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 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오만가지 썰생각과 밀생각이 오고 가는 사이, 수영장은 날 당첨시켰다. 수영 강습 당첨 발표를 기다리던 시각, 아.. 당첨이 되면 어떡하지? 물에 들어갈 수는 있을까? 새벽에 일어날 순 있나? 수영을 배운다고? 괜히 신청했나.. 아, 몰라. 김칫국을 마셨다 뱉었다 했다. 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야. 안 되면 엄청 서운할 것 같은데, 된다 한들 산뜻하지도 않을 것 같다. 오만가지 썰생각과 밀생각이 오고 가는 사이, 수영장은 날 당첨시켰다.
"나 당첨 돼 부러쒀."
"어 진짜?! 드디어 하는 거야? 오오오~ 수영복은?"
"그냥 입던 거 입으려고."
입던 거 입는다고? 요즘 수영복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라며 진선은 나의 수영복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의는 반바지 형태의 2부로 하고, 음.. 겨털 관리 필요 없게 이릉거, 이릉거 해! 라며 보여주는 수영복은 쇄골이며 어깨며 싹 다 가려주는 반팔 상의에 가슴골부터 목까지 지퍼로 간단하게 올려 입는 (당시 내 생각으론) 상당히 진화된 올인원 슈트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겨털 관리조차 안 할 생각이었다는 게 놀람 포인트다.
게다가 까만색. 무늬가 없어 섭섭할까 봐 얇은 하얀색 라인이 옆구리에 한 줄씩 들어간 상당히 그림자스러운 수영복이었다. 먼지처럼 살고픈 나에게 딱이었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무리 중의 무리 역할에 손색이 없을 수영복이었다. 덕분에 완벽한 그림자가 되었다고 착각하며 며칠을 다녔다.
주문한 수영복이 하루 만에 도착했다. 민망해서 입어볼 생각이 1도 안 들었지만, 막상 입으니 신경 쓰이던 부유방도, Y 존도 모두 커버 가능한 수영복이었다. 아늑했다. 흡사 그림자가 된 기분. 아무도 날 볼 일이 없으며, 일어나 춤을 춘들 조명이 꺼진 그림자 속은 시선 갈 일 없는 진회색의 민무늬 벽지 같았다. 내 몸도 덩달아 얇아진 기분이었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수영복 하나 입었을 뿐인데 그림자 수영복을 입은 나는 마음까지 느긋해졌다.
수영복도 옷의 기능을 하는 것이어서 많은 의지가 되었다. 돌아보면 새로 사 입은 티가 팍팍 나는 수영복이었지만, 당시 내 눈엔 새로 사 입었다는 요란함은 1도 없는 점잖은 수영복이었다. 누가 봐도 왕초보의 수영복을 입고 왕초보처럼 보이진 않겠구나, 안심했다. 시작하는 마음이 그랬다.
수영복을 입는 횟수가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수영복의 또 다른 용도를 알게 됐다. 수영 실력을 알려주는 모종의 딱지라는 점. 모두들 본인의 수영에 집중하느라 아무도 남의 부유방 따위 관심 둘 겨를이 없으며, 중급에서 상급으로 갈수록 수영복은 화려해지기 마련이고 나 이렇게 수영할 정도가 됐어요~ 물이 이렇게나 좋답니다~라는 환희와 기쁨을 수영복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스스로를 위한 상처럼.
수영복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자면, 자신보다 남을 의식하는 그림자 수영복이야말로 '초보 수영' 딱지를 단 것과 다름 아니다. 그림자 수영복으로 위안을 삼는 게 '초보 운전' 딱지만큼이나 위안이 된다면 안전 수영을 위해 나쁘지만은 않다. 다만, 어서 '초보 운전' 딱지를 떼고 스스로 안전 운전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그림자 수영복을 벗어던질 날을 고대하게 될 뿐.
새로 산 수영복에 하자는 없는지, 물을 먹으면 어떤 상태가 될지 궁금하던 차에 회원증도 발급받을 겸 수영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수영 가방엔 뭘 챙길까. 준비해 둔 메시 가방을 들었다. 수영복, 가슴 패드, 수모, 수경, 보디워시, 클렌징 폼, 샤워타월, 치약, 칫솔, 샴푸, 수건, 속옷, 스킨케어, 머리빗(개인 머리빗을 쓰고 싶어서). 중급 이상이 되면 오리발도 챙기고 골전도 이어폰 같은 것도 챙기던데, 굳이 필요한 날이 올까 싶다. (고 생각했으나, 정확히 5개월 뒤 오리발과 골전도 이어폰까지 챙기는 수영인이 되었다.)
수영장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회원증을 발급받았다. 우와. 반질반질한 새 거다. 이름도 써준다. 카드 모양의 회원증을 적외선 구멍에 바코드 찍듯 갖다 대니 띡 소리가 났다. 락커키를 받고 여성 탈의실로 향했다.
가만가만. 옷은 언제 벗고, 샤워를 하는 사이 수영복은 어디다 두며, 수영복을 갈아입은 다음 소지품은 어디다 둬야 하는 걸까. 락커까지 물을 흘리며 오락가락할 수는 없을 텐데 샤워장에서 수영장은 어디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지? 동선에 혼돈이 왔다.
샤워장은 눈앞에 보였고, 수영장은 어떻게 들어가는지 확인을 먼저 하는 게 옳았다. 간단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락커에 둘 물건들과 꼭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물품들을 나눴다. 락커에는 신발과 핸드폰, 차 키를 두고 입었던 옷과 모자까지 홀랑 벗어두고 샤워 용품이 든 수영가방을 달랑 들고 입장한다. 알뜨랑 비누가 알뜰하게 놓여 있는 샤워장에서 알뜰하지 않게 샤워를 하고 수영복으로 환복 한다. 사이즈가 넉넉했는지 쑥 들어갔다. 알뜰한 사이즈로 샀어야 했나 잠시 생각했다. 수모도 꼼꼼하게 쓴다. 수경을 수모 위에 얹고, 가지고 있던 수영 가방은 샤워실 옆에 구비된 간이 선반에 두고 간단한 몸풀기 체조를 한 뒤 수영장으로 입장.
여자 샤워장을 내려가다 보면 전면 거울이 있는데 잊어버린 건 없는지 마지막 체크를 할 수 있다. 잘할 거라는 미소도 잊지 않고 날려준다. (츄~) 가리고 싶은 자신 없는 곳까지 완벽하게 가렸으니 부끄러움 따윈 없다. 전면 거울을 지나 수영장 문을 열었다. 사아아악-
무더운 여름에 길을 걷다 마주친 편의점 문을 연 것처럼 다른 밀도의 공기가 차가운 분무를 친 듯 스왁 밀려 들어왔다. 50미터 레인이 10개가 쭈우욱 늘어서있는데 웅장하다 못해 올림픽 경기라도 뛸 것처럼 심장이 벌렁이기 시작했다. 3층 높이 천정에서 비추는 조명이 어둑한 저녁, 한창 무르익은 6회 말 경기를 보러 들른 야구장의 그것처럼 열띤 분위기를 만들었다. 눈으로 맞이하는 광경도 광경이지만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듯했다. 수증기 머금은 공기는 싱그럽기도 하고 은은한 비누향 때문인지 목욕탕스러워서 웃음이 살짝 났는데 레인을 따라 부지런히 물거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는 사이 사악 사라졌다.
발끝에 물이 닿자, 처음인 것처럼 낯설었다. 차가운 기운이 몸을 적시자 이제 내가 하려는 게 뭔지 실감이 났다. 나만을 위해 시간을 쓸 거라고? 갑자기 대단한 일을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곧 나를 위한 시간이 올 거라 생각하니 물의 감촉이 손끝에서 팔로, 팔에서 다리까지 이어졌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그래야 한다는 듯 숭덩숭덩 파고들었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갖 나무들의 피톤치드를 방울방울 들이마시듯 가닥가닥 내 몸을 가르는 물살이 구석구석 핥으며 지나갔다. 물이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다리에 닿고 팔뚝에 닿았을 뿐인데 나에게 뭔가를 하라고 자꾸 시키는 것만 같다. 절로 팔이 움직인다. 팔과 다리 사이로 오가는 물살이 부드럽고 시원했다. 새벽 수영장이 이런 느낌이구나! 처음이었다. 싱그럽고 차가웠으며 두근대다가 울렁거렸고 휘청거리다 울컥했다. 꼬르륵..
수영장 물에 걷기만 했는데 다른 나를 만난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던 지난 계절의 싱거움을 벗어나 맛있는 계절이 올 것만 같다.
학원에 보내놓기만 했는데 시간의 보폭을 따라 달라지는 아이의 피아노 실력처럼, 출석만 하면 달라질 나의 수영 실력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수영 실력보다도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오래전 겪었던 것 같은 낡은 듯 단정한 기대감에 나를 맡겨보기로 했다. 단 두 달만 해보기로 했던 것이 2년을 넘게 될 줄 이 때는 몰랐다.
배운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무력감에 시달려 넌덜머리가 나던 참이었어요.
날 밀어붙여 보고 싶었죠.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
지루한 일상뿐인 사람 말고요.
많은 걸 이루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길을 잘못 들었고
돌아갈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이젠 너무 늦어버린 것 같고요.
현실이에요."
영화 <happiness for beginners>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