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점점 싱거워지는 추세를 틈타
대면 경험, 즉 실제 세계에서의 경험은 불쾌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 백일몽, 발견에 대한 기대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지속되던 장마에 수박이며 복숭아는 물보다도 맛이 없고, 세상이 점점 싱거워지는 추세를 틈타 나도 한껏 싱거워지던 날들이었다.
무슨 양념이라도 쳐볼까 싶어 레시피북이라도 찾듯 모닝페이지를 열었다. 한동안 물살을 타듯 써대던 모닝페이지도 시들해져 버린 탓에 오랜만에 열어본 모닝페이지는 남의 일기장이라도 된 듯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과월호 잡지를 집어든 듯 후루룩 넘기려다 '재미없다'는 단어에 눈길이 멈췄다. 한 장을 넘기니 또 있다. '재미없다' ‘재미없다’ 무언가 부지런히 하고는 있지만 여기저기 '재미없다'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었다. 며칠 전의 내가 그랬고, 몇 달 전의 내가 그랬다. 읽기보다 쓰기를 먼저 했다면 '오늘의 나'도 '재미없다'는 말을 남발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허, 지금 재미를 찾는 거야? 인생이 쉽구나? 세상이 이토록 빡빡한데 재미 따위 찾는다고? 재미없다는 건 평안하다는 증거야, 별일 없다는 반증이야, 한가해? 건강했구나?! 누군가는 (으이그) 살만하냐며 비꼴지도 모를 일이야. 매를 번다 벌어. 어쩌면, 중년의 시간이란 이런 걸지도 몰라. 새로운 걸 배워보지 그래? 어디 가서 봉사라도 하던가?! 라며 어른 놀이를 했다.
몇 날 며칠을 싱거운 세상 속에 팅팅 불은 라면 먹듯 살다 보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춰보는 모닝페이지마다 '재미없다'는 말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어서 이 흐름을 바꿔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재미없다는 생각은 왜 드는 걸까? 가슴 설레는 연애를 하고픈 것도 아닌데..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내가 못 느끼는 걸 수도 있어. 별 쓸데없는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무기력과 함께 찾아오는 노잼 시기는 그냥 기다리는 것밖에 답이 없다는 말도 찾아 듣는다. 얼씨구.
이렇게 좋아하는 책인데, 이렇게 좋은 글쓰기를, 평생 좋아하며 살겠노라 마음먹은 그림을 두고 어쩌자고 재미없다는 마음을 뒤덮고 사는지 이유를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며 웃다가도 그림을 그리며 좋은 마음에 취하다가도 재미없는 기분은 장마가 지났음을 알리는 곰팡이처럼 섬뜩하게 올라왔다.
팡이 제로 욕실청소를 마치고 털썩 앉은 소파에서 핸드폰을 들었다. 수영 강습 공고? 어.. 오늘이 신청일이네! 심심하면 이거라도 해보든가, 심심한 건 새로운 게 없어서 그런 거야, 뭐라도 해보라고, 이왕 하는 김에 운동은 어때? 러키비키잖아! 무기력함을 벗어나는 제1원칙이 안 해본 일 해보기라잖아! 너를 구하고 남까지 구해보는 거야,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 툭 던지는 신호 같았다. 오전 9시. 강습 신청 시각에 알람을 맞췄다. 당첨이 되면 하는 거고, 말면 말자는 심산이었다.
뭔가를 이뤄내는 사람들에겐 어떤 역경도 헤쳐내는 열망이라는 게 있다던데 수영을 향한 나의 열망 혹은 간절함이란 그 축에 들 정도는 아니었던지 알람을 맞추고도 9시가 훌쩍 지나서야 확인하게 되었다. 괜히 SNS에 글이 쓰고 싶어 져서는 아이들 밥을 차려놓고 40분을 꼬박 집중한 탓이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치우고 정리하고 양치를 하는 사이, 나의 글도 그럭저럭 완료가 되어 발행 버튼을 누르려다 보게 된 시각이 수강 신청 시각을 넘긴 9시 24분.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내 인생의 새로고침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어라? 마감이 되었을 줄 알았던 강좌들이 죄다 미달이다. 넉넉하게 자리가 남아 있었다. 방학이라 그런가 생각하기보다는 기어이 신청하라는 누군가의 가호로 여겨졌다. 느긋하게 로그인을 하고 신청 버튼을 누를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에라 모르겠다며 눈을 감고 눌렀다. 눈을 감으면 나의 의지가 삭제라도 된다는 듯, 나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으면 실망도 없을 거라는 믿음에 기대었다. 되면 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그냥 해보기로 했다. 나의 뜻이라기보다 제삼자의 뜻에 맡기듯. 나를 구할지 말지, 이 게 나를 구하는 일인지 아닌지, 세상천지 만물을 만드신 당신이 알아서 해주세요... 라는 듯.
언제 마지막으로 입었는지 모를 수영복은 맞을는지 어떨는지, 낡았는지 말았는지, 쓸만한 수경은 있을지 없을지, 찾아볼 생각도 없었다.
이 날의 선택이 나에게 어떤 시간들을 안겨줄지 1도 모른 채 어찌 되겠거니, 했다.
수강 신청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을 했다. 알고 보니 강습 신청은 선착순이 아니라 추첨식이었다. 신청을 한다고 완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수영 강습의 운명을 마우스 클릭 한 번에 의지해야 한다는 건, 누구보다 빠른 클릭 실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 온라인 선착순 신청이라는 건 능력주의에 가려진 불평등의 결과라는 걸 인정한다는 듯, 공정이라는 가치를 차라리 컴퓨터에 맡겨 평등주의에 이바지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느껴졌다. 차라리 잘 됐다. 신에게 기대는 것보다 AI에게 맡기는 내 삶이 오히려 빚지지 않는 기분일 것 같다. 어쩐지 자리가 남아 있더라니. 3~4일의 신청 기간을 두고 한날 한 시에 추첨을 한댔다.
당첨이 되면 수영 에피소드를 계속 쓸 수 있는 것이고, 안 되면 이로써 끝. 다음을 기약하면 될 일이이었다. 덮어두자, 했다.
집에서 차로 2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 도착하면 무조건 엘리베이터 3층 버튼을 눌렀다. 10년을 내리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글을 깨치던 아이가 "엄마! 여기 수영장이야!"라고 말을 하길래 그제서야 수영장이 있다는 걸 보게 되었다. 진짜? 여기에 수영장이 있다고? 수영장이 있긴 한 걸까, 오래된 안내판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일말의 호기심 정도만 살짝 생길 뿐이었다. 도서관은 3층, 지하 1, 2층에 수영장이 있었다. "미술관옆 동물원" 같은 느낌으로 보자면 "도서관 아래 수영장" 정도의 꿈의 시설이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지하층을 누른 적이 없다. 물이 무섭기도 했거니와 수영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으로 수영장을 바라보는 일밖에 없을 거였기 때문이다.
동네에는 수영하는 친구, 지인들이 꽤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영장엘 다닌다. 3층 버튼만 주야장천 누르고 있을 동안, 내가 알던 그 아이는 전국체전을 누비는 선수가 됐고, 내가 알던 그 엄마는 수영 강사가 되었으며, 아들 친구는 100미터를 쉼 없이 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 수영 강습은 안 시키냐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요즘 어쩌고 지내냐는 안부 인사에 수영 다닌다는 인사로 답하는 지인들이 꽤 있다. 친구가 새벽반 중급 수영을 시작했다고 말한 지도 벌써 두어 달이 지났고, 난 여전히 수영할 생각이 없는 맥주병이었다.
운동을 해도 걷기 운동을 최고로 여기는 나는 굳이 수영장에 들어가 염소 섞인 물과 내 몸을 섞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수영을 배제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수영장 락스(염소) 냄새가 9할을 차지했다. 몸에 해로울 것 같다. 해롭지 않다고 하지만, 그 누군가의 말을 대충이라도 믿어볼 마음이 내겐 없었다.
둘째, 준비할 게 많(게 느껴진)다. 셋째, 샤워하고 옷 갈아입는 과정이 번거롭다. 넷째, 스치기만 해도 아는 얼굴인데 몸까지 노출하고 싶지 않다. 다섯째, 머릿결을 위해 보탤 일은 못할망정 더 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다. 해가 갈수록 내 머릿결이 소중하기만 하다. 여섯째, 물에 있다가 나오면 이상하게 배가 고프다, 살이 찐다. 일곱 번째, 배워도 써먹을 일이 딱히 없다. 여덟 번째, 새벽반이 그나마 가능한 시간인데, 내가 깨면 아들도 같이 깬다. 아홉 번째, 여러 사람들과 무언가를 배우고 싶지 않다. 부끄럽다. 열 번째, 가고 싶은 시간에 가고 오고 싶은 시간에 오며 배울 순 없을까, 한가한 생각부터 든다. 열한 번째, 그냥 자신이 없다(기보다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이유를 대라면 사춘기 딸 못지않게 늘어놓을 변명이 끝이 없다. 들어줄 사람 없는 변명 대기가 민망해지자 대충 컴퓨터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당첨이 되면 하는 거고, 하다가 힘들면 관두면 되는 거라고. 나의 심산이 그랬다.
내 인생의 새로고침 버튼은 품절이 풀리길 바라는 우주매물의 재입고를 바라듯 눌렀다. 가볍고도 의미없이, 다다다다다-
그러는 새 내 마음은 조금씩 수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