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걸 이겨내는 게 방법
그냥.. 성격이 팔자다. - 곽아람 <쓰는 직업>
"그럼 엄마도 게임해~"
저녁 식사 후, 두런두런 과일을 먹고 있으려니 남편이고 아이들이고 한 손에는 과일을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선 각자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우~ 진짜 가관이다, 가관이야~"
나의 말에 딸아이가 답을 했다.
"그럼 엄마도 게임해~"
"그럴까?"
눈을 번뜩이며 말을 하자, 남편이 껴들었다.
"안 돼~! 엄마 게임하면 클나!"
"왜?"
"엄마가 게임하면 진짜 게임만 해."
"그래서?"
"게임 말고 아무것도 안 해..."
게임을 좋아했다. 좋아했다기보다 게임이 유행하던 세대의 복판을 지났다. 3D 테트리스와 갤러그, 페르시안 왕자를 즐기던 어린 시절을 지나 대학엘 갔더니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를 주축으로 하는 각종 배틀 게임 및 RPG의 세상이 펼쳐졌다. 우후죽순 생겨나던 PC방의 콜라보로 밥 먹고 하는 일이 게임이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게임 속에서 들으며 연애했다. 한여름의 휴가는 얼음산 가득한 화이트혼의 어느 성 절벽 위에서 즐겼다. 단순노동의 재미는 밀려오는 히드라 인해 전술로 느꼈고, 스릴은 던전의 몹을 잡으며 만끽했다. 소속감과 동료애는 간헐적 공성전이면 충분했다.
"공부도 그런 식으로 했어요?! 연애도 그런 식으로 하고? 뭐든 그런 식으로, 맞죠."
J는 '그런 식'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는 듯, 반복해서 말했다. '그런 식'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양손을 경주마의 곁눈 가리개처럼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그러고 보니 또 수영만 팠구나, 아주 그냥 레벨 업하듯 했네 했어.
단 두 달만 다녀보자던 수영장에 열두 달째 다니고 있었다. '나를 레벨 업 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성격이 인생이라더니, 내 성격이 그런 줄을 최근에야 깨닫는 중이다.
애니메이션 <나 혼자만 레벨 업>을 좋아한다. E급 성진우가 퀘스트를 깰 때마다 얼굴과 몸, 능력치가 달라지는 걸 보면서 나도 덩달아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만 같았다. RPG 게임 속 캐릭터를 함께 키우는 기분이었다. 몇 년을 게임에 빠져 지내본 나로서는 이왕 게임을 할 거라면 이제는 가상의 캐릭터 말고 현실의 나를 레벨 업 하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수영하는 J를 만났다.
레벨이 제로인 수영이라면? 레벨 업하는 맛이 제대로겠다 싶었다. 신개념 게임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재밌겠다! 신이 났다. 게임하듯 일상을 산다면 이보다 재밌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퀘스트와 아이템과 레벨 업을 현실에서 해보자며 수영장으로 향했다. 딱 두 달만 해보자던 것이 2년을 가볍게 넘기게 될 줄은 이때는 몰랐다.
퀘스트 1. 물에 뜨기, 일단 뜨기
퀘스트 2. 킥판 발차기
퀘스트 3. 옆으로 호흡하기
퀘스트 4. 팔 돌리기
퀘스트 5. 25미터 자유형
퀘스트 6. 누워 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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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71. 자유형 1킬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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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93. 접영 50미터
나 혼자만의 레벨업을 시작했다. 물이 던진 수수께끼를 풀듯 내가 나에게 던지는 퀘스트가 자꾸 생겨났다. 퀘스트 하나를 깬다는 건, 내가 '나를' 이기는 기분이었다. 나를 넘어설 때 느끼는 쾌감이 다음 퀘스트를 불렀다. 경험치가 쌓였다. 유연성이 늘고, 체력이 늘었으며, 어깨와 팔의 근력이 늘었다. 나라는 캐릭터의 스탯이 한꺼번에 상승하는 기분에 취했다. 이 모든 게 퀘스트 클리어의 횟수, 도전적 과제의 클리어, 수영한 시간과 강습 이력에 비례했다. 점점 수영이라는 게임에 빠져들었다.
가끔 도전적 과제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킥을 아래로 차지 말고 뒤로 차요."
"엉덩이가 꿀렁하는 거 느껴져요?"
"몸이 왼쪽으로 기울죠?"
"풀을 찌를 때 물아래로 찌르지 말고 물 위로 찔러요."
"킥을 찬 다음 몸에 힘을 풀지 말고 버텨요. 그대로"
"평영에도 접영처럼 웨이브가 있긴 한데 웨이브가 너무 커요. 너무 깊게 들어가."
일주일이면 풀리곤 했던 퀘스트가 한 달이라는 시간으로도 풀 수 없는 순간들을 만났다. 한 번 들었던 지적을 계속 들었다. 평영만 하면 지적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 써야 할지 어질어질했고, 왜 들었던 지적을 자꾸 듣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스멀스멀 수태기가 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더 노력하면 고쳐질 거 같긴 해요."
강습 말미에 강사님이 응원하듯 말을 해주셨지만 과연 고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늘의 퀘스트를 적고 내가 해낸 만큼의 점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수영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뜻밖에 오려던 수태기를 막아주었다. 안 풀리는 문제를 공책에 쓰기만 했는데 답이 떠올랐다. 물속에선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물밖에 나와 골똘히 적어냈더니 지적받던 문제들이 일기장 안에서 풀이가 됐다.
타고난 걸 이기는 게 방법이라더니 가동되지 않는 나의 유연성을 보완해 줄 방법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평영 발차기가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뭐야? 하소연하듯 썼더니 타고난 내 고관절 가동성에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고 싶은 가동성에 가닿으려면 우선 종아리 바깥 근육을 키워야겠더라. 일기장에 묻고 일기장에서 답을 찾는 식이 되풀이됐다. 킥을 차고 물을 끝까지 짜줄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내가 키운 근육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잖아. 내가 쓰고 내가 답하는 식이었다. 언젠간 쌓여 있을 종아리 바깥 근육을 위해 매일같이 평영킥을 찼다. 그리고 딱 석 달이 지날즈음 달라졌다. 킥이 달라졌고, 50미터 평영이 30초가 줄었다.
따지고 보면 수영은 단순 반복 활동이다. 정해진 동작을 익혀 반복한다. 이렇게 간단한 동작을 매일 반복하면 천재가 되지 싶은데 물이라는 물성을 더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오리발을 신고 상급 회원을 따라가는 속도는 1'20/100m. 초당으로 치면 1미터 25센티를 지나는 속도다. 여기에 공기 밀도 800배에 달하는 물의 밀도를 고려하면 1.25미터를 800배로 곱해 나오는 값 1,000미터의 속도와 버금간다. 딱 초당 10킬로미터의 바람과 맞먹는 저항이다. 오픈카 뚜껑을 열고 100킬로미터로 달렸을 때 만들어지는 머리카락의 세팅력과 얼굴의 얼얼함 정도를 상상하면 된다. 초당 10킬로미터로 부는 눈바람을 정으로 맞으며 종아리 각도를 45도로 비스듬히 뉘어야 겨우 걸을 수 있는 저항감이다.
저항은 몸집에 따라서도 다르다. 물과 만나는 대면의 면적이 적을수록 저항은 작아지고 넓을수록 높다. 어깨너비가 넓을수록 저항은 높아지고 넓어진 어깨만큼 높은 근력으로 세게 밀어내야 물을 타고 넘을 수 있다. 어깨가 좁으면 좁아진 만큼 저항을 덜 느끼지만, 좁아진 어깨만큼 근력은 반비례하기에 딱 자신의 체구정도를 물에 태운다고 보면 된다. 어깨는 넓고 근력은 하찮은 내가 보통 체격의 J보다 느린 이유를 쉬 깨달을 수 있다.
물을 이해하면 내 몸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생긴다. 겹겹이 쌓인 밀푀유를 뚫고 지나간다 생각하면 쉽다. 겹겹이 쌓인 천 개의 이불속을 최대한 쉽게 빠져나가려면 내 몸을 최대한 가늘고 뾰족하게 만들기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떠올릴 수가 있다. 최대한 수면과 수평하게 지나가야 한다. 내 몸이 수평이 되지 않고는 수월하게 나아갈 수가 없다. 팔을 최대한 머리 위로 뻗어 뾰족하게 만든다. 그리고 기다란 막대가 되었다 생각한다. 흐물흐물해서는 천 개의 밀푀유를 빠르게 지나가기가 어려우니까.
성격이 인생이라더니, 그야말로 성격처럼 수영을 했다. 아이템 빨은 수경과 수영복이 맡아서 해줬고, 레벨 업은 워치가 알아서 했다. 퀘스트 101번쯤을 지나고 있는 지금, 도장 깨기를 좋아하는 나의 기본 스탯에 물이라는 경험치까지 더해져 일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으며, 근지구력은 물론, 의지력과 정신력 수치가 급상승했다. 우연한 기회로 항마력까지 올렸으니 이만하면 수영 좀 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기 평가에 꽤나 후한 편 - 뭐든 좋아하는 것으로부터가 맞다. 그리고, 좋아하는 건 성격 탓이 크다.)
거기에 더해 연타를 치면 내 것이 된다. 확실한 나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 중 흔하게 쓰이는 것이 연타를 치는 것. 한 번의 타격으로 흠집을 내고 쉴 틈 없이 바로 내질러 빠그작 부러뜨리는 것이다. 근육을 만드는 원리가 이것과 같은데, 수영에서도 같다. 연타를 치면 내 것이 된다. 수경 자국이 주름으로 남는 것처럼.
수영에는 인터벌 훈련이 있다. 1분 사이클 인터벌은 1분이 지날 때마다 출발하는 것인데, 한 바퀴를 1분 내 돌았다면 1분이 될 때까지 쉬었다가 바로 출발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54초에 한 바퀴를 돌았다면 60초가 될 때까지 쉬었다가 바로 출발한다. 만약 1분 내 들어오지 못했다면 사이클 시간을 조금 늘린다. 거꾸로 휴식시간이 10초 이상을 넘는다면 사이클 타임을 줄인다. 중요한 것은 쉬는 시간을 되도록 짧게 갖는 것. 내 몸에 연타를 치는 거다.
1분에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숨을 좀 내쉬고 싶어 지는데 1분이 되자마자 다시 출발한다. 두 바퀴를 돌고 나면 더 이상 돌 힘이 없을 것 같지만 다시 한번 출발한다. 연타를 친다. 내 몸의 온 근육들이 비명을 지를 수 있게 흠집을 단단히 내준다. 그러고는 마지막 바퀴를 돌아 뽀그작! 제대로 타격을 입혀 새로운 근육이 생겨나게 한다. 이전보다 더 단단한! 완전한 나의 것을 만들어낸다. 호흡도 근육과 같아서 덩달아 얻을 수 있다.
"이제 운동 좀 해도 되지 않을까요?"
상급반이 되었다. 상급반이 되면 운동을 하는 건가 보다 했다. 운동을 어떤 수준으로 하기에 운동을 하자는 건지 아리 송송했다.
난이도를 x축으로 놓고 실력을 y축으로 논 그래프에서 난이도와 실력이 xy 축을 빳빳하게 가르며 45도 각도로 뻗어 나갈 때 '재미'라는 것을 느낀다고 김정운 박사는 말했다.
반면, 실력이 난이도를 이겨 그래프가 y축과 가까워질수록 '지루함'을 느끼고, 실력에 비해 난이도가 턱없이 높아 그려지는 그래프가 x축에 가까워질수록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지루함과 불안을 다스리는 팁으로 아주 그만이었다.
수영을 시작할 즈음 일상의 지루함을 느끼던 나에겐 난도가 높은 과제가 필요했던 거였고, 아이의 불행으로 불안을 느꼈던 난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난도가 높았던 거였다.
같은 의미로, 사람들은 재미있으려고 난이도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집안일 같은 것들. 난이도를 높이지 않아도 될 것들에 조금은 더 복잡한 과정을 부여함으로 재미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다. '재미'를 위해 수고스러우려는 마음이다.
선수를 할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줄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열심일 이유가 없는데, 열심이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한다고 저기 저 앞에선 1번만큼 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스스로는 굉장히 잘하는 것 같지만 막상 영상으로 찍으면 좌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거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오늘도 수영장으로 향하는 나를 보면 어이가 없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일이 '나 혼자만 레벨 업'의 성진우 뺨치게 재밌다.
이만큼의 시간을 할애할 만큼의 일인가 싶은데 이미 하고 있는 일, 잘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해보니 좋아서 계속하게 되는 일, 더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해도 잘해보려는 나의 아등바등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신이 나서 계속한다. 취미이고 취향이며 즐거움이다.
분명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4일 만에 원상태로 되돌아와 버리는 신비로운 제로섬 게임. 이래서 수영에 완성이란 없다던데.. 접배평자를 다 배웠으면 된 거 아니냐고 어째서 계속 강습을 받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지만, 배워보시면 알아요,라고 답할밖에 꺼내 쓸 다른 답이 없다.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오곤 하는 이 수영의 굴레를 끊임없이 돌 것만 같다. 나의 퀘스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