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이나마 간박한 책장을 하나 사서 거실과 부엌 사이를 나누었다. 반짝반짝 불빛이 일렁이고, 클래식 FM에서는 브람스 소나타 3번이 흘러나온다. 아내가 전신 안마를 해주었다. 몸에 피가 돈다. 잠이 온다.
간밤에 쌓아둔 책 더미를 밀어내고 아내가 커피 한잔 내준다. 오늘의 커피는 에티오피아 모모라 내추럴. "감사합니다" 하고 옆으로 몸을 뉘어 조르륵 커피를 따라 한 모금 퍼뜨린다. 고소한 향이 금세 온 방을 감싼다. 아내는 아침부터 양갱을 만든다며 급하게 부엌으로 갔다.
말러 피아노 사중주를 틀어놨구나. 어제 본 셔터 아일랜드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온 곡이다.
문득 '말러 커피'로 검색했더니 '뤼케르트 시에 의한 5개의 가곡'이 나온다. '이 세상은 나를 잊었네'라는 곡을 반복해서 들어본다. 병으로 수많은 자식을 잃은 말러가 슬픔에 젖어 쓴 곡이라고 하는데, 결국 그는 자기 통찰로 궁극적인 안식을 얻는 것으로 갈피를 잡은 모양이다.
촛불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툭툭 넘어가는 시곗바늘 소리만 울린다. 둘이서 멍하니 불을 바라보며 홍차나 한잔 마신다. 노래를 흥얼대며 샤워를 마치고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는다. 체중계를 재보고 실망하다가도 곧 까먹고 굴러다닌다. 설거지도 해보고 방도 닦는다. 이 책 저 책 다 집어 들고 읽고 싶은 부분만 펴본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면 재미가 없다. 놀고먹는 것에 보다 힘써야 한다.
유독 바쁜 해이다. 너무 바쁘다. 둘 다 바쁘다. 늘 피곤에 절어 있어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쉽지 않다.
오늘 같은 휴일은 아주 귀중하다. 물리적으로 휴식의 양을 늘릴 수 없다면 질을 높일 수는 있다.
제습기를 물청소 후에 볕 드는 베란다에 두면 아주 뽀득뽀득 깔끔하게 말라 있다. 검댕 자국이 잘 지워지지 않거나 해도 별 문제없다. 가장 쾌적하다. 양치, 세면도구도 빨래건조대 옆에 두었다. 동네 카페에 나와 선풍기와 초여름 공기를 마신다. 아무 책이나 집어 읽는다.
석양이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어스름이 물러날 때까지 풀벌레 소리는 줄기차기만 하다. 잎새 마디마디에 서로가 엉겨 앉아 부르는 합창은 간절한 주문과도 같다. 밤의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고전적인 마법이다.
밤의 가스파르를 듣고 있자면 나는 여름 내음이 난다. 라벨은 여름밤의 선율에 비밀스러운 판타지가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가 가장 마음에 닿는다. 시작부에서부터 32박자의 이 자글자글대는 녀석들의 왁자지껄함을 또렷하게 그려낸다. 겨울에 들어도 이 놈들이 살아 돌아올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한 인류학자를 불쌍히 여긴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들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