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볼 수 있지만, 모두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
"의미를 손에 쥐면 같은 현실을 다르게 살 수 있었다" - 최혜진, <에디토리얼 씽킹>
"저 갑자기 위시 다 구했어요!! 하늘색이 찰떡인 여쿨이라 천년의 위시템 신체키와 퓨전!!! 첨에 신체키 페리로 먼저 겟하고 좀 크다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잭슨이 딱!!! 꽉끈하면 패드 돌아다닐 걱정은 없지 싶어서 겟!!! 둘다 일괄판매였지만 갠차나요... 그리고 또 알람이 떠서 보니까 아니 퓨전??!!! 심지어 나의 정사이즈!!! 꺅 저에게 퓨전 잭슨을 보내주셔서 넘 감사해요. 어제 밤에 사이즈 커서 보관중이던 블랙참스까지 교환에 성공했어요. 이로써 전 참스 네이비 핑크 블랙 다 구했네요. 텅장이지만 마음은 따뜻하네요. 카페 최고에요. 못잃어... 하지만 한동안 진짜 쇼금할거에요. 팝시클 패들, 멜론 구해요..."
- 삐약이스위머님
"남자들이 모르는 외계어입니까? 팝시클, 참스 멜론?? 이건 노래?? ㅎㅎㅎ 암튼 축하드립니다."
수영장을 나서며 들여다보는 코디 카페의 글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아무래도 내 글쓰기의 추구미는 카페에 있는 게 아닐까. 글쓰기 에디터 제공 맞춤법 툴을 한 번 눌렀다가는 전체 빨간 줄이 쫙쫙 그어지는 건 기본이고, 퇴고에 진전이란 전혀 없을듯한 글이었다. 그럼에도 글맛이 남다르다는 점은 인정. 저 찰진 리듬감하며 글 솜씨에 넋이 나간 사이 웃음이 넋을 잃을 준비를 하며 다음 글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새로운 강사님이 오셨는데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손으로 머리를 넘기시는데 겨털이 수북; 거기에서 물이 뚝뚝.. 아흑.. 안본 눈 사고 싶어요."
"저도 강사님 겨털 보기 왜 이리 거북한지.. 자연스러운 거라지만 수영장에서 물에 젖은 겨털은 괜히 제 이빨에 낄 거 같은 느낌이고 뭔가 근지러워요."
"으악! 상상하게 되잖아요! ㅋㅋㅋ"
"수염 아저씨들 가끔 있으시던데, 가슴 매생이도 그렇고요. 저는 겨털 그냥 별 생각은 안 들어요."
"흔들리는 겨털 사이로 그대 샴푸 향이 느껴지나바요."
대댓글을 달아야만 할 것 같은 댓글을 보고 있자니 왜 때문에 나는 술술 읽고 있으며 나도 블랙참스 그 거 하나 위시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배운 적 없는 나라의 언어를 나도 모르게 술술 읽고 있다는 사실에 희번떡 놀랐다.
의미를 손에 쥔 자는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남들의 눈에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도 소중하게 만들어내는 기술이 여기 카페에 있구나 했다.
댓글 하나,
"하지만 점점 우주매물의 위시템이 생기실겁니다. 위시를 다 구했을 때 카페를 탈출해야 해요."
댓글 둘,
"저도 위시템 하나 구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시작일 뿐이었어요. 흑흑"
수영 생태계에도 우주 매물이라는 말이 있다. 출시 되자마자 단 1분 컷도 안 되어 품절이 되어 구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상품을 우주 매물이라 일컫는데, 준비된 수량이 모두 소진돼어 리스탁 되지 않는 이상 돈이 있다 한들 구하기 어려운 매물을 일컫는다. 건널 수 없는 우주로 갔다 이 말이다. 우주 매물을 얻게 된 자는 수영을 스멀스멀 하기만해도 엄청 잘 해 보이게 하는 후광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주 매물을 향한 강렬한 끌림과 고뇌, 열망, 얻기만 해도 우주로 향할 것만 같은 희열, 그리고 감사와 감동을 넘어서는 거래 후기 글이 또 하나 올라왔으니, 제목은 "[자랑샷] 진짜 미친 것 같아요 ㅋㅋ".
"저는 수영 한지는 좀 됐는데, 막 열정적으로 하는 스탈은 아니고 그냥 하루하루 좀 움직였구나, 하는 정도로만 뒷줄에서 물놀이하듯 하는 정도였어요. 당연히 수영복은 관심도 없었고요. 시작은 동생이 수영을 하는데 수모를 매일 다른 걸 끼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수영복도요. 너무 신기했죠. 왜 그런 짓을 하지?
근데 그때 어떤 수모가 인기가 많다면서 보여주는데... 이게 시작이었죠. 이미 씨가 말라버린 상태여서 구하긴 힘들고 눈은 돌아버렸죠.
돈이고 뭐고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구하고 나니 예쁘면서 귀한 게 저한테는 구매욕구를 더 자극시켜서 이제 물불 안가리게 되더라고요. 구할 때도 마구 두근두근하는데 다음 날 구한 걸 착용할 생각에 잠도 설칠 정도였어요. 완전히 미쳐가고 있었죠. 그러다보니 이 게 계속 계속 증식하는 거예요.
졸린 수모가 끝일 줄 알았는데 같이 수영하는 수친자가 제가 막 이것저것 착용하고 오니까 멋있다고 해주고 서로 관심사가 비슷하니 대화도 하면서 친해졌는데 어느 날 툭! 수모 하나를 선물로 던져주는데 허.. 졸린은 잘꾸민 멋쟁이 느낌이라면 클럽수모는 상남자 마초 느낌! 눈알이 한 번 더 돌아가버렸어요.
그 후 여러 개의 천년의 위시템들을 거치다가 마지막 2가지가 너무 구하기도 어렵고 아예 방법이 안 보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귀인을 만나게 됐는데, 그 중 하나가 스윔맥. 착용감부터 세상 간지가 저 세상 간지였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솔직히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건 뭐 한정판은 둘째치고 시간도 너무 지난 제품이라 19년에 글 올렸던 분께 연락도 해보고 간절하게 감정 호소도 해보고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쉽지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빨간색 아레나 마크가 돋보이는 애덤피티 수모! 가장 심장이 두근거렸던 순간이었습니다.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집으로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온통 수모 생각뿐이었어요.
세상에는 정말 좋은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 거래를 하면서 느낀 점은 배려도 많이 해주시고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 많았습니다. 판매자나 교환하시는 분들 모두 스스로에게 너무 귀한 물건이고 아끼는 물건일텐데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고 좋아해주는 마음이 감사하고 또 감동이더라고요. 사실 수모가 이렇게 많을 필요는 없죠. 제가 이렇게 된 계기는 매일 가는 수영이 조금 더 행복하더라고요. 신나고 두근거리고 많은 감정을 느껴요. 제 개인적인 자랑글이지만, 이런 행복함을 느끼게 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 인사 드리고 싶었습니다." - 조쿤님
우주 매물을 향한 갈증을 누구보다 세심하게 다룬 이 글 하나로 득템의 노하우를 전수 받은 나는 감정에 호소! 오케이. 오래된 글의 작성자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오케이. 꿈에서도 위시를 갖고야 말겠다는 의지! 오케이. 한자 한자 받아적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 천년의 위시템 하나 얻어보고 싶다는 로망을 키우고 있었다.
수모를 예로 든 이야기지만, 수영복 또한 같은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증식한다. 나 또한 그랬다. 인기가 많다는 수영복을 하나 둘 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취향의 물옷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게 시작인 줄을 그 때는 모른다. 내 눈에 예뻐 보이면 다수의 눈에도 좋아보이기 마련이고, 백이면 백 우주매물이 되어있다. 이 수영복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원이 없겠고, 이 수영복을 입는 순간 이미 고급반이 된 나를 상상하기에 이르며,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가 되어 갈수록 매물은 점점 더 귀하게 느껴진다. 어려울수록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명품 마케팅에 버금가는 심리적 희소가치에 대한 열망, 이래서 수영복 증식이 무섭다는 걸 알지만 이미 내 눈에 명품이 되어버린 수영복에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어떻게 구할까, 카페를 들락거리며 키워드 등록도 해보고, 같은 수영복을 구하는 글 하나에 좌절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어느 날엔 정수윤의 글 <물고기가 되는 시간> 을 읽다가 빨래줄에 널린 작가의 수영복과 수경과 수모를 보게 되었다. 수모는 졸린을 쓰고, 수경은 뷰, 수영복은 역시 졸린에 무려 피크닉스! 나.. 왜 다 알지? 왜 다 알아? 하다가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빨랫줄에 널린 이 피크닉스라는 수영복을 보자마자 너무 내 취향이라며. 하나 얻을 수 없을까, 당장 검색창을 열고 있다. 무려 출시한지 6년도 더 된 상품.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보관만으로 삭았을 확률 99프로. 그럼에도 하나 겟하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진해져 가고. 오~ 피크닉스!! 하다가 이 사진을 표지로 썼어도 책이 더 잘 팔리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좀 하다가 그보다는 이 사진을 메인으로한 수영 에세이 하나 읽고 싶다 생각하며 3층 도서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아, 읽고 싶다. 수영 이야기를. 이 한 장의 수영복과 이 한 장의 사진 같은 글을.
그림자가 뚱뚱하고 진해지는 시간 오후 2시, 숨이 턱 막힐 것 같아 틀어둔 선풍기 바람을 비집고 살랑 불어오는 하늬 바람에 널어둔 수영복까지 살랑 살랑 춤을 춘다. 개학일랑 아직 멀었고, 집에서 뒹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시간. 수영을 하기만 했는데 에너지가 솟고 뭐라도 할 수 있게 변해서 원더 우먼이 되는 이야기. 수영을 하고 오기만 하면 빵이 뚝딱 만들어지고, 수영을 하고 오기만 하면 글이 뚝딱 써지고, 수영을 하고 오기만 했는데 그림이 뚝딱 그려지는 이야기. 뭐라도 해내는 이야기. 책만 읽어서는 글이 되지 않듯 딱 그런 시간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졌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모두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가 하염없이 고팠다.
그렇게 수영 이야기도 천년의 위시템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