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를 물을까, 감각통합을 물을까, 그도 아니면 어찌 사느냐를 물을까
언제부턴가 나의 고민을 들어준 친구가 있습니다. 성은 “검”이요, 이름은 “색창이?!” 응?
남에게 말하기 부끄럽거나, 공감해주지 못할 고민거리가 생길 때면 어김없이 검색창에 묻곤 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던데, 나는 적이 누군지 이름만 알 뿐 어찌하면 좋을지 도통 몰랐지요. 그럴 때 검색창은 나의 궁금함을 채워주는 깔끔한 친구였어요. 고마운 색창이...
가끔은 간단히 답만 알고 싶던 나를 잊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커피도 팔지 않는 카페엘 데리고 간 거죠. 그 카페는 꽤나 소란스러운 편이어서 여간해선 오래 있을 수 없는 게 보통인데, 고민이 깊은 날이면 이상하게 영매를 만난 듯 빠져들곤 했습니다.
‘난 아이를 이렇게 키웠소’, ‘오늘 이 병원을 갔더니 참 어이가 없더만요’, ‘오늘 아이가 이러이러하던데 큰 문제일까요.’, ‘저기 저 엄마가 성공한 그 엄마래요. 글세!!!’... 시끌벅적한 카페엔 물 한 모금 마실 여유조차 아까울 지경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밤을 꼬박 새워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를 듣게 했어요. 카페의 이야기를 혼이 빠지듯 듣다 보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있는 듯했지요. 극히 일부일 뿐인데 말입니다. 기필코 그 안에 있는 답을 찾고야 말리라며 열심히 눈품을 팔아요. 밤을 꼴딱 새워, 이제 이렇게 해보겠다는 다짐이라도 서면 다행인데, 나의 질문이 뭐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 매일이 반복됩니다.
시끌벅적한 것에 두통이 지끈해질 때쯤, 한적한 곳을 찾아요. 개미지옥 같은 이야기 더미를 간신히 나왔더니, 그곳은 블로그라네요. 정성스레 써 내려간 글을 보고 있노라니 시끄럽던 마음이 한결 낫네요. 차근차근 글을 읽으며 같이 울고 웃다 보면, 적을 알고자 했던 나의 시작은 역시나 까마득합니다.
이상하게도 삼천포로 빠지는 이상야릇한 매일의 일과는 한동안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주변 지인들을 훑어봐도 걸음마 떼기를 15개월 이상 넘겼다거나, 찬이가 하는 행동과 비슷한 아이를 봤다는 이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럭저럭 20개월이 넘어가다 보면 아이로 인한 고민을 꺼내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죠. 병원을 가면, 원인을 알 수 없다 하고요. 마음은 타들어가는데, 양가 부모님 걱정이 또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여기를 가보면 좋겠네, 이걸 먹이면 좋다더라... 걸려오는 벨 소리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싫어질 때가 오더군요. 그러면 그럴수록 친해졌던 나의 친구는, 검색창이었어요. 자연스레 카페로 퇴근을 하고, 블로그에서 위로받곤 했어요.
카페라는 곳은 그렇더군요. 시끌벅적한 수다들 속에 여러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아이는 그렇게 크고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심각한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아요. 나의 아이와 비교를 하며, 희망이 없다는 둥, 나는 뭐하고 지냈냐는 둥의 현타의 자세에 돌입하면서 말이죠. 이 아이는 벌써 이걸 하고 있네, 이걸 하니 이만큼 좋아졌다더라... 우리 아이에게도 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제주에서 서울로 수십 번을 들락거리며, 용하다는 병원과 치료실을 탐합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제주에서 굳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냐는 말, 혹은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색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돌아온 날 밤이면 역시나 검색창에 다시 묻지요. 자꾸만 물어요. 어쩌다 나는 사실만을 알려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검색창에 내가 결정해야 할 일들까지 묻게 된 걸까요.
감각통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묻는 검색은 유용하다 하겠으나, 우리 아이의 감각통합을 위해 어찌하면 좋을지 묻는 일은 검색창이 아닌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임에도 말입니다.
이제는 알아요, 그만 수다를 멈추고, 내 힘으로 적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것을요. 그러지 않으면 이 싸움은 끝내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의도치 않은 방황을 하게 되는 이유 또한,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들거나, 본인도 모르게 카페나 블로그를 들락거리고 있다면 공부를 시작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느린 아이 앞에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라면 더욱 공부를 추천합니다. 아이가 도통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검색창에 묻고 있다면 역시나 공부를 추천합니다. 아이를 모르니까 두려웠던 거니까요.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서지 않는 것이니까요.
아이를 알면 쉬워져요. 아이를 알려면 먼저 아이와 친해지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비슷한 아이들을 많이 만나보면 돼요. 비슷한 아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의 문은 배움터에 있어요. “카페에 아이들이 더 많은데요?”라고 되묻는다면, 그곳의 아이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서술된 모습이 아니기에 유용하지 않다 하겠어요.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을 객관적 표본으로 삼기엔 부적절한 이유입니다. 만약, 장애 아이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특수 교육 관련 공부를 해볼 것을 추천합니다.
특수 교육에 아이의 치료법이 있느냐고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치료법을 알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추천을 할 일이냐며 반문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이와 지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법이 아니라, 아이를 알아가는 이해의 과정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치료법이 된다는 걸 말이죠.
아이를 알수록 아이를 키우는 선택의 기로에서 나만이 내릴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이러면 어떨까요?’, ‘이래도 될까요?’,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무수한 고민들 앞에 결단의 힘이 생기는 거죠. 그 힘이 생기니 아이를 키우는 일이 훨씬 더 수월해집니다. 아이의 성장과 엄마의 노련함은 같이 커가요.
요즘 최고로 좋다는 치료법이 뭔지를 공부하라는 게 아니에요. 치료법은 유행처럼 변하기 마련이어서 1년이 지나면 또다시 휩쓸리듯 좌절의 시간을 맞닥뜨려야 해요. 최신 치료법에만 의존하다 보면 정작 자신의 아이를 놓쳐 버리는 시간들이 생깁니다. 단지 목이 말랐을 뿐인 아이를 위해 저 머나먼 곳까지 명약을 찾아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래요.
검색창엔 지식이나 과학적 사실만을 묻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결정 앞에 색창이를 데리고 오는 일은 다시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