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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Nov 16. 2019

프레지던트호텔에서 나를 구경하다.

잠 이루지 못한 숱한 밤에 대하여

뭘 그렇게 밖을 보고 있어?


침대에 편안게 누워 앉아 티비를 보던 아내가 물었다. 나는 창가에 붙어 서서 차디찬 맥주캔을 움켜 채 답했다.


"그냥. 구경하는 거야."

"밖에 뭐 해?"

"여기저기서 집회하네."

"재밌어?"

"아니. 그거 말고도 볼 게 많아서."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그림자까지 축 쳐진 다크서클을 어깨에 짊어지고, 캐리어 하나씩을 질질 끌고서는 서울시청역을 건너 호텔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아내가 지쳐 잠든 사이, 나는 편의점에 가서 커피와 맥주,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 들고 왔다.



창가의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밖을 내다보니 흡사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신 서울시청사가 당장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는 없애자 남기자 수년간 옥신각신하여 몸뚱이의 일부만 살아남은 구 서울시청사가 찰싹 몸을 맞대고 있다. 잔디밭에는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음악에 맞춰 '투쟁'을 외친다.


고층 건물 숲 가운데 들어앉은 덕수궁의 자태가 한결 곱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노을 속에 반짝거리는 석조전의 모습이 더욱 격조 있게 느껴진다. 촤악하고 캔을 깐다. 시원한 폭포수가 골짜기로 흘러내려가 잔잔히  속을 적신다.



인왕산의 능선이며 파란 청와대의 지붕이며, 그래 다 내가 눕고, 먹고, 입고, 떠들던 장소 하나하나가 훤하게 다 보인다.


그래. 이렇게 꿈 하나를 이루었다.

스물여덟 살의 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 그날따라 유독 이빨 곳곳 다 쑤시길래 평생 가보지도 않은 치과를 갔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빨 여기저기가 다 썩어 손 볼 곳이 너무 많다, 심지어 이빨 하나는 부분적으로 인공치아까지 해야 한다고 했다.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엄청난 견적이 나왔다. 나는 그동안 벌어 아껴둔 돈을 치과에 모조리 다 갖다 부었다.


생전 이빨로 고생해 본 적도 없는 내가 왜 이렇게 됐지?


그런데 치과치료를 마친 이후에도 여전히 왼쪽  송곳니 아래위가 여전히 쿡쿡 쑤셨다. 혀로 좌우를 비교해보니 왼쪽 부분이 깨져 없어진 것 같다. 의사는 갈 때마다 의아해하면서 얼음 많이 깨물어 먹느냐, 오징어 자주 씹냐, 딱딱한 걸 주로 먹느냐 물었다. 난 절레절레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켜본 의사는 결론을 냈다.


"아침에 깨면 이 안 아프세요?"

"음... 잘 의식 못하겠는데요?"

"엄청 아플 것 같은데... 악관절이라고 들어봤어요?"

"아뇨?"


의사는 내가 잘 때 이를 악 물고 자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했다. 엄청난 악력으로 이빨 끝이 마모되어 떨어져 나가고 그 사이로 충치가 들어오는 것 같다고.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물으니 마우스가드를 하면 되지만 가격이 비싸고 어차피 계속 이 습관이 유지되는 한 금방 구멍이 뚫려 또 교체해야 해서 별 실효성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조언을 했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네요. 이건 물리적으로 치료해서는 한계가 있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명상이라던가 아니면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아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시간 될 때 가보세요."


정신과? 막 사람 묶고 주사 놓는 곳?


에이 이빨로 그 정도까진 아니지 하면서 나는 사실상 아무 조치도 안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 급격히 나빠졌다. 왼쪽 송곳니만 아픈 게 아니라 맞물린 턱 신경, 위로는 뺨을 타고 관자놀이를 거쳐 머릿속을 파고들고, 아래로는 목의 힘줄을 타고 흉부 근처까지 고통이 미쳤다. 잠이 줄었다. 잠의 질도 같이 떨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물어보기도 싫고 해서 다짜고짜 종로 길에 보이는 아무 정신과나 들어갔다. 뭐 정신과나 내과나 비슷비슷하구나. 그래도 진료는 원장님이지 싶어 좀 기다려 들어갔더니 풍채 좋은 중년의 남성분이 지긋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반다.  내 상태를 말해주자 종이에 뭐라고 쓱싹쓱싹 적어 나아간다. 그리고 가지런히 손깍지를 해서는 나를 응시한다.


"근육이완제라는 걸 처방해 줄 거예요. 일종의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약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빨 주변의 근육만 제어하는 그런 약은 없어요. 자기 전에 드세요. 일주일 드셔 보시고 느낌이 어떤지 말해주세요."


의사는 가급적 매주 같은 요일에 찾아오라고 했다. 그는 여러 가지를 물었다. 회사 일이 어떻고, 밥을 무엇을 먹고, 술 담배는 하는지, 무엇이 제일 스트레스를 주게 하는지, 매우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묻고 기록했다. 그러던 중,


"방을 두 분이서 쓰신다고요?"


"네. 아버지랑요. 저희 집은 방이 두 개라서요."

"아버지는 편히 주무세요?"

"제가 자꾸 깨워요. 계속 이를 부드득부드득 가세요. 새벽에 몇 번이고 흔들어 깨워요."

"그랬군요..."

"전 살면서 한 번도 제 방이 없었어요."


뭔가를 한참 끄적끄적하더니,


"이가 아픈 이유가 있네요. 그 좁은 방에서 두 분이 맞대고 그렇게 잔다... 일은 주말까지 쉬지 않고 한다... 이 상황을 당장 바꿀 수는 없겠죠?"

"그렇죠. 적어도 당분간은..."

"그럼 여분의 돈이 생기면 말이죠. 넓은 공간에서 혼자 하루를 온전히 지내본다고 칩시다. 어디서 묵고 싶어요?"

"음... 호텔이요?"

"호텔이면 어디 생각하는 호텔 있어요?"

"플라자호텔, 조선호텔, 프레지던트호텔, 코리아나호텔 이런데요."

"왜 거기 가고 싶어요?"

"옛날부터 그런 생각은 했어요. 나중에 자리를 잡으면 월드컵 경기 열릴 때 호텔 로열층의 방 잡고 맥주 마시면서 혼자서 창밖으로 보이는 전광판으로 경기 보면서 응원객도 보고 싶고.."


의사는 꼭 그런 곳이 아니어도 좋으니 한 달에 한번쯤은 넓은 공간이 트인 곳에서 쉬어보면 도움이 될 거라 일러주었다. 이후로 나는 비싼 호텔은 아니더라도 실속 있는 가격의 사대문 일대의 호텔에서 티비, 신문, 독서를 누리며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한적한 시골마을의 사랑채에 머물며 동네 산에 올라 먼 치 논밭을 지그시 바라보거나, 담장 따라 빙글빙글 마을 전체를 기웃거렸다. 그날그날의 시간을 널찍하고 크게 크게 비워냈다. 얻는 바가 있었다.


그동안 너무 깊숙하게 살았구나.


상태가 호전될수록 의사는 약의 세기를 줄여 나갔다. 악관절 증세는 이미 지병에 가까워져 완전히 없애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냈다.


가끔은 숲에서 빠져나와 숲을 보는 것.



서울시청 옆 프레지던트 호텔. 리스본으로 떠나기 전 묵을 하루의 장소는 내가 정했다. 그동안 아끼고 아껴두고 있었던, 내가 살던 고향을 차분히 둘러볼 수 있는 최적화된 뷰의 장소로. 주가 아닌 객의 객으로서 세상을 보는 그 자리로.


서른세살, 3년 간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
 나의 책이 출판되었다. 나는 그 책을 의사 선생님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서른다섯, 나는 프레지던트 호텔의 한 객실에서 포르투갈의 여행을 꿈꾸며 넓은 침대에 퍼져 침 흘리며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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