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에 되새긴 아픔과 희망
새벽, 라말라로 향하는 길
2025년 5월 5일, 어린이날. 역설적이게도, 이날 동예루살렘의 새벽 공기는 축제의 설렘 대신 밤새 내려앉은 스산한 한기로 가득했다. 코이카(KOICA) 팔레스타인 출장의 마지막 실무일. 라말라로 향하는 약속 시간은 아침 7시. 서둘러야 한다는 강박에 새벽 6시, 아직 동트기 전의 푸른 어스름 속에서 숙소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문은 열려 있었지만, 음식은 아직 온기를 품지 못한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서툰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떠티..." 아, 6시 30분.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어젯밤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보고서의 문장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시만 손보고 나가려던 것이었는데, 어느새 화면 속 논리의 미로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문득 시계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긴 6시 40분. 짧은 탄식과 함께 황급히 식당으로 달려가 딱딱해진 빵 몇 조각과 식어버린 커피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었다. 아침 식사는 그야말로 끼니를 때운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정신없이 차에 올라탔을 때는 이미 약속된 7시를 훌쩍 넘긴 후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부시게 쏟아지던, 마치 지중해 휴양지를 연상케 하던 햇살은 온데간데없었다. 밤새 기온이 뚝 떨어졌는지, 갑자기 찾아온 쌀쌀함에 다들 트렁크 깊숙이 넣어두었던 가장 두꺼운 옷을 꺼내 겹쳐 입었다.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차가운 비를 뿌릴 듯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차창 밖 풍경은 유난히 낮은 채도로 가라앉아 보였다. 어쩌면 이 스산함은 단순히 날씨 탓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제저녁부터 들려온 뒤숭숭한 소식들이 마음 한구석에 불안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예멘 후티 반군의 미사일 공격 이후, 아랍에미리트를 제외한 거의 모든 항공사의 이스라엘 노선 운항이 취소되었다는 뉴스. 언제든 대규모 보복 공격이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긴박한 상황 속에서, 며칠 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던진 한마디("이스라엘은 잠시 기다려야 한다")가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현지 사무소의 분석은 오히려 불확실성을 증폭시켰다. "13일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는 정보도 있다"는, 출처 불명의 흉흉한 소문까지 더해지니, ‘과연 우리는 무사히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그 불안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오늘 하루, 세바스티아 마을의 미래를 위한 이 기획조사 업무를 무사히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는 이미 임계점에 다다라 있었다.
차량은 익숙한 길을 따라 동예루살렘을 벗어나 라말라로 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타난, 칼란디아 검문소. 차량 행렬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자, 차 안의 공기도 함께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마치 조건반사처럼 각자 여권과 푸른색 이스라엘 거주증(블루카드)을 꺼내 손에 들었다.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고,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밀려 들어왔다. 방탄조끼를 입고 M16 소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매서운 눈초리로 다가섰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 기껏해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깊은 경계심과 숨길 수 없는 적의가 서려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살기가 느껴지는 시선이 차 안의 얼굴 하나하나를 꼼꼼히 훑고 지나갔다.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 몇 마디 건조한 질문이 오가고, 마침내 무심한 손짓과 함께 차단봉이 올라갔다. 다행히 무사통과. 우리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반복되는 통과 의례였지만, 그 순간의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은 채 어깨를 짓눌렀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상념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른 길로 접어든 듯, 차창 밖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오늘 길이 좀 다른 것 같지 않아요?”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에 다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 탓인가? 어쩐지 되게 다르게 느껴지네. 돌아갈 때는 이런 풍경을 본 것 같은데, 출근길에는 처음인 것 같아요.”
“정말 여기는 광야 느낌이 확 나네요.” 황량하지만 어딘가 성서적인 장엄함마저 느껴지는 언덕들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 짙푸른 녹색 올리브 나무 대신, 거친 풀과 날카로운 바위들이 드문드문 박힌 메마른 땅이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예쁜 광야예요. 자세히 보면 초록이 좀 섞여 있잖아요.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완전히 노란색뿐인 진짜 사막인데…”
낯선 풍경은 잠시 무거운 상념을 환기하는 듯했다. 누군가는 과거 LH 공사의 주택 사업이 처음부터 사회주택이 아닌 분양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꼬여버렸다며 아쉬움을 토로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도시 개발 사업에서 단기 수익과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자연스럽게 수원 화성 행궁동의 도시재생 사례가 화제에 올랐다. 한때는 해만 지면 인적이 끊겨 돌아다니기 무서울 정도로 쇠락했던 동네가 이제는 주말이면 발 디딜 틈 없이 관광객으로 북적인다는 성공담.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원주민들의 눈물과, 개성 있던 골목길이 획일적인 상업 공간으로 변모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씁쓸한 그늘이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도 함께였다.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을 만드는 것과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사이의 줄다리기. 심지어 제주 남양 통닭이 수원 통닭보다 맛있더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미식 경험까지 더해지며 이야기는 두서없이 흘러갔다. 어쩌면 이 모든 수다는, 눈앞의 불안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싶은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원도 처음엔 정말 먹을 게 없었어요. 16년 전 처음 왔을 때, 유네스코 문화유산 바로 옆인데 이렇게까지 먹을 게 없고 특색 없는 동네는 처음 본다 싶었죠. 수원 왕갈비? 1인분에 5만 원인데 맛은 그냥 슈퍼마켓 양념 맛이었고. 통닭 거리? 양은 진짜 많은데, 닭은 병아리 수준이고 맛도 뭐… 그런데 영화 ‘극한직업’ 하나로 상황이 완전 뒤집혔잖아요. ‘수원 왕갈비 통닭’이라는, 영화에 나온 그 이름 하나 때문에! 어떤 가게 주인이 간판 바꿔 달자마자 줄 서기 시작하는데… 야, 진짜 기획력과 타이밍이 중요하구나 싶었죠.” 나의 생생한 경험담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남았다. 영화 한 편, 간판 하나로 도시의 운명이 바뀌는 현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도시의 발전일까? 우리의 세바스티아 사업은 그런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데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인스타 성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을 사람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그들의 삶과 문화를 가꾸고, 외부인과 진정으로 교감하며 마을의 매력을 함께 키워나가는 것. 시간이 걸리고 더디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표피적인 흥행 요소가 아니라, 마을 깊숙한 곳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발굴하고 주민들과 함께 그 가치를 공유하며 성장시키는, 섬세하고 진정성 있는 기획이 절실했다.
차량은 다시 익숙한 길로 접어들어 라말라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우리는 최종 협의를 통해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예산 배분을 확정해야 했다. 현지 NGO, 팔레스타인 정부 부처(MDLF), 그리고 잠재적인 용역 수행 업체들과의 줄다리기. 각자의 입장을 조율하고 최적의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어쩌면 가장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이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풀어내야만 했다.
“기존에 팔레스타인과 체결한 RD(Record of Discussion) 중에 참고할 만한 게 있을까요? 특히 수원 총괄기관을 어디로 명시했는지 같은 부분이요.” 코디네이터에게 급하게 질문이 쏟아진다.
마지막 퍼즐 조각: 사무실에서의 씨름
어느덧 차량은 코이카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을 열고 나서자, 새벽보다 더 짙어진 듯한 잿빛 하늘 아래 차가운 공기가 와락 달려들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야 할 날이지만, 이곳의 현실은 그와는 너무도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 희망의 씨앗을 심기 위해 왔다. 비록 그 과정이 고되고 때로는 두려움과 마주해야 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로 들어서며, 나는 오늘 하루, 이 지난한 협상과 조율의 과정을 잘 헤쳐나가기를, 그리고 마침내 세바스티아 마을에 작은 변화의 불씨를 지필 수 있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라말라에서의 마지막 하루는 그렇게, 무거운 공기와 비장한 각오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사무실 안은 마지막 날의 분주함과 긴장감이 뒤섞여 묘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각자의 노트북 앞에 앉아 막바지 문서 작업에 몰두하는 한편, 끊임없이 서로의 자리로 오가며 의견을 교환했다. 어제까지 치열하게 논의했던 예산 배분과 역할 분담의 최종안을 확정 짓고, 현지 파트너들과의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이 사업은 각 분야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섬세하게 연결되어 수시로 조율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수공예센터의 경우, 건물 자체의 건축은 건축 전문가인 추 이사의 몫이지만, 그 안에 들어갈 프로그램 설계는 나의 담당이었다. 두 과업이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했기에 끊임없이 소통하며 세부 사항을 맞춰나갔다. 또한, 건축팀이 복합 커뮤니티 센터를 완공하면, 그 공간에서 교육 전문가가 주민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거기서 생산된 공예품 등은 다시 내가 맡은 수공예센터 협동조합으로 납품되어 관광객들에게 판매되는 식이었다.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CI(Corporate Identity) 디자인 개발은 나의 과업이었지만, 그 결과물인 로고와 디자인 매뉴얼은 소득증대 분야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활용될 예정이었다. 특히 소득증대 전문가는 이 브랜딩 결과물을 바탕으로 생산품 포장재를 제작해야 했는데, 이 포장재 제작 예산을 어느 쪽의 과업 항목에 넣어야 할지 급하게 논의하기도 했다. "디자인은 기본 안과 매뉴얼 제작까지만 하고, 그걸 넘겨받아서 실제 포장재를 만드는 건 소득증대 과업으로 하는 게 맞겠죠?" "네, 그렇게 하죠." 이런 식으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빈틈을 메워주고, 여러 개의 마을 조합이 서로 돕는 유기적인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사업의 핵심이었다.
한창 논의가 무르익을 무렵, 현지 팔레스타인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짓에 잠시 대화가 멈췄다. "저… 세바스티아 헤리티지 트레일 대표 조지 리쉬마위 씨에게 누가 연락하셨었죠? 오늘까지 답을 달라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방금 전화가 왔는데, 지금 외부에 나와 있어서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순간, 회의실 안에는 짧지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 부족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사정은 알겠지만… 저희가 시간이 정말 없어서요. 최대한 3-4일 안에라도 회신을 부탁드린다고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간절함이 묻어나는 재촉. 촉박한 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방금 전의 소식은 불안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오늘 쟁점으로 떠오른 PEO(Project Execution Officer)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PEO를 두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요. 투입이 간헐적인데다 예산 부담도 크고… 차라리 PM(Project Manager)의 사업 관리 비용을 조금 더 책정해서 특정 회사에 맡기거나, 아니면 각 컴포넌트별로 필요할 때마다 교육이나 자문 비용으로 처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PM이 없으면 결국 직급이 가장 낮은 5급 전문가가 실무를 다 떠맡게 될 수도 있어요. 도면 작업 같은 거 말이죠. 물론 현지 NGO나 업체에 맡기면 그쪽에서 알아서 인력을 투입하겠지만, 그래도 중심을 잡아줄 전담 인력이 있는 게 좋긴 하죠.”
“다른 사례를 보면 PEO가 MM을 꽤 많이 가져가는 경우도 있던데, 그건 아마 특정 분야에 집중된 사업일 경우일 거예요. 우리처럼 여러 분야가 섞여 있으면… 현실적으로 어렵죠. 그냥 2년마다 코이카 담당자가 바뀌는 시스템에 맞춰가는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PEO냐 PM이냐, 혹은 그조차 없이 갈 것이냐를 두고 오가는 대화 속에는, 이상적인 사업 구조와 현실적인 제약 사이의 고민이 깊게 배어 있었다. 코이카의 규정과 현장의 필요, 한정된 예산과 사업의 효과성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숙제였다.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주장하면서도, 결국에는 전체 사업의 성공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점을 찾아 나갔다. “어차피 나중에는 다 n분의 1로 나눠서 할 텐데… 그래도 오늘 체크할 건 다 털고 가야죠.” 누군가의 말처럼, 오늘 이 자리에서 매듭짓지 못하면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발목을 잡힐 문제들이었다.
긴 논의 끝에 PEO 없이 PM 중심으로 가되, PM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사업 관리 비용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각 컴포넌트별 세부 예산 조정도 마무리되었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확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고,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 한 동료가 외장 하드를 노트북에 연결하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 뭐지? 받자마자 바이러스 걸린 것 같은데? 아이고, 바이러스 검사하라고 뜨네. 어떡하지?” 순간 사무실 안의 공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중요한 자료들이 담긴 저장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마지막 날의 순조로운 마무리를 방해하는 예기치 못한 복병이었다. 다행히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고, 검사 후 파일을 무사히 옮길 수 있었지만, 그 짧은 소동은 마치 이곳의 불안정한 상황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듯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문제들, 예상치 못한 변수들 속에서 우리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이 모든 것이 모사드의 음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내일 출국 시 공항 보안 검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벤구리온 공항에서 체크인할 때 여권 뒤에 붙여주는 스티커 숫자 있잖아요. 1번부터 6번까지 있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요주의 인물이라는 뜻이래요.” “1, 2번은 거의 받을 일 없고, 3, 4번이 외국인들이 주로 받는 숫자인데, 진짜 운 없어서 5번이나 6번 받으면… 특히 기내에 들고 타는 짐은 다 열어서 막대기로 하나하나 쑤셔본대요. 글자 그대로 탈탈 터는 거죠.” “체크인 카운터 직원들이 승객 표정이나 말투 같은 걸 보고 프로파일링해서 숫자를 매긴다는 말도 있고… 기준은 아무도 모르죠. 그냥 의심스러우면 걸리는 거예요.”
농담처럼 주고받는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는 이 지역을 드나드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삼엄한 경계와 보이지 않는 차별에 대한 씁쓸함이 묻어났다. 우리는 이곳에서 ‘전문가’로 일하고 있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순간에는 언제든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분류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내일 과연 공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붙잡혀 속옷 외에 모두 벗어야 하는 치욕을 맛봐야 할까? 그들의 목적은 망신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UN 직원들이 제일 심하게 공항에서 당한(?)다고 한다.
총구 앞의 돌멩이, 어린이날에 들려온 비극
어느덧 시계는 오후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점심 식사도 피자로 대충 떼우며 몰두했던 작업들이 하나둘 마무리되어 갔다. 우리가 작성해야 할 수많은 서류들의 틀이 완성되어가고, 관련 파일들이 정리되었으며, 각자 맡았던 역할에 대한 인수인계 사항들이 공유되었다. 오후 늦게, 사무실 한편에서 마지막 RD 검토와 랩업 미팅이 진행되었다. 최종 문구를 확인하고, 남은 쟁점들을 정리하며, 열흘간의 결과물을 공식적으로 마무리 짓는 시간이었다. 열흘간의 짧지만 강렬했던 출장. 라말라의 잿빛 하늘 아래, 우리는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하고, 때로는 서로를 다독이며, 세바스티아 마을의 미래를 위한 작은 씨앗을 심기 위해 애썼다.
사무실 창밖으로 라말라의 풍경이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닫고 짐을 챙겨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퇴근길 차량 안은 피로와 안도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뒤섞여 묘한 침묵이 흘렀다. 차창 밖으로 모스크의 첨탑들이 보이고, 저녁 기도를 알리는 아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원래 저 미나렛(첨탑)은 사람 목소리가 닿는 범위마다 하나씩 세워졌대요. 지금은 스피커를 쓰지만, 예전엔 다 육성으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신 교수의 설명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서 과거 오래 살았던 신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쯤에서 예전에 돌 맞은 적 있어요. 차에." "저도 이 근처에서 코디 차가 축구공에 맞아서 움푹 팬 적 있어요. 애들이 그냥 막 던져요." 외국인이라서, 혹은 특정 로고가 붙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곳을 지나가는 낯선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날아드는 돌멩이나 축구공. 이곳의 아이들에게 그것은 분노의 표출일까, 아니면 그저 심심풀이 장난일까. 안전을 위해 UN 차량조차 로고를 떼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이곳의 일상이 품고 있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가족들 이야기가 나왔다. 벤구리온 공항 미사일 피격 소식에 아내가 걱정하며 울었다는 동료, 반대로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며 멋쩍게 웃는 동료도 있었다. "아들 녀석은 게임 계정 인증번호 보내달라고만 연락 오더라고요.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씁쓸한 농담 속에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너무 걱정 끼쳐드리는 것보다야 낫죠." 서로를 위로하며, 우리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출국 날에는 미사일 안 떨어지겠죠?" 누군가의 걱정 어린 질문에 "자꾸 불안하게 그러지 마세요"라며 애써 웃어넘겼지만, 13일까지는 보복 공격이 없을 거라는 누군가의 말에 잠시 안도하는 우리 모습에서 불안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음 한편에는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함께 세바스티아에 대한 걱정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와 아이들의 해맑은 눈망울, 그리고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이 자라나는 올리브 나무의 강인함은 우리의 마음 깊숙이 뿌리내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 소장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우리가 세바스티아를 떠나 라말라로 향한 직후, 오후 3시경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을에 진입해 군사 작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군 당국으로부터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소장님의 말에 따르면, 군부는 작전 개시 전 우리가 마을을 떠났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안의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과 함께, 세바스티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곳의 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마을을 지키는 올리브 나무들… 모두 무사할까? 며칠 동안 애써 외면했던 불안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왜 하필 우리가 떠난 직후였을까. 우리가 그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들에게 위험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노트르담의 밤, 희망과 기도의 조각들
예루살렘 노트르담에서의 저녁 식사 자리는, 낮 동안의 긴장과 피로를 녹이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며칠간 억눌렀던 세바스티아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을 때, 소장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군인들이 마을에 진입했을 때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저항했고,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평소 같았으면 가차 없는 발포로 이어져 아이들이 벌집이 되는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날따라 군인들은 총을 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했다고 한다. 소장님은 조심스럽게, 아마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이스라엘 군이 몸을 사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안도감과 함께, 이 비정상적인 현실에 대한 깊은 슬픔과 분노가 밀려왔다. 하필이면 오늘, 5월 5일은 어린이날이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의 순수함과 행복을 기원해야 할 날에, 우리는 총구 앞에서 돌멩이를 던져야 했던 세바스티아 아이들의 위태로운 생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어린이날은 어떤 의미일까. 총 대신 돌을 쥐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이곳에 남기고 온 것은 과연 희망의 씨앗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였을까.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짧은 출장 기간 동안 겪었던 어려움과 긴장감, 각자의 분야에서 느꼈던 고민과 보람, 그리고 이곳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건축 설계를 하다 우연히 개발 협력 분야에 발을 들인 동료의 이야기, AI 시대의 도래 앞에서 느끼는 기대와 불안감, 챗GPT로 아이들에게 동화를 써주며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까지. 딱딱한 업무 이야기 대신, 서로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공감하는 대화가 오갔다. "아무리 좋은 기획이라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게 많다"는 자조 섞인 말 속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으려는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개발 협력 사업의 구조적인 문제점이나 외부 평가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것은 불평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건강한 문제 제기에 가까웠다.
식사를 마치고 노트르담을 나설 때, 김민종 소장님의 따뜻한 덕담과 작별 인사가 이어졌다. 근거는 없지만 코이카의 '에이스'들이 모인다는 팔레스타인 사무소의 소장님답게, 그는 유머와 진심을 섞어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래를 격려했다.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정이 듬뿍 들었는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단순한 업무 관계를 넘어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짧은 길,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기념품으로 뭘 살지 고민하는 소소한 대화, 열쇠를 잃어버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해프닝을 떠올리며 웃는 사이, 열흘간 함께 동고동락하며 쌓인 동료애와 유대감이 밤공기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예루살렘의 밤은 깊어갔다.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기 전,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김민종 소장님이 단체 카톡방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는 우리가 처음 만난 세바스티아를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좋아해 주셔서 그것만으로 힐링이 되었다"고 고마움을 표하며, 전쟁 중에도 100억대 사업을 구상하는 우리의 모습이 "과연 정상인지 건강검진 받는 느낌이었다"는 솔직한 심정을 유머러스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제는 "유체이탈로 웃으면서 얘기하는 세바스티아의 아픔을~ 이제 진정 함께 치유해주시길 부탁드리고," "짧게는 1년 뒤 길게는 5년 뒤 세바스티아에 못다 핀 웃음들이 가득 찬~ 그냥 평범한 마을이 될 수 있길 기도해 봅니다"라는 그의 간절한 바람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는 우리가 이곳에 남긴 시간과 노력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김소장님의 진심 어린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울렸다. '유체이탈로 웃으면서 얘기하는 세바스티아의 아픔'. 그 표현 속에 담긴 무게와 역설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노트르담의 창밖으로 보이던 고요한 야경 너머, 세바스티아의 밤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사하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온 그곳의 사람들과 올리브 나무들이 부디 오늘 밤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무사하기를. 동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수많은 질문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서로에게서 발견한 한 줌의 희망을 남긴 채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