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단순 건조한 표현이다. 그를 왜 돕는지, 그의 신변을 왜 보호하는지 설명이 없다. 누가 보면 속된 말로 ‘가방모찌’ 노릇하는 하수인 정도로 이해할 것 같다. 최근에 뉴스를 보면 수행비서가 범죄를 저질러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수행비서에게 갑질을 해서 논란을 빚는 기관의 장이 여론에 뭇매를 맞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높은 지위의 사람을 수행해야 하는가? 수행비서는 왜 필요한가?
수행 비서를 설명하기 전에 ‘높은 지위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대개 이 사람들은 공공기관, 대기업의 수장이다. 즉, 기관의 얼굴이고, 회사의 얼굴이다. 기관의 규모가 커질수록 기관의 활동에 대한 시민의 관심은 더욱 뜨겁다. 그래서 대표는 기관의 활동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효율적으로 알리고 소통하고 기여하여, 우리 시민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적 가치로서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릇 수장이라면, 기관을 으쌰 으쌰 끌고 나아가는 수백수천의 직원 모두가 야근에 휴일근무에 현장점검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쌓아 올린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기관이 힘쓴 내용에 대해 시민들이 ‘그래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피부로 느끼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수장은 매일 수십 건 많게는 수백 건의 결재, 회의, 행사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매사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 모든 것을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수장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안사항을 수시로 보고받고, 체크하며,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당장 해결해야 할 것에 대해 우선순위를 매긴다. 그 활동은 수장의 임기가 끝나는 그 날까지 쉼 없이 계속된다. 끝없는 체력과의 싸움이다.
외부인사가 기관의 수장으로 발탁이 되면 상황은 더 빡빡해진다. 그동안 바깥에서만 보아왔던 기관의 구조와 속성, 특징 등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숙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탁된 수장의 나이는 결코 적지 않다. 깊은 연륜과 안목은 주무기가 되지만, 상대적으로 약한 체력은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보좌가 필요하다.
기관의 성과를 효율적, 체계적, 안정적으로 기관의 대표를 통해 사회에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 보좌하는 자
내가 수행비서 업무를 맡으면서 내린 나름대로의 정의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기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수행비서는 대표를 통해 사회에 전달되는 메시지에 차질이 없도록 대표와 기관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대외 현장에서는 기관이 빛이 날 수 있도록 대표의 품위와 격을 드높여 주는 중책을 맡고 있다. 그냥 수장의 가방만 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수행비서의 가방은 만물상이다.
스케줄 표는 항상 빼들고 볼 수 있도록 제일 상단에 와야 한다. 스케줄은 하루에도 몇 차례 뒤집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때 수행비서는 수장의 판단에 따른 스케줄 진행이 가능한지 비서실을 거쳐 기관에 재차 확인한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자칫 스케줄이 꼬이면 기관 전체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부서가 수장의 결정에 따라 스케줄을 진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행비서는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스케줄 표에 따른 오늘의 자료도 함께 붙여둔다. 어떤 행사가 있다면 최소한 수장이 숙지하고 있어야 할 주요 내빈 프로필, 행사 순서, 수장의 주요 역할, 행사장 구조, 수장의 좌석, 좌석 옆에 앉을 내빈 등 인물과 시공간, 동선을 다 계산하고 수장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핸드폰은 군인의 총기처럼 다루어야 한다.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될 1호품이다. 물론 직접 수장에게 연락하는 간부들도 있지만, 수장이 행사 중이거나 회의 중일 경우에는 십중팔구 수행비서에게로 연락이 온다. 시급한 사안인 경우엔 회의 중이라도 들어가서 귓속말로 전달해야 한다. 수장이 급히 일어난다. 모든 스케줄이 재검토 단계로 전환된다. 전화기에 불이 날 지경이다.
아침부터 출장인 경우엔 기사 스크랩을 챙긴다. 우리 기관과 관련된 기사들을 담당부서에서 정리하여 보내주면 수행비서는 그 내용을 그냥 수장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다 읽어보고 의문 나는 점이나 추가로 확인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관련부서를 통해 확인한 후에 수장에게 보고한다. 우리 기관에 대한 언론의 반응과 입장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사항이기에 수행비서는 끊임없이 체크, 또 체크한다.
수행비서는 뒤에서 멀뚱멀뚱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 경우, 수첩을 세 개 가지고 다녔다. 하나는 현장에서 수장이 그때그때 지시하는 사항이나, 회의 중 주요 사항에 대해 적는 용도로 쓴다. 예컨대 소속기관 업무보고가 있다면 논의되는 내용에 대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기관이 고민하는 주요 포인트가 무엇인지 밑줄 긋고, 이야기 중 나온 전문용어가 이해가 안 될 땐 일단 적어두고 나중에 확인하여 확실히 해둔다. 다른 하나는 하루 일정이 끝나고 나서 일과를 정리하는 데 쓴다. 수장의 지시사항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내일의 일정 사항과 중요 숙지사항은 무엇인지, 당장이라도 바뀔 수 있는 스케줄이 있다면 무엇인지 적어둔다. 마지막 하나는 내 개인용이다.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명함도 빠뜨릴 수 없다. 수장의 명함, 내 명함을 뭉터기로 갖고 다닌다. 그만큼 대외 행사가 많기 때문에 하루에 소비하는 명함의 개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때도 있다. 수장이 명함집이 빌 것 같으면 그때그때 뒤에서 드린다. 수행비서인 나를 통해서 소통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에 내 명함집 역시 명함이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 쓴다.
기념품도 챙겨야 한다. 기관에서는 김영란법에 맞추어 작은 기념품을 만든다. 기념품은 기관을 홍보하고, 상대 기관에 대한 예우로서 주는 것인데 대부분 명함집, 핸드폰 급속 충전기 이런 것들이다. 이 기념품을 주고받는 데에도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상대 기관에서는 호의랍시고 이것저것 봉투에 담아 현장에서 우리 기관장에게 한아름 안겨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땐 일단 인사 자리에서는 기관장이 받고 수행비서가 티타임을 나누는 동안 내용물을 확인한다. 그래서 만약 김영란법에 어긋나는 기념품이라든지, 대가성으로 의심될 수 있는 물품이 확인된다면 상대 기관의 비서실에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겠다고 정중히 거절하고 돌려줘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선에서 일을 정리하는 것. 이게 바로 의전이다.
비상약도 구비해둔다. 국정감사라든지, 언론 설명회라든지 이런 자리에 가면 수장도 긴장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 수장이 갑자기 탈이 나서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이럴 때 급히 쓸 수 있는 약이 필요하다. 멀미약, 두통약, 소화제, 지사제 등 여러 상비품도 함께 가방에 넣어둔다. 물론 나도 아플 수가 있으므로 이 약은 공동 소비용이다.
이밖에도 기타 챙겨야 할 물건들이 수시로 생긴다. 그래서 수행비서의 가방은 늘 무겁고 가득하다. 이 가방에 기관의 성과를 정리하고 알릴 것들이 무수히 담겨 있다. 그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고 수장과 함께 사회로 나아가는 자가 수행비서다. 그것이 수행비서의 자부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