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인의 추구미

사워도우 오븐과 컷아웃 블랙

by 반짝이는먼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오븐 뭐 써요?"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던 질문이었단 걸, 질문에 답을 하고서야 깨달았다.

사워도우를 선물했더니 빵이 맛있다고 했다. 당장 팔아도 될 만큼 퀄리티가 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슨 오븐을 쓰는지 물어왔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말이었다.


"그 집에 있는 윙~ 돌아가는 그 오븐요?"

"응!"



사워도우 만들기에 빠지게 되는 지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사워도우스타터(일명 르방)라는 천연발효종을 키우는 재미에 빠질 때가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수분을 머금은 빵 반죽이 발효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내는 기포로 인해 부풀어 오르는 현상, 즉 오븐스프링을 만들어내는 지점이다. 세 번째는 다 구워진 사워도우를 한숨 식혀 반으로 잘랐을 때 기공이 그려내는 내공을 확인하는 순간인데, 그 찰나의 떨림이 어찌나 짜릿한지 다음 빵에 쓸 발효종을 벌써 키우게 된다.


세 가지 지점의 공통점을 찾자면, 모두 고비 같은 구간이다. 실패를 자주 하고, 포기가 수시로 마려워지는 구간이다.


여기서, 두 번째 재미인 오븐스프링을 알아갈 때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븐 탓을 했다. 이런 오븐으로는 오븐스프링이 새끼손가락 정도만 터져도 잘한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광파 오븐으로 사워도우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장비 탓 없는 장인을 꿈꾸었다. 해내고 싶다는 작은 똥고집. 이 지점이 나에겐 재미가 되었다. 마카롱 꼬끄를 굽기엔 만만찮다는 가스오븐으로 기어이 삐에를 꽃피우고야 말았던 기억으로 사워도우 오븐스프링을 광파오븐으로 보고야 말겠다 고집을 부렸다. 끝없이 구워댔다.


결국엔 광파오븐이 그걸 해줬다. 오븐 스프링을 빵 뚜껑이 열리듯 0도에서 90도 지점까지 활짝 열어줬다. 십 년 전 아파트로 입주하면서 옵션으로 만났던 흔하디 흔한 광파오븐이었다. 33리터에 전자레인지 겸용으로 안에는 동그란 원형 판이 빙글빙글 회전을 하고 그릴 기능까지 겸한 2010년식 모델이었다. 이 광파오븐이 나의 모든 사워도우를 구웠다.


사워도우 500개는 족히 만들었을 나의 오븐과 동고동락 사투를 벌이며 나의 빵에 맞는 온도와 습도, 시간을 알아낼 때마다 기뻤다. <나 혼자만 레벨업>에서 E급의 성진우가 레벨업을 하듯 제빵 기술이 나날이 좋아졌다. 언젠가 내가 선물해 준 사워도우를 맛본 이가 오븐은 뭘 쓰는지 물어본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희한한 지점에 희열을 느끼며 굽고 또 구웠다.



같은 의미로, 수영을 할 때도 그러고 싶었다. 기능성에는 1도 도움이 될 수 없는 밋밋한 수영복을 입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수영을 하고 싶다. "어떻게 배웠어요?"라는 질문에 "이 슴슴한 수영복을 입고요."라고 답하고 싶다.



수영장에는 시선을 끄는 3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수영하는 자세, 둘째는 수영할 때의 속도 혹은 체력, 셋째는 수영할 때의 리듬이다.


화려한 수영복, 혹은 수려한 몸매가 시선을 끌 것 같지만 의외로 수영복은 그리 눈에 띄는 요소가 아니다. 특이한 수모 정도는 눈에 띌 만 하나 보통은 수영하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다. 수영장에 모인 수영인들 대부분이 오늘도 1밀리미터만큼 수영을 더 잘하고 싶어서 오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수영할 때의 자세와 속도, 리듬감을 갖추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검정나이키수모님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자유형을 막 마치고 레인 끝에 서 있으려던 참이었다. 내 앞에 수웅~ 퐁 수웅~ 퐁 굉장한 리듬감으로 한 마리 물개처럼 들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근래 보기 드문 평영러였다. 수웅~ 퐁! 고요한 수면 위로 엄청난 부력을 타고 올라 부웅~ 떠올랐다가 퐁! 사라진다. 다시 고요해진 수면 위로 부웅 떠올랐다가 퐁! 사라졌다. 빠르다. 내 시선이 그녀를 좇으며 한참을 따라갔다. 시선 따라 절로 타게 되는 그녀의 리듬에 내 머릿속도 리듬을 탔다. 남이 수영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게 실례가 되는 걸 알기에 끝까지 훔쳐봤다. 수영하는 리듬이 좋으면 절로 가는 눈길을 끊을 수가 없다.


다음 날, 자유형을 막 마치고 레인 끝에 서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레인 끝을 향해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두 팔을 쭉쭉 펴며 교차한다. 배영이다! 흔한 배영이 아니다. 역시 리듬이 있다. 초읍촵 초읍촵. 와우. 도착하고 보니 검정나이키수모님이었다. 평영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배영은 신이다 신.


좇을 일이 없어진 내 눈길이 방황을 하다 그녀의 수영복으로 옮겨갔다. 5부 검정 슈트. 수영복으로만 보자면 초보 느낌이다. 수영을 좀 했다 싶은 사람들은 대게 끈으로만 이어진 싱글 스트랩을 입거나 긴 수영복이라면 차라리 9부 수영복을 입는 게 보통인데, 이런 실력을 가진 그녀의 수영복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건 당연했다. 반전은 수영 실력이 좋으니 수영복까지 좋아 보였다.



흔하디 흔한 광파오븐으로 오븐스프링을 꽃피우는 사워도우의 맛처럼, 수영실력이 늘어도 수영복은 소박하게 입겠노라 생각했다. 소박한 수영복 속에 피어나는 수영 실력이란 얼마나 멋질까. 상상만으로 흡족했다. 잡다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수영만 하겠다는 마음가짐. 그 게 나의 추구미였다.



그랬던 내가 수영복을 하나 둘 사기 시작했다. 초보 수영복으로 버티겠다던 난 온데간데없고 하나를 입었다가 중고로 팔았다가 다시 사고 입고 팔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구나 빠지게 되는 수영복이 실력을 키워주리라는 착각의 늪을 건너고 있었다. 이 수영복이라면 나를 평영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 같고, 이 수영복이라면 내 팔 꺾기가 더 우아해 보일 것 같은 ‘수영복=수영실력’의 시기를 지났다.


남들은 한 번쯤 입어본다는 수영복들을 하나 둘 거치며 왜 브랜드마다 선호도가 다른지 알게 됐고 우주 매물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절로 공부하게 됐다. 유행은 타지만 타지 않는 수영복과 중고 거래가 잘 되는 매물의 특징도 알게 되었다.


수영복을 오래 입다 보면 수영복이 금방 늘어나는 것이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입을 수 있는 수영복을 찾게 된다. 그러다 만나게 되는 것이 탄탄이 수영복. 폴리에스터 100% 로, 소재 특성상 잘 늘어나지 않아서 뻑뻑한 느낌을 주지만 익숙해지면 늘어나지 않아 꽤 오랫동안 처음 느낌 그대로 입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탄탄이 수영복을 찾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는 브랜드가 생기고 잘 늘어나는 수영복은 점점 잊힌다. 잘 늘어나는 수영복은 6개월이면 보통 수명을 다했다 여겨 중고 거래도 잘 되지 않는다. 탄탄이 수영복은 10회 미만의 입수품이라면 거의 새 상품 컨디션에 견줄 만 하기에 거의 새 상품 가격에도 거래가 쉽다.



수영복도 엄연한 의류의 영역인지라, 나의 체형을 최대한 커버해 주고 나의 퍼스널 컬러가 고려된 수영복을 입는다면 수영을 하는 데 뽕 같은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음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결국엔 슴슴한 수영복으로 다시 돌아오곤 하는 건 수영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수영인으로의 추구미를 굳이 굳이 묻는 이가 있다면 나이키 컷아웃 블랙을 슴슴하게 입고 깔끔하고 빠르게 휘젓고 휘 사라지는 수영인의 모습을 말하겠다. "어떻게 그렇게 수영을 하게 됐느냐는 물음에 "이 검정 고무신 같은 수영복 입고요."라고 답할 것이다.



소박하게 생긴 가게에서 소박하게 나온 쌀국수를 보다가 한 입 먹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는 그 맛처럼 말이다. 기대 없이 들어간 가게에서 잊지 못할 맛을 선물 받는 느낌처럼. 내 삶의 추구미처럼. 슴슴하게 생겨서 별맛 있겠나 싶은 나의 사워도우처럼. 대박 없이 사는 인생, 소소한 잔재미로 챙챙챙 살아가는 삶이라면 꽤나 맛 좋지 않을까.



요즘 새로 더해진 추구미가 있다. 실험하는 수영인. 이를테면, 50미터 수영레인을 네 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필요한 기량과 기술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내가 부족한 게 무엇인지 나누어 생각할 줄 아는 수영인이 되고 싶다. 무작정 돌고 보는 게 아니라, 내 어깨의 유연성과 가동성, 내가 가진 조건에 따라 적절한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수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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