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휴먼 지능
구글 홈과 카카오 미니를 두고 아홉 살 딸아이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네, 그 인공지능 블루투스 스피커 말입니다. 카카오미니에 살포시 내려앉은 라이언인지, 어피치인지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느껴졌던 딸아이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동그란 구글 홈의 매무새가 영 탐탁지 않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는 동안 기계로부터 얻은 나름의 교훈 같은 게 있었던 나는, 카카오 미니는 분명 국내에 최적화된 음악만을 들려줄 것이 뻔하고 확장성이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있었죠. 반면 구글 홈은, 이 녀석과는 왠지 영어로 대화까지 가능할 거라는 머나먼 미래의 나를 상상하게 했어요. 이왕 인공지능이라면 친구가 되어줄 바에 제대로 인텔리 해야하지 않겠는가 생각했죠.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꿈 많은 주부로 살뜰하게 살고픈 나의 제품 구매 기준입니다.
딸아이와 열렬하게 다투느라, 어느새 배가 고팠어요. "엄마! 나 고르곤졸라 피자 먹고 싶어. 우리 자주 가는 거기 피자."
응? 아... 거기! 해 놓고선 떠오르는 식당 모습이란 사진처럼 선명하기만 한데, 머릿속에 찍어 놓은 사진이라 그런지 간판이 흐릿하기만 합니다. 확대하고 확대하고 또 확대를 해봐도 깨지는 건 픽셀이요, 여전한 건 해상도일 뿐. 도무지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요. "엄마! 배고파, 배고파!"
보채는 딸아이 덕에 기억력 지수는 급강하를 찍고, 습관처럼 검색창을 열어도 첫 글자조차 떠오르지 않아 검색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둥실둥실 맴돌 뿐.
아.. 이제 글로 좀 써 보려고 되짚어보려는 이 순간조차 기억이 나지 않네요. 답답한 마음이 꿀떡꿀떡 목으로 차 오르는 걸 애써 막아보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차분하게 떠올려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 나는 뭐가 문제인가요. 받침이 없고, 반복이 되는 느낌이고, 싸다고 싸다고 어필하는 이름이었는데, 흐릿하게 뭉개지기만 하다 사라집니다. 으와. 치피 치피? 코스트 코스트? 치프 코스트? 맴맴 맴맴 맴돌다 답답해서 까무러칠 때쯤, 한가로이 스마트폰 게임 중이신 찬이가 보입니다.
"찬이야! 우리 지난번에 유진이랑 우진이랑 같이 가서 먹었던 식당 이름이 뭐더라? 너는 필라프 먹고, 아연이는 콘치즈피자 먹고, 다 먹고 배스킨라빈스 갔던 그 식당 이름!"
"라라코스트.”
장황하기 그지없는 질문에 비해 단출하기 짝이 없는 답 한마디로, 엄마의 채증을 시원하게 내려주는 찬이는 우리 집 H.I 휴먼지능(Human Itelligence)입니다! 이쯤 되니, 딸아이가 점 하나를 찍네요.
"엄마! 오빠 부를 때, '오케이 찬이!'하고 부르면 되겠다!"
그렇게 찬이는 가끔 '오케이 찬이!'로 불립니다. 며칠 전 먹었던 샤인 머스켓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부탁에 남편이 난감해하다가, 또 다시 찬이를 불렀죠. 아연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이름을 기억하냐고요.
단번에 "무지 바!" 합니다.
떠오르지 않는 우리 가족의 일들을 물을 때 찬이는 A.I 부럽지 않은 우리 가족 맞춤형 휴먼지능 H.I가 됩니다. 아주 사적이고, 순간적이며, 가족만 기억하는 사소한 취향들을 깔끔하게 기억해 내지요. 카카오 미니나 구글 홈은 답해주지 못할 일들입니다. 물어보기 전까지, 옆에서 지지고 볶고 다투던 말던 알아서 답해주지 않는 - A.I와 같은 - 단점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채한 가슴을 약보다도 시원하게 뚫어주는 찬이는 우리에게 상비약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려고 벼르던 인공지능 스피커는 "오케이 찬이!"를 부르는 사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요, 이 글은 맞춤형 H.I 자랑질입니다. 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