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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Jul 06. 2020

글쓰기를 배우는 중입니다

출판계의 노련한 마케팅에 기꺼이    


언제였더라. 들춰보니 작년 9월이다. 오랜 블로그 생활을 이제는 마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같이 일해보자며 검은손이 보내는 메일이 수도 없이 쌓였다. 쪽지는 물론, 메일이며 문자 메시지까지 광고에 파묻혀 숨이 막힐 지경인 블로그 생태계에 진절머리가 났다.



찬이도 나도 한 단계 다른 도약을 위해서는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올해 1월, 블로그 이웃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글로 쓰겠노라 작심하는 연설까지 했더랬다. 사람들이 내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선언이라도 해둬야 했다. 뭐가 됐든 실천하는 한 해를 보내고 싶었다. 생각만 하는 사이, 지나가 버린 시간들이 속절없이 많다는 걸 절절하게 느끼고 있던 터다. 이 이상 미뤘다가는 실천할 기회조차 날아가 버릴까 싶어, 내질러 보기로 했다.



글이란 건 블로그나 일기로만 써봤지, 제대로 된 글감으로 써본 일이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쓰면 잘 써질까, 아니야 한글이 더 낫지, 그냥 pages로 써도 좋겠다 싶다가, 이왕 쓰는 거 책으로 엮기 쉽게 인디자인에 바로 쓰면 어떨까, 아니야 다시 한글이 좋겠어. 쓸데없는 연장 탓만 서 넉 달을 했다. 그러다 만난 브런치는 온라인 저장이 된다는 장점과 함께, 쓰는 맛이 나는 쾌적한 UI를 탑재하고 있었다. 내 입맛에 제격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쓰기에도 부담이 없어 치료실을 오가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오타까지 잡아주니, 썩 괜찮은 플랫폼이었다. 플랫폼 유목민일 뻔했던 나는 스리슬쩍 브런치에 흘러들었다. 작가 신청을 했고, 이틀 만에 작가 승인이 나자, 모아뒀던 머릿속 글들을 하나 둘 꺼내 썼다. 애초에 난 작가가 되려고 글을 쓴 게 아니었다.





브런치, 난 네가 나에게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다.


브런치, 난 네가 나에게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다.




웬걸. 글 하나를 올리자, 브런치 추천 글에 올랐다. 다음 메인에도 떴다. - 후에야 알았지만, 이건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독려하려는 다음의 배려였다. 다음은 나에게 돈을 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회수 정도는 올려주마고 말없는 응원을 해줬다. 그럼에도 난, - 내가 원래 글을 좀 쓰지, 글쓰기 실력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에 브런치가 칭찬해주는 방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쓰면 쓸수록 욕심이 났다. 잘 쓰고 싶었고, 그냥 써 재끼는 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지나던 길에 재밌는 작가님이 쓴 글이라도 마주치는 날엔 재밌는 글이 쓰고 싶어 혼이 났다. 내 글은 모두 쓰레기로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 정말 쓰레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 애초에 쓰려던 내 삶이 재밌는 이야깃거리인지 가늠해보지도 않고, 잘 쓴다는 기준이 뭘지 고민 없이 욕심만 야심 차게 키웠다.



브런치에는 목적 잃은 욕심을 키우게 하는 못 된 애들이 있다. 그 애들은 댓글과 좋아요, 구독자, 그리고 조회수인데, 가장 먼저 중독이 되는 건 조회수라는 애다. 읽는 사람에겐 티가 나지 않지만, 쓰는 사람에겐 무지하게 티가 난다는 그 조회수라는 건, "조회수가 1000을 돌파했습니다!"라는 알림을 울리며 황홀경을 느끼게 한다. 조회수가 만을 넘어 이만이라도 넘기는 날엔 내 글이 그렇게 좋은가 보다며 착각하기 일쑤다. 한참을 조회수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겠더니, 이젠 구독자수가 유혹을 했다. 구독자수뿐인가, 블로그 시절부터 좋아요와 댓글은 이미 충분한 유혹 대상이었다. 브런치는 열정 페이를 은근슬쩍 요구하는 못 된 플랫폼이었다.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던 초심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못 된 애들 덕에 내 첫 글쓰기 <마음 꼬맹이에게 오늘도 배웁니다>는 완결되지 못했다. 쓰면 쓸수록 ‘글감마다 깨달음이 있었소’라는 구태의연한 글쓰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쓰면 쓸수록 구구절절 흔한 이야깃거리로 전락하는 느낌에 좌절했다. 이리 기웃, 이 책 저 책, 고전과 위대한 소설가의 책을 마구잡이로 읽어재끼며, 박완서 선생님의 구수한 문체를 닮고 싶었고, 이슬아의 대담함을 닮고 싶고, 테드 창의 기가 막힌 이야기 능력을 닮고 싶어 졌다. 이름 좀 알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넘보지도 않았지만, 내가 이미 작가라도 되는 듯 굴었다. 브런치는 작가를 희망하지 않던 나에게 작가를 희망하게 했다.



급기야 읽어줄 대상까지 잃어버린 나의 글쓰기는 지속할  힘을 잃어버렸다. 글쓰기는 그대로 멈췄고, 실패했다. 실패가 아니라고, 잠시 미뤄뒀을 뿐이라고 스윽 재껴뒀건만, 글쓰기는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어서 쓰다 보니 역시 실패가 분명하다는 결론 앞에 아득바득 데려다줬다. 어머나. 지금 이 글도 브런치 이벤트 "나도 작가다"에 빨려 들어 쓰기 시작한 글이다. 그러고 보니, 브런치의 못 된 애들은 '프로모션'까지 포함해 5종 세트가 있었다. 허어. 브런치 참 못 됐다.  



책장을 하나 더 사야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은 어찌 보면 출판계의 노련한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고 문턱을 낮추며 이 세계의 기쁨을 누려보라 말한다. 나도 될 수 있다고? 아니, 이미 작가라고? 작가라는 타이틀을 먼저 내어 준 이 세상은, 나도 모르는 사이 수십 권의 책을 사들이게 했다. 작가라는 데 이 정도는 읽어야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김하나 작가님을 덕질하기 시작했고, 정세랑 작가님이 궁금해졌다.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소유할 수 있는 물질이라면, 책꽂이에 꽂아 두고 영영 나의 것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 들었고, 톨스토이를 다시 읽는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취향에 맞는 책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지, 출판사를 왜 들여다봐야 하는지 이제는 알게 됐다. 쓰기 전에 많이 읽어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안겨 준 그들의 방식은 대단했다. 의도야 어떻든, 난 잃어버린 즐거움을 다시 찾았다. 책이 즐거워 스마트폰을 잊고 산다. 책이 즐거워 사유하는 즐거움에 빠져 들었고, 자꾸만 쓰고 싶다. 재밌어 죽겠다. 이런 거였다면 낚시질을 당하더라도 기꺼이 함께 하겠다. 


모두가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고, 책과 함께 즐겁게 살자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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