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에 대하여
이경미 감독이 쓴 <잘 돼가? 무엇이든>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가볍게 넘겨 본 서문의 글이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제자리를 빙빙 도는 내 모습과 닮아서였어요.
혼자 끼적였던 지난 15년의 부끄러운 기록들을 모았다. 이제 나의 철없고 부실한 농담들이 계획대로 가지지 않는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작은 웃음이 되면 참 좋겠다. 그럼, 덕분에 나도 정성 들여 크게 웃고 다음 인생으로 넘어가 보겠다.
이경미 <잘 돼가? 무엇이든> 中
책의 내용은 기대와는 달랐지만, 서문만으로 이 책은 작은 웃음을 주었습니다. 지지부진하게 이야기했듯, 찬이와의 지난 10년을 정리하겠다... 지난 11년을 정리하겠다... 이젠 지난 12년을 정리하겠다로 이어지고 있던 터였죠. 어서 정리해서 크게 웃고는 다음 생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자꾸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긴 몇 월 몇 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있을 자리가 그냥 이곳인가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왜 이다지도 제자리인가 생각을 해보니, 그냥 대충 써 넘기기엔 아쉬워서였어요. 아까워서요. 대충 쓰고 싶지 않은 욕심에, 아무도 내 삶에 큰 관심이 없음을 알기에 더욱 욕심이 났어요. 내 삶이 그렇게 소중했던가 봅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어요. 육아를 하는 동안 읽은 책이라곤 육아서와 발달장애 관련 서적, 혹은 논문? 등이 태반이었는데, 글을 쓰려고 하니 자연스레 멈췄던 책읽기가 살아났습니다. 우연히 집게 된 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다른 책을 불러왔어요. 책에 빠져드는 건 순식간일 수 있다는 경험을 했지요. 읽고 싶은 책이 끝도 없이 생겨났습니다. 그냥 푹 빠져 살았어요.
독서란 게 참 한량의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호사스러운 감정까지 느끼며, 나만 힘든 인생이 아님을 단순하게도 깨닫는 시간이 되었죠. 참으로 좁은 세상에 있었던 나를 알게 했습니다. 수많은 논문과 발달장애 서적을 읽기 전에, 인문학을 읽고 철학을 읽고 소설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더더더 책 속으로 빠져듭니다.
장애와, 육아와 나만 알던 삶의 축이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찬이의 탄생과 함께 겪었던 경험이 정확히 어떤 경험인지 잘 몰라서 답답한 심정을 끌어안고 살았어요. 나름 야무지게 산다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당장 닥친 눈앞의 문제만 보며 살았어요.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더라는 시인과 촌장의 노래 <숲>처럼 푸르고 푸르던 숲, 내 젊은 날의 숲을 맹렬하게 지나와, 이제 조금 숲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술 라디오>에서 정혜윤이 말했던 연대의 의미를 곱씹습니다. 여전히 겪어야 할 고통이 기다리는 생을 살고 있지만, 내가 겪은 고통이 다른 사람들은 덜 겪을 수 있게 알려주는 일에도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있다는 것을요. 정혜윤은 누구의 고통과도 바꿀 수 없는 세월호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장애아 부모들에게 연대란 지리하게 이어지는 일상이지 않은가 생각하면서요.
연대는, 온갖 고통을 겪어낸 사람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은 덜 겪도록 최대한 알려주는 것이더라고요. “너는 나보다 덜 힘들었으면 해. 그러니 내가 겪은 모든 걸 알려줄게." 이게 연대예요.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 中
이 게 이다음 내가 할 일이고, 해야 할 일이고, 하고 싶은 일입니다. 써 놓고 보니 거창하기만 한데,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고, 잘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엄마 미소 지어 주고, 든든한 남편과 담소 나눌 작은 시간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느꼈던 작은 일들을 이웃들에게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연대라 할만합니다. 복지 정책이라던가, 장애인을 위한 사회인식의 변화 같은, 거대한 담론을 건드리진 못할지라도 작은 이야기 하나로 우리의 삶을 전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아갑니다.
전해 주고 싶어요. 연대란, 손을 맞잡고 둥글게 둥글게 모여 으쌰 으쌰 하는 의기투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입에서 누군가의 입으로 전하고 전해져 또 다른 누군가는 덜 힘들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라는 걸요. 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힘이 드는 이야기가 된다면, 연대하지 못한 책임까지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말이죠.
전하고 싶어요, 숲 속을 갓 나오는 이 기분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