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을 품고 살다
"엄마가 죽기 살기로 노력을 해서 기적이 일어난다면, 경계선 지능 언저리까지는 자랄 겁니다."
대학병원 교수님 치곤 눈웃음 스킬이 KFC 할아버지를 웃도는 할아버지 교수님은 그리 말했어요. 기적이 일어난다면 언저리까지는 가능할 거라고. 엉뚱한 선물이 든 상자를 억지로 열어 본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대하던 답이 아니었거나,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답이 미웠거나 그랬어요.
정말 그럴까요, 직접 살아보고 다시 올게요, 라며 회답하듯 총총 돌아왔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 이상일 것을 증명해 보이겠노라며 총총총 살았어요. 잘 사는 아이라도 혹여 본 적이 있으신지 더불어 묻는 질문에 역학조사까지는 할 수가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었다 했습니다.
어디(어느 수준)까지 자랄까, 말은 하게 될까, 교육은 가능할까, 직업은 가질 수 있을까, 자립할 수 있을 만큼 키울 수 있을까, 품어야 할 물음이 끝도 없이 생겼습니다. 아이를 눈 앞에 두고 하는 물음에, 누군가 속 시원한 답을 해주길 바랬습니다. 12년을 품고 산 지금도 여전히 궁금한 건 매한가지지만, '불안한 궁금'이 아닌 '기대하는 궁금'이라는 점에서 그때와 다르네요.
아이가 열두 살쯤 지나면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 그때면 답을 알게 될까, 어디서부터 청소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폭탄 맞은 방을 바라보듯, 삶이 그랬어요. 동네 할머니 팔이라도 부여잡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달래며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돌이켜보면, 플러스 마이너스 1도 없는 예측 가능한 그대로의 말이었다는 걸 수긍하게 돼요. 안타까운 엄마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라도 노려볼 수 있도록 현실을 기만하는 말은 할 수가 없었을 터였던 거죠. 역술인이 아닌 의사에게 굳이 묻고 싶던 나의 마음과 같은 이유랄까.
“어디까지 자랄까요?” 잃어버린 성장판에 일말의 기대를 걸듯 물었습니다. 갓 들여놓은 극락조의 예상키를 묻듯, 어미 잃은 강아지의 몸집을 예상하듯 물었던 거였어요. 사람에게 할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맹랑하게 물었어요. 어리석은 질문임에도 교수님은 답을 해준 거였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언 강물에 몸이라도 던질 '사서고생타입'임을 감지하셨던 것 같아요. 애쓰지 말고 적당히 있는 행복 누리며 살 것을 권하셨던 거였죠. 몸을 던져 얻을 수 있는 게 기껏 그 정도일 뿐이니, 엉뚱한데 힘 빼지 말고 강아지 하나 사주고 작은 행복 느끼며 살라고 말입니다. 몸을 던져 얻을 행복보다 눈앞에 있는 행복 챙기며 사는 게 훨씬 남는 장사라고요. '지능'은 '기껏' 혹은 '따위'일뿐임을 알지 못했어요. 강아지는 사지 않았지만, 기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심정으로 힘을 쓰며 살았어요. 그냥 몸을 던지며 살았어요.
예언(?)한대로 실현이 된 건지, 찬이는 - 열두 살 나이 기준으로 - 경계선 지능 언저리까지 자랐습니다. 막상 눈앞에 고지를 두고 보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하기엔 기뻐할 일이 못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살아갈 날이 80%는 더 남았으므로. 남은 인생 동안 지능이 더 오른다고, 삶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노라고 비행기 끊고 달려가 보란 듯이 이야기하고 싶지만, 단언할 수가 없었어요. 찬이는 성장하고 있고 현재도 진행 중이며, 이후 삶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어요. 삶은 지금도 흐르고 있고, 이후로도 쭉 진행형일 테니까요.
열다섯이 되든 스무 살이 되든 일곱 살에 했던 그만큼의 노력만 유지하면 훨씬 더 말을 잘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을까 궁금했어요. 이젠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얻은 결과가 결코 행복이라는 두 글자와 맡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요. 잘 살아가기 위한 조건에 지능은 극히 일부일 뿐이었어요.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中
엄마가 아이 손을 끌고 치료실로 내달리는 이유는 아이가 사회에서 불려지는 삶을 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김현경에 따르면, 사람이길 원하는 인간은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필요한 요인은 아주 복잡하고 미묘해서 ‘지능’만을 갖춰서도, 신체만을 갖춰서도 어렵다는 거예요. 지식과 학식을 배제하더라도 인격을 갖추고 관계 맺기를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는 거죠. 사회 안에서 사람을 불러내고, 불려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완성형은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진행형만 있을 뿐입니다.
“찬이야~ 안녕~ 빠이빠이~”
여전히 찬이를 불러주는 친구들이 커서도 지금처럼 다정하게 불러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