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약 Dec 17. 2019

대전에서 부다페스트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대전 예술의전당에 울려 퍼진 ‘기다리는 마음’



2015년의 겨울


도심 중앙을 가르는 어둑어둑한 전차길 소리. 오후 4시 즈음이면 서서히 꺼지기 시작하는 하늘. 일찍부터 밤을 맞이하는 거리. 고요함을 잃지 않는 카톨릭의 도시. 공무를 마친 후 찬찬히 이곳 사람들을 둘러본다. 치열하지 않은 빛의 누림. 12월의 부다페스트.



차분함, 성스러움, 예술성


이 세 가지 키워드로 나는 부다페스트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로 도배된, 온갖 치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뒤로 한 채 크리스마스를 팔기 위해 정신없이 돌아가는 오락도시의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돈에 찌든 냄새가 없어 좋았다.

 


도심 전체를 빼곡하게 수놓은 오랜 성당 사이사이를 오고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무뚝뚝했다.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입는 것에 탐닉하지 않았다. 그저 하는 것이라곤 거리마다 밝은 빛으로 트리와 눈종을 만들고, 성자를 기리는 찬송가를 부는 것뿐이었다. 도로 길 하나하나에 거룩함을 새겼다. 그들은 종교 이상으로 깊었다.



검은 머리, 갈색 눈, 작고 아담한 키를 가진 이들.


유럽의 국가 중 자신들의 시원이 아시아에 있다고 믿는 나라가 바로 헝가리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자신들에게 전해져 온 민속 문화의 연구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헝가리인은 샤머니즘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여러 색채의 종교가 역사 위를 붓칠 하기 이전의 시기, 민족의 머릿속에 아로 새겨진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했던 고대의 주재자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 머나먼 동아시아 대륙의 끝 한국에까지 눈길을 뻗었다. 2015년 겨울, 무속문화를 화두로 한 양국 간 문화교류의 실무회의가 부다페스트에서 열렸다.




헝가리 예술의 전당에는 크게 두 개의 홀이 있다. 하나는 헝가리 민속을 클래식으로 정립시킨 '바르토크 벨라'를 기리는 홀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전통문화의 교류를 위한 '페스티벌' 공연장이다. 우리로 따지면, 예술의전당과 국립국악원을 함께 묶어놓은 겪인데, 그만큼 그들은 예술에 있어 어떠한 터울도 장벽도 세우지 않는다. 공연장을 죽 둘러보니 ‘이것으로 저것을 발견하고, 저것으로 이것이 발전한다’는 일종의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부다페스트 스프링 페스티벌의 향연도 가볼 수만 있다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귀국했다.



 


2019년의 여름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조성진 초청공연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성진을 보러 갔다가 부다페스트 사람들에게 홀딱 빠져 돌아왔다.


*지휘자가 입장하는데 뒤에 통역사가 따라온다. 음? 뭐지? 하는데 곧 마이크를 받아들고 이야기를 꺼낸다.



이번 헝가리 참사에 대한 한국인의 고통을 깊게 통감하며, 수많은 헝가리인 역시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공연 시작에 앞서 고인과 그 유족,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곡을 준비했습니다. 한국의 가곡입니다. 박수는 삼가 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단원이 일어나 「기다리는 마음」을 한국어로 부른다. 단원들이 눈물을 닦아가며 발음도 채 힘든 우리 말을 꼭꼭 음미하듯 손으로 종이를 눌러가며 읊는다.


충격적이었다.


추도식에 초청받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주가 아닌 객으로서. 뭐든지 빨리빨리 한국사회에서 물밀듯이 쏟아지는 이슈에 저 만치 떠내려가던 도나우 강의 슬픈 영혼들을 이들이 열심히 길어 와서는 대전의 땅에서 씻김굿을 해주고 있었다.


이웃나라에조차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우리에게 이렇게 진정어린 노래로 포옹과 마음을 건네는 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헝가리를 대표하는 사절단처럼 그 책무를 다 하려는 듯 했다.


*바로 이어진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은 엄중하고 묵직했다. 깊고 넓은 기나긴 수평선에 일렁이는 파도를 불러와 좌중을 훑고 지나갔다.


*곡이 끝나자 조명이 어두워진다. 음? 단원들이 직접 일어나 피아노 들어올 공간을 만들고, 자신의 자리 단상을 옮기고 있다. 스태프는 피아노만 두고 나간다. 모든 자리 재배치는 오케스트라가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저러다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나 싶은데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



*독특한 악기 배치였다. 콘트라베이스 5개를 모두 중앙 맨 위로 올리고 그 앞에는 관악기, 첼로 순으로 가운데를 채워 양 옆을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차지했다. 밴드로 따지면 베이스를 중심에 두고 양 날개로 트윈기타가 활약하는 모양새다.


*저 위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묵직한 저음이 드라이아이스처럼 퍼져 나아가는 동안, 나머지 악기들이 제각각의 소리를 섬세하게 뿜어낸다. 규모가 작아도 한 덩어리처럼 움직이는 탓에 현악기들의 활 젓는 힘이 2층 무대 바닥까지 뻗어 올라와 발바닥을 친다.


*조성진 앵콜이 시작되자, 지휘자가 들어가다 말고 사이드에 남은 의자에 앉아 같이 구경하고 있다. 열화와 같은 앵콜 박수가 계속 이어지자 지휘자가 앉아서는 조성진 또 나오나 하고 계속 입장 문을 기웃기웃 바라본다. 독특한 할아버지다.


*나룻배를 저어 나아가듯 일제히 활을 깊고 천천히 가르고 나아간다.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은 매우 인상 깊었다. 음반이 있다면 사고 싶다.


*앵콜 박수가 연이어 쏟아지자 지휘자가 한국말로 "헝가뤼무굑" 크게 외치며 곡을 시작한다. 우리같으면 심벌즈 치고 쿵짝 쿵짝 할 텐데 관현악으로만 부드럽게 작품을 완성한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단원들이 90도로 인사한다. 그리고는 서로 잘했다고 얼싸안고 그 자리에서 잡담하고 기뻐한다. 부다페스트 어느 마을의 악기 장인들이 찾아온 것 같은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번아웃'으로부터의 탈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