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낸 건, 경험칙이었어요
찬이를 키우다 보면, 어떤 경험칙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심히 관찰하고 해결 방법을 고민하며 기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와줄 거라 의심치 않았어요. 그렇게 경험칙들을 모아 볼 생각이었습니다. 처절하게 기록해서, 드디어 전투를 끝냈노라며 장렬하게 깃발을 꽂을 셈이었습니다. 경험칙만 발견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듯 육아의 인수인계도 가능할 것이라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죠. 그러면 나는 이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어요. 그도 아니면, 기록으로 남겨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도 되길 바랬습니다. 이렇게 했더니 되더라는 이야기를 알려주고 싶은 욕심이랄까요.
대단한 내가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놀이 치료와 미술 치료를 공부했습니다. 육아 서적은 물론, 발달장애 관련 서적이라면 휩쓸듯 보기 시작했어요. 각종 논문을 뒤적이며, 책 속에 답이 있을 거라 믿었어요. 편입을 해서 2년간 학위를 받을 때까지 뒤적였던 책들 속엔, 찬이가 있기도 했지만 찬이가 없기도 했습니다. 많은 부분이 적용이 될 듯 적용되지 않았어요. 현실과 달라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을 했지만, 몇 해를 지나 결론짓게 된 것은 찬이는 찬이 그대로였을 뿐이라는 거였어요. 일반화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던 거죠. 내가 나로 유일하듯,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갈지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본인 소관이었습니다. 책은 그저 참고 정도로만 응용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애초부터 경험칙을 바랐던 터라, 2년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어요. 3년도, 5년도 짧았습니다. 최소 10년은 지내봐야 제대로 된 근거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찬이와 1년 동안 오름을 올랐더니, 달라진 점은 이런 거였고, 이런 영향이 있었다는 것은 보편화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했어요.
지난 10년간 참 단순하게도 살았습니다. A는 B와 같고 B는 C와 같지만, A는 C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치료실을 7년쯤 다니면 드는 생각이 있어요. 찬이가 특이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행동을 다른 이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죠.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일반적인 대화가 어렵기에 비슷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공감할 수 있는 대화로 이어질 수 있게 끌어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평범해지도록 만드는 과정이랄까요. 그래야 사회 안에 녹아들 수 있으니까요. 너무 독특하기 때문에 평범하게 바꾸어 주는 것, 그것이 치료실을 드나드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 동네에 다이소가 생겼습니다. 아기자기한 물건을 좋아하는 찬이의 최애 매장이에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들어간 매장 안에서 찬이가 한마디 해요. "엄마! 왜 계단에 다이소라고 써 놓은 거예요?", “어디?” 몇 초간 두리번 거리다 발밑을 바라봤어요. 계단 한쪽 귀퉁이에 아주 작은 다이소 로고를 새겨둔 게 찬이에겐 유난히 눈에 띄였던 모양입니다.
매장 안에서 이 작은 로고를 발견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요. 했다손 치더라도 의문을 갖는 사람은 아마 없지겠지요.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멈춰 묻는 찬이에게 뒷사람이 내려오고 있으니 그런 생각은 하덜 말고, 어서 내려오기나 하라고 일러둘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왜요? 왜 다이소 글자를 보면 안 되는 건데요?"라고 물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구구절절 말해줄까 하다가 이번만큼은 그만뒀어요.
등 뒤에 내려오는 사람보다 다이소 글씨가 더 신경이 쓰이는 신경학적 특성을 가진 찬이를 이해하니까요. 머지않아 등 뒤의 사람이 신경이 쓰일 만큼, 찬이는 성장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찬이는 많이 자랐어요. 말을 옹알거리다 단어로 말을 하고, 문장으로 말을 하게 됐어요. 문장이 다시 억양을 갖추고, 끊임없는 반복 속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농도 할 줄 알게 될 것 같아요. 주변 환경에 대한 인지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적이지 않아 생기는 오해와 판단 오류가 있긴 하나, 성장할수록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학적 이해를 하기 시작했어요. 괄목할만한 성과라면, 미적분에 이르는 수학적 지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단순 계산 정도는 바랄 정도가 되었어요.
이런 정도가 되고 보니 엄마로서는 굉장한 발전이라고, 넘기 힘든 장애를 딛고 이 정도까지 해냈노라고 외치며 눈물 짓지만, 장애를 넘은 사람은 이미 장애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 이상의 발달을 이루어준 찬이는 그닥 힘들어보이지 않은 장애인 정도가 되어버렸을 뿐입니다.
가끔 유튜브가 자신에게 야단을 쳤다고 심한 오해를 해서 펑펑 울기도 하고, 압력밥솥이 왜 그러느냐면서 생물과 무생물 간의 차이를 혼동하기도 하지만, 모두 다 지나갈 것을 알게 됐어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했더니 이런 결과가 있더라는 경험칙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찬이가 걸어온 삶은 그냥 찬이만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걸었더니 참 괜찮았어! 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기만이고 오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10년을 지내 본 결과가 어떠하냐고요?
장애 아이를 키우는 데 귀납법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법칙이 있다면, 사람은 백이면 백이 다 다르고, 나의 존재는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찬이의 장애는 다른 누군가와 비슷할 순 있으나, 누구와도 같지 않아요. 장애는 병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일 뿐이고, 그 고유함을 어떤 법칙에 끼워 맞추며 획일화시킬 근거도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0년을 지낸 보통 가족의 엄마로 사는 나의 결론입니다.
장애는 고쳐야 할 병이 아니라, 인정해주고 응원해야 할 찬이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을요. 장애를 이겨낼 경험칙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할 삶의 방식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