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약 Nov 17. 2019

한 화가의 다림질

완성과 파괴에 대하여


외국에서 미술과 사진을 전공한 친구이다. 20년 간 예술에 전념하다가 그곳으로부터 나와 한국에 잠시 왔다. 지금은 붓을 놓고 커피업에 종사한다. 그를 어렵사리 만나 여러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TAKE 1


Gino Severini - Self Portrait(1909)


>친구 : 이 그림 참 좋다. 모르는 사람인데. 색상을 잘 읽어봐. 전체적으로 정교하면서도 억지스러운 게 없어.

<나 : 안경테 엣지. 110년 된 그림이네. '이래도 피우시겠습니까'에 얹으면 다 피울 것 같다.

>친구 : ㅋㅋㅋ. 안경 템플은 원래 없는 걸까. 아님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안 그린 걸까? 없어도 이상하진 않다. 안경이랑 코가 닿는 부분. 어두운 진한 녹색으로 처리했는데 조금 거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당히 자연스러워. 내가 볼 땐 저 그림의 핵심은 색감의 조화야. 어느 부분에서 어느 색깔이 쓰이는지 잘 봐봐.

<나 : 수염 자리, 뺨 자리, 그리고 이마.

>친구 : 다른 부분들도 봐봐. 기법과 색상이 다 의도적이야. 선들도 모두. 그런데 전혀 억지스럽지 않아.

>나 : 난 뒤 그림이 신경 쓰인다.

<친구 : 얼굴이 없지. 그냥 선으로 쓱싹쓱싹 했지.

>나 : 니 인형 사진, 그림 그거 생각난다.



#TAKE 2


친구, 무제, 연도미상
친구, 무제, 연도미상


>친구 : 난 이 두 개가 제일 마음에 들어.

<나 : 넌 왜 인형을 다루니?

>친구 :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마. 너가 그 인형이니까.

<나 : 첫 번째는 상처투성이 아이가 엄마? 아니면 그 이상의 근본을 찾으려 하는 것 같고... 두 번째는 그냥 파편적이야. 정가운데 비교적 정상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인형을 중심으로 제각각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고. 근데 왜 깼니?

>친구 : 원래 깨지는 거니까.

<나 : 그거야 알지. 그럼 깬 얼굴 조각은 왜 저렇게 뒀니?

>친구 : 나도 모르지 그건. 저건 저렇게 원래부터 있는 거야.

<나 : 알쏭달쏭하다. 할 말 다하는 사람, 눈 감고 모르는 척하는 사람, 할 말도 못 하는 사람, 한 눈으로 보기만 할 수 있는 사람, 그 마저도 보기 힘든 사람 뭐 이런 것 같다.


친구, 무제, 연도미상

<나 : 원리는 같구나.

>친구 : 원리 같은 건 없어.

<나 : 왜 꼭 깨져 있어야 하는 거니?

>친구 : 말했잖아. 원래부터 그런 거라고. 원래부터 그런 걸 왜 그렇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TAKE 3


친구, 무제, 연도미상

<나 : 좀 정상적인 작품은 없을까?

>친구 : 다 정상적인데?

<나 : 왜 거울을 깼니?

>친구 : 얼굴이 깨져서.

<나 : 그래서 손도 깨진 거야?

>친구 : 얼굴이 깨지면 앞을 볼 수 없지. 손이 깨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화장실 바닥에 거울 떨어뜨렸다가 주우려는데 생각나서 해 본거야.

<나 : 왜 웃고 있지?

>친구 :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그게 너니까. 맞고도 아픈 줄 모르고, 피 흘려도 아픈 줄 모르고.

<나 : 바보네.


친구, 무제, 연도미상


<나 : 와우 이건 진짜 쓰라릴 것 같은데?

>친구 : 아냐. 겉에만 살짝 벗겨져서 금방 아물었어.

<나 : 이것도 그냥 찍은 거지?

>친구 : 당연하지.

<나 : 옆 손가락은 안다쳤니?

>친구 : 어 가운데 손가락만.

<나 : 왜 저기만 그럴까?

>친구 : 모르지. 작업하다가 보니까 저렇게 되어 있더라고. 멀쩡한 것과 멀쩡하지 않은 것을 너무 구분하려고 하지마. 멀쩡한 거나 안멀쩡한거나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똑같아 지는거야.



#TAKE 4


친구, 무제, 연도미상


<나 : 이건 장풍 쏘는 건가?

>친구 : 응. 스팀기는 아니고...스팀 청소기라고 해야하나? 고장나서...어디 찌든 게 묻어있던가 그럴 때 약품 안 쓰고 스팀 쏴서 녹인 다음 닦을 때 썼는데...그건 마치 화염방사기 작동하듯이 나오더라. 다칠수도 있으니까 먼저 테스트해보고 나서 멀리서 친구 손에 그걸 쏘고.

<나 : 어떻게 저런 효과를 내지?

>친구 : 배경은 검은색으로 두고, 그리고 빛은 뒤에서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다만 손바닥에도 비치게. 빛이 뒤에서 나와야만 스팀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나거든.



#TAKE 5


<나 : 넌 다림질할 때 대충해 아니면 칼주름잡아?

>친구 : 대충은 안 해. 하지만 칼같이 주름잡지도 않아. 그리고 난 다리미 안 써. 스팀기만 써. 다리미 쓰면 옷 다 망가져.

<나 : 그래. 스팀기.

>친구 : 다리미는 열을 천에 직접 대는 거잖아. 스팀은 말 그대로 뜨거운 스팀으로 주름만 펴는 거고. 아주 빠듯하게 주름을 피려면 다리미로 해야 하지만 천에 따라 다미리는 많이 위험할 수 있어. 옷 가게를 가도 스팀기 쓰지 다리미는 안 쓴다. 세탁소 영업용 다리미도 스팀 강하게 해서 스윽하고 천을 지나가는 정도로만 가볍게 누르지. 그리고 스팀은 수분이니까 태워먹을 일도 없지. 그리고 다리미질하면 껌처럼 늘어날 수도 있어. 옷이 잘못 집히면 아주 크리스피하게 주름 잡혀 버리고. 신문지 같은 거 안 대면 빤지르르하게 눌린 자국 남기도하고.

<나 : 다림질은 그때그때 하니 아니면 한 번에 몰아서 하니?

>친구 : 다림질 아니라니까.

<나 : 그래. 스팀질 스팀질.

>친구 : 그때그때 해야지 당연히.

<나 : 아침에 하니 저녁에 하니?

>친구 : 미리 해둬 봤자 옷장에 다시 넣으면 시간 지나고 옷걸이에서도 옷이 늘어나고, 옷장 뒤질 때 또 구겨지니까 당연히 아침이지. 마음도 편하고.

<나 : 왜 편한데?

>친구 : 글쎄. 깔끔하니까. 손도 뭔가 싹 펴진 것 같고. 작업할 때도 아침에 손을 좀 풀고 나오니까 더 괜찮은 것들도 건질 수 있지.

<나 : 더 예민해질 것 같은데.

>친구 : 더 예민해지니까 좋은 거야.

<나 : 아...




매거진의 이전글 한 미용사의 독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