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우선순위

마음에 물어 한 일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by 반짝이는먼지

내게 중요한 것은 전부 수영장에 있었다. 내가 신뢰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 살면서 그럭저럭 기분이 괜찮았던 순간들은 전부 수영장에 있었고, 그곳은 내가 누군가의 딸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 리디아 유크나비치, <물의 연대기>






"아무리 핀데이라지만, 2700 실화야?"

"그치, 밥 먹을 힘도 없어. 탈탈 털렸어."

"그래도 개운하긴 하지 않아? 그지~."

오늘도 수영 강습을 무사히 마친 수친자들의 샤워실 현장.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른 텐션에 하하 호호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몸을 그렇게 혹사를 시켰는데 얼굴은 왜 때문에 더 충만해질 수 있는지 아이러니하다며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이 개운함을 어떻게 잃냐며 내일도 봐야지 별 수 없다며 인사를 했다. 수영 가방과 오리발까지 챙기고 들여다보는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있었다. 학교다!






일상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바뀌어 있었다. 독감에 걸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도 아이의 밥은 차려놓고 몸 져 누울 정도로 모든 일의 최우선이 '아이'던 시절이 있었다.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 그 하루는 몽땅 아이를 위해 썼다. 그 시절엔 우선의 시비를 따로 가려본 적이 없다.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과 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해야 할 일이 되어 버린 일 사이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하는가, 무엇에 최선을 다하는가를 따져 보는 일. 무엇을 앞에 두어야 잘 살아지는 건지 따져볼 새가 없었다. 우선순위의 조절은 내 마음이 알아서 하는 일이었거든. 그 마음엔 늘 '아이'가 있었다.


모든 일의 우선순위가 일인 적도 있었다. 수면 시간보다 일이 우선이어서 3일 밤을 꼬박 지새우는 건 일도 아니던 시절, 아이의 일이 우선이 되기 전 10여 년은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의 일이 최우선이 되어버린 10여 년을 지난 지금, 간발의 차로 '수영'이 아이를 이겼다. 감기에 걸린 아이를 먼저 학교에 보내두고 수영 강습을 갔다. 가고야 말았다. 강습이 끝나고 조퇴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선생님의 문자를 기어이 받고라도 수영이 가고 싶었다. 그리고 갔다 온 나를 타박하지 않았다.


'수영'이 '아이'를 이겼다. 모레가 재량휴업일인 관계로 수영 강습 결석이 예정된 바, 오늘도 결석을 하기에는 활짝 열려있는 수영장이 너무나 아쉬웠거든. 필사적으로 아이를 케어했다. 그리고 학교엘 보냈다. 마음은 이미 수영장에 있었다.





컬럭 컬럭. 컬럭 컬럭.

일요일 오후, 아이의 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기침 소리를 잡아채자마자 미간 사이가 움찔했다. 마른기침은 아니네.. 휴우- 미간을 살포시 놓아본다.


내 아이 한정이긴 하지만, 이제는 기침 소리만 들어도 코감기인지 목감기인지 구별이 가능하다. 코로 오는 감기는 열을 동반할 확률이 낮고 소리가 걸쭉한 반면, 목으로 오는 감기는 소리가 가볍고 잦으며 마른 소리가 난다. 칼칼하게 아픈 소리가 나고 열이 오를 가능성이 무지 높다.


오늘 버전은 코로 오는 감기다. 체온계를 들고 아이의 방으로 가 열을 쟀다. 열이 있다? 37.6도. 미열을 동반한 코감기다. 부비동에 염증이 생긴 모양이다. 일요일 밤에 열이 오른다는 건 학교를 못 갈 수도 있다는 예고와 같다. 아이의 기침 소리는 내일의 예보를 좌우하는 구름 같다. 예보를 들은 나는 철저한 대비태세에 돌입했다. 미열로 시작하면 독감이 아닐 확률 90프로. 감기 초기라면 독감이 아닌 바에 조절이 가능할 수도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따뜻한 물을 최대한 자주 마시게 할 것. 500미리 텀블러에 85도 뜨거운 물과 정수물을 각각 250밀리그램씩 채우고 책상에 가져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가 알아서 마신다. 자주자주 마시라고 시간마다 일러주는 깐깐함은 아이의 상태에 따라 달리 적용한다.


저녁 식사엔 상추 네 장을 끼워 넣고, 썰어서 비빔밥을 주거나 고기쌈으로 먹게 한다. 샤워는 최대한 간편하게 하고 코 주변, 특히 부비동 주변을 함께 마사지해서 고여 있는 콧물을 빼준다. 코가 막혔다면 식염수 세척을 추가한다. 아아아 아아아- 서로의 일그러진 표정에 괴로워하며 가글까지 마치고는 땀 흡수에 탁월한 60수 잠옷을 챙겨준 뒤 평소보다 이른 취침에 든다. 미열이 지속되면 해열제 한 알을 먹이고 습도를 조절하고 실내 온도를 고려한 이불로 갈아주며 방의 조도를 최대한 낮춘다. 새벽 2~3시, 열과 땀 체크를 하고 대응한다. 숙면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밝아오는 아침의 기침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이의 감기에 재난 수준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기침 소리와 열이 잦아들면 아이는 학교에 갈 것이고 난 수영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없을 것이라 여겼던 일을 한 가지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을 때 처음으로 한 것이 수영이었다. 단 두 달만 해보자 했다. 호텔에서 머리를 내놓고 여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졌으니까. 단 두 달이면 가능할 거라 믿었다. 배우게 되는 것과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해 기록을 하며 두 달간 강습을 다녔다.



가만히 별 일 없이 지내던 일상에 수영이 껴드니, 발생하는 부하가 없을 수가 없었다. 낮잠 한 번 자지 않던 내가 어느새 졸고 있거나, 습관처럼 해오던 아이들의 텀블러 챙기기 같은 작은 일들을 깜빡하거나, 저녁까지 할 체력이 남아나질 않아서 한동안은 배달음식에 의지하기도 했다. 뭐 좀 해보려다 무탈했던 가족의 일상까지 어그러지는 건 아닐까 싶은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니게 된 수영은 수수께끼 같았다. 하나를 풀면 두 개 이상의 수수께끼를 내놓았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란 없어서 하루 만에 풀리는 문제가 있는 반면, 2년이 지나서야 풀리는 문제가 있기도 했다. 하면 할수록 매력 터지는 '할매'였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동작을 반복하는 이 단순한 사이클이 스무고개 이상의 수수께끼들을 만들어냈고, 풀면 풀수록 더 많은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매일 수영장엘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엔, 걷잡을 수 없던 일상이 조금은 편안해지고 체력이 회복이 되는 구간을 만났다. 세컨드 윈드. 사람은 가만히 있을 때 대부분을 혈액을 뇌와 장기로 보내는데, 운동을 하게 되면 혈액을 팔다리 곳곳으로 보내고 운동이 계속될수록 이 공급량을 서서히 늘린다. 사지에서 필요로 하는 산소량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 초반에는 호흡이 힘들다가,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서 갑자기 호흡이 편안해지고 체력이 회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이 상태를 세컨드 윈드(Second Wind)라고 한다. 현재의 운동강도에서 몸이 필요로 하는 산소량과 공급된 상소량이 균형이 맞아 편안해진 상태를 말한다. 유산소 운동을 일정 시간 이상 지속했을 때 나타나며, 몸이 에너지 대사에 적응하면서 젖산 축적이 줄고 산소 공급이 원활해져 생기는 현상이다. 등산, 러닝, 수영 등 모든 유산소 운동에서 경험할 수 있다.



두 달만 해보자던 것이 25미터를 가게 되니 50미터에 욕심이 났다. 100미터 완주는 이전과는 다른 문제라는 걸 깨닫는 사이 배운 적도 없는 배영이 그냥 되어버리는 일은 물이 주는 서비스처럼 여겨졌다. 호흡은 어떻게 해야 트이는지 알아내야만 할 것 같고 수영 5개월 차에 생기는 라인의 변화에 내 몸에 숨어있는 또 다른 라인이 있을지 모른다며 기대했다. 아무래도 이건 더 해봐야 하는 종목이 맞다며 평영까지는 배워야겠다고 어물정 넘어보기도 했다. 덩달아 배우게 된 접영은 너무 멋있기만 해서 홀딱 빠지고야 말았는데, 장축 운동의 원리를 몸으로 실현시키다 반년이라는 시간을 쏜살같이 흘려보내고 평영 발차기로 1년을 꽉 채우다 조금 알게 된 물이라는 녀석은 점점 더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매일 궁금한 게 생기고 그 걸 풀고 싶어서 수영장엘 갔다.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궁금함 때문에 하루에도 두 번씩 들락거렸다. 좋아하면 매일 하게 된다더니, 매일 하니 좋아하게 되는 식인지도 몰랐다.






당분간 내 최우선의 자리엔 '수영'이 있을 것 같다. 나를 우선에 두는 것인지, 단순하게 '수영'이 우선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바뀐 순위로 인해 일상이 달라지고 있다. '수영'을 먼저 두었던 날들과 '아이'를 먼저 두었던 날들이 서로 싸우다 내린 내 마음의 결론이 그랬다. 논리로 따져 물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마음에 물어 결정한 일에 대해 탓하지 않을 것이다.



수영을 한 뒤로는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다. 수영을 못 갈까 봐 감기 예방에 최선을 다한다. 아프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수영을 못 갈까 봐 아이 케어에 최선을 다한다. 수영을 못 갈까 봐 밥은 미리 해둔다. 수영을 못 갈까 봐해야 할 일들을 앞서 챙긴다. 수영을 못 갈까 봐 파마를 하지 않는다. 수영을 못 갈까 봐 온몸의 상처에 유의한다. 수영 장비 체크는 진작에 해두고, 아이들의 방학을 미리 계산한다. 수영을 못 가는 일이 생길까 봐 수영에 미친 이 상태를 시어머니께 오픈한다. ㅉㅉㅉ 혀 차는 소리를 흘려들을 수 있는 내공까지 덤으로 쌓아둔다.



하루 중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가. 어떤 시간에 기대어 사는가. 나에게 가장 선물하고 싶은 시간은 언제인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신이 나는가. 인스타그램 추천 피드가 파랗게 물들고, 수영 관련 피드가 90프로를 넘었다. 지금 나에게 최고의 우선순위를 묻는다면 '수영'이라 말할 밖에 도리가 없다. 내일 당장 입고 나갈 뭍옷보다 물속에서 입을 물옷을 먼저 고민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아니,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내일의 수영'을 기다린다. 오로지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산다.



내게 중요한 것들이 수영장에 있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오롯한 나로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 3층 도서관 버튼을 누르는 횟수보다 지하 수영장 버튼을 누르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도서관 아래 수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궁금한 일이 없던 내게 수영장의 일들을 어떻게 하면 알려 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버튼 한 번만 눌러보라고 3층에 앉아 있던 예전의 나에게 도서관 아래 수영장 문을 한 번 열어보라고 말을 거는 중이다.



오래 하고 싶다. 그날그날의 운동량을 채우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싶다. 나아지지 않더라도 하루의 운동량을 채운 것에 만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족하는 삶이 오래 할 수 있는 비결일 테고 만족하지 못하는 내 마음 탓이 가장 클 테니까. 강사님 말씀에 장거리 수영을 목표로 하는 우리는 킥을 차는데 힘을 많이 빼는 게 답이라고 했다. 2비트 킥을 찬다 생각하고 힘을 뺀 수영을 해야 100미터고 200미터고 갈 수 있다고 했다. 힘을 나눠 쓰는 수영을 하듯, 내 삶도 그렇게 쓰고 싶다.





수영이 내 삶에 들어오고 나서 드는 생각은 사람은 몸을 움직이기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활동을 영위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몸을 움직인다 생각했는데, 몸을 잘 움직이기 위해 돈을 벌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머리 쓰는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관심의 영역이 생각보다 좁고 아이 생각만으로 지냈던 지난 10년 동안 그 영역 안에서 참 좁게 살았다 싶다. 하물며 수영?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 생애 수영이라는 걸 끼워 넣을 1미리의 공간도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을 살아내는 일이 내가 사는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수영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후로 이전 과는 다른 영역에 시간을 할애한다. 몸을 살아내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하려고 한다. 아이의 성장이 이유가 되기도 하겠지만, 다르게 보면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고 있구나 생각하며 흘려보낸다.



시간이 걷는 보폭대로 가다 보면 어느 날엔 달라지는 구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평생 아이만 보며 살 것 같던 시간들을 지나 타의든 자의든 그렇게만은 살 수 없다는 걸 알아가는 것. 놓아야 다른 것이 보이고, 다른 것도 볼 줄 알아야 아이도 나도 더 나은 삶을 잡을 수 있음을 수긍한다. 내 안에 노련함이 조금씩 싹트듯 아이에게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자꾸 싹틀 거라 믿는다. 믿으면 살아진다.



이번 갱생의 시간은 '수영'이다. 세컨드 윈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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