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하늘에서 날아오는 적기의 공격으로부터 육군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명을 하달하는 병사였다.
우리 진지는 최전방에 있었고, 강 건너에 북한의 건물들과 산, 오고 가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부대는 본부에서 실시간으로 하달하는 작전명에 2분 안에 모든 방어조치를 완료하여 적의 공습에 대응할 수 있어야만 했다. 전쟁 발발 시, 북한 전투기는 2분 내 서울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작전명은 암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달받은 암호를 다시 우리 진지에 실시간으로 알려줘야만 한다. 이를 위해 일개 병사는 짧은 시간 내 고도의 추가 군사교육을 받아야 하며 교육 이수 후 바로 사령부 벙커로 투입되었다.
나는 2년 간 3교대(오전 8시~오후 5시/오후 5시~오전 12시/밤 오전 12시~ 오전 8시)로 컴컴한 벙커 속에서 레이더 감시, 암호 방송청취, 청취 하달에 대한 즉각 적기 위치표기 업무를 봤다. 레이더 파괴 또는 고장에 대비한 그야말로 인간병기의 역할이었다.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중 가장 어려운 임무는 '표적'이었다. 수십대의 적기가 내려오는 가상 시나리오의 암호를 즉각 해독하여 적기가 어느 위치로 이동하는지를 표기하여 작전 통제실에서 그 위치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특수한 지도판에 특수한 색연필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모양과 숫자로 또렷하게 그어 나갔다. 이 업무는 최고참의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최고참 이하 상병급은 매일 같이 통제실 내 후임들을 교육했다.
전쟁이 나면, 그리고 내가 암호명 하나라도 잘못 외는 날에는, 그리고 잘못 적기의 위치를 표기하는 날에는, 최전방의 내 동료들은 싹 다 죽을 거란 점을 현장에 와서 알게 되었다.
'**** 발령! 최초 추적 하달한다 최초 추적 북한기!'
가상적기가 아니고??? 이 말을 이등병 말 때 처음 들었다. 매일 하던 훈련인데 정작 가상적기가 아니라 북한기 소리를 들으니 넋이 나가버렸다. 뒤에서 선임병이 뒤통수를 후려 치면서 "뭐하고 있어 방송 안 하고!" 외칠 때 비로소 전쟁 직전 상황임을 알았다.
전쟁 직전 단계인 ****은 군 생활 중 적어도 스무 번 이상은 겪었다. 적기는 집요하고 교묘했다. 휴전선을 코 앞에 두고 새떼처럼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조금이라도 넘어오면 즉각 발사인 거다. 새벽에 적기가 뜨면 모든 부대원이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가 장비에 올라탔다. 동이 틀 때까지 상황이 종료되지 않은 적도 많았다.
불시로 작전통제관이 와서 상황을 주었다. 일종의 실시간 작전대응능력시험이었는데, 일정 점수를 충족하지 못하면 군기교육대를 가야 했다. (실제로 내 선임 중 한 명은 점수 미만으로 군기대에서 4박 5일 구르고 왔다.) 기본점수마저 채우지 못하면 영창행이었다. 정말 죽기 살기로 연습하고 실전에 대응했다. 그때 월급은 3만 원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불평불만도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전체가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대원 중 특히 작전통제병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암호 하달을 즉각 해독하여 방송으로 전달하는 한편, 다른 한 명은 벙커 내 작전참모가 볼 수 있도록 투명 유리 지도에 적기의 이동경로를 실시간으로 표기해야 했다. 그때 나는 글씨 거꾸로 쓰는 달인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손이 떨리는 증상이 생겼다. 이 증상은 제대 후 3년이 지난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버스나 지하철 손잡이를 잡으면 무의식적으로 오른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노트에 '이상한 낙서'를 나도 모르게 적고 있노라면 주변에서 다가와 이게 뭐냐 묻기도 하여 휙 찢어버리곤 했다. 하루 종일 손이 멈추질 않았다.강의실에 앉아있어도 손은 군을 떠나지 않았다.
환청 증상도 따라왔다. 라디오는 일부러 듣지 않았다.지지직 소리만 들려도 싫었다.
제대 후 겪는 우리나라 청년들의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가 있는지 궁금하다. 치료비는 당장 무상으로 못주더라도 상담 및 치료센터가 전국 곳곳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티비에서 보여주는 위협적 안보상황과 실제 마주하는 대치상황의 극명한 차이는 겪어본 자만 알 수 있다.
참고로 람보1은 영웅놀이가 아니라, 베트남 참전군인 중 한 명이 제대 후 겪는 트라우마에 대해 미국 내에서 얼마나 무관심했고 싸늘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획기적인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