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부산은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기장군까지 들어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출장 업무를 마치고 기차 좌석에 너덜너덜해진 몸을 걸쳐 두니 곧 진동이 울렸다.
여자 친구다.복도로 나갔다.
"어. 일끝났어?" "아니. 하는 중이야." "ㅇㅇ 난 끝나서 이제 복귀 중이야. 벌써 밤이네."
순간 맴도는 침묵. 연결복도가 덜컹덜컹 댄다.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공기가 뺨을 때린다.
"나 할 말 있어."
다시 퍼지는 침묵.
"뭔데? 지금 말하면 되지." "아니.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어."
만나서 얘기하는 건 하나뿐. 죽느냐 사느냐.
"헤어지자는 얘기하려는 거야?" "만나서 얘기하자." "그 얘기 맞잖아." "시간이 필요해." "얼마나?" "만나서 얘기해." "만나면 뭐가 달라져? 결정하고 나한테 통보하는 거잖아." "그럼 만나지 말고 여기서 끝낼까?"
세 번째 침묵.
"그래. 언제 볼까?" "일요일에 보자." "알았어."
다음날 저녁, 나는 대전 롯데백화점에 가서 코트를 샀다. 이건 내 오랜 관행이었다. 오래전 한 여자 친구의 헤어짐 통보 자리에서 난 그때도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쇼핑을 하고 내 옷을 샀다.
그 친구는 내게 물었다. 왜 느닷없이 옷을 사냐고.
나는 대답했다.
"옷을 입고 싶어서. 그냥. 그 이야기를 들으니 옷이 사고 싶어 졌어. 별다른 이유는 없어."
종로 인사동 앞 커피빈.
결전의 시간.
나는 10분 늦게 갔다. 커피를 시켰다. 여자 친구는 한 달 정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자 친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몰차게 한 마디 건넸다.
"그래. 넌 한 번 결정하면 이미 끝난 거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적어도 나는 아주 좋은 환경으로 들어왔어. 너는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결혼을 생각하고 너를 만났어. 그런데 내가 대전으로 가고 나서 넌 딱 한번 내려왔어. 딱 한번. 다른 누가 생겼다느니 그런 건 물어봐야 의미도 없겠지. 우리가 5년을 만났던 50년을 만났던... 영화처럼 너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 나는 선택을 했고, 니 선택만 남았어. 결정되면 얘기해줘. 나 먼저 나갈게."
만약 내가 거기서 울고 불고 매달렸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난 같은 결과였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 친구는 한번 결심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도 거기서 이미 끝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각지 못한 상대의 대응에 조금이나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대차게 먼저 문을 열고 나왔던 것이다.
역시. 결과는 같았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지질해졌다. 받지 않는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남기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울었다. 통곡했다. 밤은 새까만 암흑이었고, 블랙홀이었다. 우주의 강력한 자성에 빨려 들어가 휘휘 바닥으로 치닫다가 순식간에 천장에 부딪혀서는 마지못해 정신을 차리고 빵 한 조각 베어 물고 애써 정복 차림으로 회사 의자에 앉아 서류더미를 움켜쥐었다.
[두문불출], 2013. 3. 7. / 백약
늘 퇴근 시간은 기본 밤 10시를 넘겼다. 주말도 없이 일만 했다. 일을 했고, 해야만 했다. 허나 그것만으로 태양계만 한 심장을 사방으로 후벼 파는 고통이 절대 제어되지 않았다.
어둑어둑 가로등 불에 의지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안주와 함께 소주 2병을 샀다. 깨끗하게 샤워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는 딱 한 곡. 그것만 반복해서 들었다. 매일
칼 뵘이 지휘하는 모차르트 진혼곡 레퀴엠.
실제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 완성한 부분은 4악장까지로 알려져 있다. 부르는 그들과 같이 애도했다. 죽은 나의 과거. 이 세상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의 사랑을. 그렇게 두 달을 침잠했다. 그렇게 소주 탑을 세웠다.
그녀는 대전으로 내려오길 거부했다. 말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충분히 전공 살려 살 수 있다. 내가 자리를 잡았으니 하물며 취미로라도 할 수 있다.' 이야기하면 혹 하다가도 항상 끝은 가벼운 웃음으로 마무리했던 그녀였다. 위험하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