지마. 니 말대로 넌 그냥 고양이야. 니가 도저히 변신이고 분열이고 못해먹겠다 싶으면 그냥 더 고양이다워지는 방법을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 아예 고양이 인간이 돼버려. 그럼 나중에 널 진짜 고양이로서 인정해 줄 사람들의 군이 분명히 만들어질 테니까. 그때를 기다려. 지금 변신하고 분열해서 근근이 버티는 그 애들도 분명히 죽어나고 있어. 주위에서 꺼내 달라고 외치는 애들이 태반이야. 왜?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까. 돈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핑계를 만들어서 거대한 거짓말 성을 쌓고 있는 거야 걔네들도.”

이 놈 한참 떠들어대더니 한 동안 말없이 계속 술만 따라 마시고 있다. 이젠 안주도 안 먹고 그냥 연거푸 따라 마시고 있다. 벌써 시계는 열두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내일 아침의 피곤도 슬슬 걱정된다. 이 놈 몸 걱정도 된다.

“야, 치킨 남았어. 같이 먹어. 속 버린다.”
“그래서 나는 하나 결심한 게 있어.”
“뭔데?”
“자작을 해야겠다 이거지.”
“참 좋은 결심입니다. 염병을 하세요.”
“그거 아냐? 내가 유일하게 나라고 인식할 수 있는 때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작할 때, 딱 그때더라고. 이젠 누가 따라주는 술도 싫어. 술은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술 아니냐? 내가 좋아서 먹는 술, 내가 스스로 먹는다. 완전 좋은 뜻이 담겨 있는 거라구! 다분히 자기주도적이라고나 할까?”
“말은 서커스다. 야, 그만 마시고 가자.”
“요거 몇 잔 안 남았다. 다 마시고 가자.”

호프집에서 나오니 이제 막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까보다 날씨가 더 추워진 것 같다. 어쩌면 날씨가 아니라 마음이 추워진 것일 수도 있겠지.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일상의 그놈으로 돌아와 이 농담 저 농담 까불어대고 있다. 어제 소개팅을 했는데 여자애가 말투가 영 재수가 없었다는 둥, 아침에 엄마랑 대판 싸우고 나와서 들어가기 싫다는 둥 별소리를 다 지껄여댄다. 택시가 오니 바로 뒷 자석에 쏙 들어가 앉아버린다. 가면서 한 소리 한다.

“야, 너도 심심하면 집에서 혼자 자작해라.”
“지랄 말어. 나 당분간 술 끊는다. 술 먹자고 부르지 마. 가 임마.”
“전화할게! 쉬어!”

택시타고 가는 폼이 아주 누워서 가는 꼴이다. 그래. 이력서가 이 고양이를 해치고 있었구나. 이 철학도의 꿈을 분열시켜버렸구나. 나쁜 이력서구나. 그래도 말이다. 큰 걱정은 없다.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실 때 유일하게 자신이 고양이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직 녀석에겐 치고 나갈 힘이 있다고 느껴진다. 자신을 놓지 않았다. 스스로 술을 마실 수 있다.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력서가 아니라 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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