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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Nov 23. 2019

'남의 삶'을 먹고 사는 자의 책상

한 북에디터의 사진 한장


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20대 여성 에디터를 찾아갔다. 주로 회고록, 평전, 자서전 업무를 담당한다.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유명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검토하고, 보완하고, 수정한다. 그렇게 수백번의 피드백을 거쳐 하나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그녀의 책상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내 삶도 지키기 바쁜데, 남의 삶을 수많은 대중에게 선보인다는 건 정말 어려워요.


한 사람의 회고록을 정리한다고 하면 일단 수많은 절차를 거쳐야 해요. 우선 회고록, 평전, 자서전에 등장하는 주인공에 대해 다각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수행기관을 선정해야 해요. 저 혼자 이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긴 불가능하니까요. 기관과 수행기관은 각 주인공에 대해 쓰는 작가들을 뽑아요.



(작가는 어떻게 뽑나요?)


이게 쉽지 않아요. 주인공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고, 주인공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과 주변 환경까지 잘 알고 있는 전문가가 붙어야만 돼요. 그런데 그런 전문가 찾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일단 어떻게든 인력풀이 갖추어지고 나면 다같이 모여서 연간 사업 추진 계획을 짜요. 언제 주인공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것인가, 그 다음 원고로 가공하는 데드라인은 언제로 잡을 것인가, 원고에 대한 검토 그리고 최후의 윤문교열은 언제 마감할 것인가 이렇게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죠. 여기서 조금 더 파고들면 좀 재미있는 게 나옵니다.


(뭐가 재미있나요?)


우선 주인공이 생존해 있는 경우가 정말 정말 복잡해요. 그러면 그 인물에 대한 조사는 문헌 뿐만 아니라 인터뷰를 해야해요. 이게 아주 골 때리는 거에요. 문헌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 피조사자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문헌의 내용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와 버리는 거에요. 그럼 주인공의 기억만 놓고 기존의 내용을 엎을 것인지, 아니면 문헌과 주변 인물의 이야기까지 다 확인해서 적절한 수위의 결과를 내놓을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해요. 작가의 역량이 높은만큼 일의 손이 덜 갑니다. 반면에 작가가 시야가 좁으면 다같이 힘들어지는 거에요.


(이 검증을 어떻게 해요?)


일단 작가가 조사한 내용을 수행기관이 받아요. 여기서 1차로 정리를 해서 저한테 보내줘요. 그럼 저는 이 자료를 검토하면서 맥락상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라던지, 연도가 충돌된다던지, 앞에 했던 말과 뒤에 했던 말이 다르다던지 하는 점들을 체크해 나가요. 그 체크한 걸 다시 수행기관에 주면, 거기서 작가들한테 다시 뿌리죠. 그럼 작가들은 추후 인터뷰를 할 때 보완을 하던지 자료를 찾아서 고치던지 합니다. 그러니까 조사자가 조사한 내용을 또 다른 조사자가 조사하고, 그 조사한 내용을 저라는 조사자가 최종으로 조사해서 상사에게 최종 확인을 받는 일종의 조사사슬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하.


검토 중인 자료


(조사자가 조사해서 받은 내용을 조사하고, 그걸 또 조사해서 보고한다!? 4번이나 조사하네요?)


네. 그래서 중간에 내용전달이 명확하게 가는지를 체크하는 게 진짜 중요해요. 잘못하면 서로 오해하고 마음 상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저는 보통 한 편 당 최소 10번씩은 돌려봐요. 엄청 당 떨어지죠. 예민해지고...


인터뷰내용 검토용 이어폰
사용하는 펜의 종류

(펜을 다양하게 쓰네요? 설명 좀 해줄 수 있나요? 일단 연필부터.)


아 연필은...저는 연필을 쓰면서 정리를 해야 머릿 속에 잘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한 사람의 일대기를 나이숫자로 세로뱡향으로 해서 쭈욱 적고 나서 이 때 주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활동을 했고 중요한 것들을 정리해둬요.


(그럼 저 옆에 샤프는?)


아 샤프는 피드백 받은 자료에 좀 더 추가 설명이 필요한 것들이 있다 싶으면 출력본에 끄적끄적 써요. 그러다가 중요 포인트, 예를 든다면 아 이 부분은 소제목으로 쓰면 되겠다 싶은 건 파란색 펜으로 밑줄 긋고, 아 이 부분은 뭔가 재확인이 필요하다 싶은 내용들에 빨간줄 긋고 하는거죠.


(그럼. 형광펜은 다른 역할이 있나요?)


비슷하긴 한데...이 챕터의 핵심부분이다 싶으면 파란색으로 박스표시, 전혀 내용상 필요없다거나 내보내기에는 민감한 내용에 대해서는 빨간색으로 박스표시, 그리고 요 옆에꺼 초록색은...그런 거 있잖아요. 뭔가 계속 보는데 참 애매하다 싶은 것들...그런 것들은 죄다 초록색으로 돼지꼬리 표시하고...그냥 제 나름대로 이렇게 구분해서 쓰면 나중에 볼 때 편해요.




(오랜만에 보는 기차모양 연필깎기네요.)


네. 이거는 하하. 이게 사람 이야기 쓰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직접 그 분을 뵙고 쓴 입장이 아니다보니까 뭔가 저는 좀 느낌, 필? 뭐래 하하. 여튼 연필을 바짝 깎아서 쓰다보면 글이 좀 말랑말랑하고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될까요. 그런 게 있어요. 자동 연필깎기도 있긴 하지만 제가 직접 깎아야 맛이 좀 사는 거 같아요.



(라이언 좋아하시나봐요?)


아뇨. 라이언이 좋다기보다 색감이 좋아서 샀어요. 하루종일 글자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이 피곤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런 옅은 색깔의 물건들이 좋아요. 보기에도 편하고...눈이 자꾸 말라요. 눈 깜빡거리는 게 줄어드니까. 그래서 가습기를 조금 틀어놓으면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막 좋다 그런건 모르겠는데 일단 두면 마음이라도 편하죠.



(텀블러를 두 개나 쓰시네요?)


아. 이 네이비색은 당 떨어질 때 두유나 코코아 이런 거 마실 때 쓰고...옆에 아이보리색 요거는 커피 마실 때 써요. 잠 오고 이럴 때 커피 원액에 시원하게 물타서 마시면 좀 낫죠. 속이 타니까 보다보면 하하. 그래서 저는 좀 시원한 음료를 좋아해요.


(보통 책상에 보면 가족 사진이나 반려동물 사진이나 그런 거 많이 두는데. 풍경사진 딱 하나 붙여뒀네요?)


아 이거는 제주도 갔을 때에요. 저희 할머니랑 작은 할머니 두 분 해서 세 분 모시고 올해 제주도를 다녀왔어요. 누가 모실꺼냐 하는데 할머니들이랑 두런두런 이야기도 잘 나누고 잘 챙겨드리고 할 사람이 너다 부모님이 그러시니까 저도 뭐 할머니들 좋아하고, 제주도도 좋아하고 해서 같이 다녀왔어요. 거기 가서 찍은 거에요.



(근데 왜 이걸 붙여뒀어요?)


아. 왜냐면...그냥요 하하. 그냥 뭐랄까...남들 이야기,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나 고령의 타인에 대해 글을 내고 있는데, 왜 정작 할머니들 이야기는 아는 게 별로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 할머니들이랑 자주 여행도 다니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할머니가 살았던 옛 이야기도 좀 듣고해야겠다 싶더라구요. 사실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죠. 그랬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이 책상의 핵심은 사진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그녀만의 이야기를 써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생각해보니 나는 조사자를 조사하는 사람에 대해 또 조사를 한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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