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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Aug 18. 2020

어머님은 먹거리로 말을 건네신다

먹거리와 함께 먹은 당신의 이야기들



아침 7시, 오전 10시 반, 오후 5시와 7시.

대충 모아본 이 시간들은 나의 시어머니, 순화 씨의 전화가 걸려오는 시각이다. 어느 날엔 아침에, 어느 날엔 오후에 전화가 걸려온다.



순화 씨의 전화엔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배추김치를 담았다거나, 깍두기를 담았다거나, 오이소박이나 갓김치, 때론 동치미를 담았으니 가져다 먹으라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생선류인데, 아버님이 낚시를 다녀오신 날엔 우럭과 벤자리와 참돔이, 사촌 아주버님이 낚시 갔다 온 날엔 히라스와 벵에돔, 벤자리, 제주산 고등어, 고졸맹이가 손에 들린다. 이 외에도 옥돔, 자리돔, 전복, 뿔소라, 성게알, 피조개와 꼬막, 보말, 미역, 톳 등 사계절 내내 전화기를 놓지 않으신다.




히라스회, 냉이나물 한 다라이, 조개모듬 구이



해녀이신 예래동 이모할머니가 물질해온 우뭇가사리를 - 교과서에서만 봐 왔던 우뭇가사리를 직접 본 건 마흔이 넘어서다, 심지어 말린!!! - 직접 말리신 다음 날엔, 어김없이 우무를 가져다 먹으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여름이면 콩국물을 만드시고, 겨울이면 막걸리빵을 만들어 전화하신다. 과일로는 옆집에 수눌음을 갔다가 품삯으로 얻어오신 한라봉을, 마당의 단감나무 두 그루에 단감이 열리면 단감을, 외증조할머니 마당의 대봉감을, 앞집 이모할아버지 마당의 무화과를, 이 외에도 곶감, 딸기, 포도, 아보카도, 하귤, 자몽, 청견, 황금향, 레드향, 블루베리, 감자, 양파, 마늘, 쪽파, 대파, 배추, 토마토, 부추, 완두콩, 두불콩, 방풍, 노각, 늙은 호박, 호박잎, 고추, 고춧잎, 깻잎, 오이, 냉이, 유채, 밤, 로즈메리, 깨와 참기름 등이 끊이질 않는다.



그 과일들의 수만큼, 그 야채들의 수만큼 시댁을 오가고, 음식을 해 먹는다. 이렇게 얻어먹으면서도 지금껏 나열을 해 본 적이 없었던지라, 많이도 쳐 받아먹었다는 생각이 순간 든다.



오늘 순화 씨의 전화는 오후 5시에 걸려 왔다. 이번 아이템은 벤자리. 동네 배낚시하는 어르신이 낚아 온 싱싱한 벤자리를 8년째 얻어먹고 있다. 활엽수가 별로 없는 제주의 계절은 철마다 만나는 먹거리로부터 깨닫는 일이 많은 셈이다. 벤자리가 맛있는 이 계절에도 난 부지런히 시댁으로 내달린다.



그렇게 부지런히 날라다 먹은 동안, 며느리 된 나는 무얼 갖다 드렸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기껏해야 동네 마트에서 수박 한 덩어리 사다 드릴뿐, 딱히 드릴만한 물건을 떠올리지 못하는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 느낌마저 든다. 무언가를 사다 드린 횟수도 민망할 정도로 적으니 말 다했다.



싱싱한 자연의 재료들을 얻어다 요리를 하면 간장과 설탕과 소금, 참기름, 깨소금만으로 어떤 비율로 어떻게 섞어 끓여 먹든 비벼먹든 졸여먹든 볶아먹든, 그 맛은 이를 데 없이 맛있다. 아이들이란 자연의 맛을 더 잘 아는 존재여서 마트에서 사 온 소시지보다도 간장에 조려 적당히 간이 밴 벤자리의 맛을 더욱 좋아한다.




하귤, 우녕의 부추와 앞마당의 단감
순화 씨가 만든 우무로 만든 우무 냉국




먹거리 전화는 이렇게나 반가운 존재인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하기도 하는데, 먹거리를 가지러 시댁에 갈 때면 두어 시간의 여유 시간을 잡아놓고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순화 씨의 일상 담화는 한 시간 정도로는 아쉽기 때문. 차분하게 들어줄 시간과 마음이 필요하다. 어떤 날의 순화 씨는 먹거리를 나눠 먹기 위함보다, 당신의 가슴에 담아둔 이야깃거리가 하도 넘쳐 조금이라도 덜기 위함이 크지 싶다.  은유의 책 <다가오는 말들>에서 '타인의 말은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온전히 들린다'는 말처럼, 나의 판단은 잠시 내려놓고 가만히 귀를 열어 둘 뿐이다. 그러면 순화 씨의 말은 한 사람의 사연으로,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한다. 가만히 앉아 차근차근 순화 씨를 듣다 보면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태양초 감말랭이와 유채나물, 대파
순화 씨 텃밭의 배추와 마당의 로즈메리



순화 씨는 당신이 나눈 과일의 수와 야채의 수, 그리고 생선의 수만큼 당신 속에 가득 든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나에게 들려준다. 아마 앞으로의 사계절 동안도 계절을 알리는 수많은 먹거리들과 당신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맴 맴돌아서 결국엔 써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써 내려갔는데, 그동안의 먹거리들이 생각보다 많았음에 놀랐고, 줄줄 읊어보는 그동안의 사계절에 고마웠다. 쓰는 동안 어떤 마음인지 모른 채 써 내려간 이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서야, 고마운 마음만으로 보답이 어려운 순화 씨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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