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귀환의 기록

보이지 않는 벽, 벤구리온의 붉은 딱지

by 강제욱

마지막 식탁: 위태로운 평화 위의 대화

열흘간의 폭풍 같던 팔레스타인 기획조사 출장의 마지막 날 새벽이 밝았다. 드디어 까다로운 이스라엘 출국장을 무사히 통과하는 일만 남았다. 창밖은 여전히 이곳 특유의 잿빛 먼지를 머금은 채 스산했고, 며칠 전 들려온 인근 지역 포격 소식은 밤새 뒤척이게 만든 불안의 잔상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공항에서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원하는 ‘전문가’라는 신분이 발각되어 고초를 겪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그저 평범한 여행객인 척, 최대한 말을 아끼고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숙소 식당의 공기는 차분했지만, 우리 테이블 위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곳에서 아침 식사가 이게 마지막이 아닐 수 있으니까 조금만 드시죠. 돌아와서 점심도, 저녁도 여기서 먹을 수 있습니다." 남과장의 농담 섞인 말에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든 우리의 발이 묶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예전에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주재원들도 위험 수당이 붙었다던데, 우리도 그런 셈인가 봐요." 누군가의 말에, 한 달에 한 번씩 사이렌이 울리던 과거 한국의 민방위 훈련 기억과 이곳의 일상적인 위험이 겹쳐졌다. 실제로 이곳은 미군조차 위험 수당을 더 받는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연초에 한국이 미국에 의해서 무슨 국가로 선정된다고 그래서 난리 났었잖아요. 원자력 발전 관련해서 미국에 파견된 우리나라 쪽에서 뭔가를 빼가려는 조짐이 발견돼서 그랬다던데…" 국제 정세의 민감한 단면들이 아침 식탁 위로 오르내렸다. "우리나라가 미국에 가서 그 유출을 하려고 했다는 거죠?" "물을 흐리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아파서 옆에서 들고 나가려다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뒤섞이며 대화는 안갯속으로 빠져들었다.


식탁 위에서는 팔레스타인의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절실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여기 앞에 다니는 트램을 타고 끝까지 가면 홀로코스트 박물관(야드 바솀)이 있어요. 무료인데, 시간이 되시면 꼭 한번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과거 이곳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는 신 교수님의 말에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박물관 발코니에서 오열하던 한 유대인 남성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남성의 부모님 세대가 겪었을 참혹한 역사, 아우슈비츠의 신발들처럼 적나라하게 전시된 비극의 증거들. 그리고 일본과 달리 끊임없이 사죄하는 독일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차이.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600만 명의 희생 뒤에 가려진, 2천만에서 3천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인들의 희생과 그들의 전승 기념일 이야기까지. "푸틴도 한번 왔었어요. 저희가 잘 이제 잊혀진 역사라고 하는데, 2차 대전 때 유대인들 600만 죽었다고 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이 이천만에서 삼천만 죽었대요. 그래서 전승 기념일을 지금 제일 크게 하잖아요. 러시아 때문에 어떻게 보면 2차 대전을 이긴 건데." "야, 진짜 러시아 갈아 넣어서 이긴 거네." 누군가의 탄식 섞인 말. "현대 전쟁에서 승리하고 지고는 별로 무의미한 것 같아요. 예전처럼 힘으로 완전히 압도해서 이겼다는 개념이 아니라 계속 양쪽에서 꾸준히 죽어 나가는데 누가 얼마나 버티나… 러시아가 그런 거잖아요. 더 많이 죽었는데도 버티는 거고, 베트남전의 미국의 경우처럼 상대적으로 덜 죽어도 아, 나 더 이상은 못하겠다 할 수도 있는 거고." 또 다른 누군가의 냉소적인 분석은 이곳의 복잡한 현실을 관통하는 듯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 등장하는, 유대인 혐오를 조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서(僞書) '시온 장로 의정서' 이야기는 이곳의 뿌리 깊은 갈등과 음모론적 사고의 기원을 생각하게 했다. 히틀러가 그 위서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공포였다. "처음에는 그때 소위 말하는 시오니스트라는 사람들이 와서 땅을 사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이 아랍 사람들하고도 잘 지냈고요. 땅도 사고 같이 서로 어울려 지내고… 그러다 점점 부딪히다가 유엔이라는 데가 생기고 결의안을 내렸는데, 인구는 아랍 사람들이 훨씬 많고 땅도 훨씬 많은데 너네 사이좋게 반반 나눠 가져라고 하는 게 그 유명한 투 스테이트 솔루션이 된 거예요. 그래서 아랍 리그들이 다 모여가지고 우리 형제를 이렇게 둘 수 없다 해서 전쟁을 했는데 진 거죠. 계속." 짧은 아침 식사 시간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묵직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라 흘러갔고, 이곳의 단순하지 않은 아주 복잡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노력의 편린들이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야드 바솀 박물관의 존재와,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크고 아프게 다가왔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피해자가 어떻게 다시 가해자의 얼굴을 하게 되는가. 절대적인 선과 악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힘의 논리와 생존의 본능, 그리고 이익 앞에서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허울 좋은 개념일 뿐인가.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선택적이며, 정의는 어떻게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그토록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성스러운 도시의 아침 식탁에서, 우리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의 무게와 역사의 잔인한 아이러니 앞에 할 말을 잃고 짓눌리는 듯했다.


로비의 마지막 속삭임: 암호와 조율,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호텔 로비 한편, 통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는 소파에 둘러앉아 마지막 회의를 시작했다. 오후 2시 체크아웃 시간 전까지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했다. 창밖으로는 간간이 트램이 지나갔고, 예루살렘의 아침은 분주하게 시작되고 있었지만, 우리의 공간은 마치 다른 차원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췄고, ‘세바스티아’라는 직접적인 단어 대신 미리 정해둔 암호, ‘S마을’이나 ‘그곳’, ‘프로젝트 대상지’ 등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이 기획조사의 마지막 퍼즐 조각들을 맞춰나가고 있었다. 사소한 단어 하나, 숫자 하나에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이곳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언제든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심지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난 열흘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요 안건은 여러 분야가 얽혀 있는 사업 구성 요소들 간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최종 조율, 그중에서도 특히 수공예센터 협동조합 설립 시점 조정이었다. 복합 커뮤니티 센터 완공이 2028년 2분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당초 사업 시작 연도인 2027년에 임시 조직을 구성하여 수공예품 개발 및 판매 기반을 다진 후, 센터 완공과 함께 2028년에 정식으로 협동조합을 출범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의 2년이라는 시간적 간극과, 센터 완공 전까지 마땅한 활동 공간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주민들의 참여 동력을 유지하고, 실질적인 소득 창출로 이어지기까지 너무 오랜 기다림이 필요해 보였다. 소득증대 분야 전문가에 따르면 다행히 협동조합은 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생긴다고 한다. "건물이 아직 없으니까 저는 건물 생긴 후부터 생각했었는데… 아. 건물하고 상관없는 거네요, 사실 생각해보니까." "소득증대 프로그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나요? 혹시 센터가 완공되기 전이라도, 수공예센터 운영과 연계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 나의 질문은 단순한 정보 확인을 넘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절박한 타개책 모색에 가까웠다. 소득증대 전문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행히 희망적인 답변을 주었다. "네, 센터 건물 자체는 2028년에 완공되지만, 소득증대 프로그램의 핵심인 조합의 설립 활동은 그 이전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세바스티아 내의 다른 유휴 공간 같은 시설을 임대해서라도요. 그렇게 본다면, 실질적으로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것은 2027년부터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때부터는 어느 정도 성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가 내려가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수공예센터 협동조합 운영 지원 용역의 과업 시작 시점을 기존 2028년에서 2027년 2분기로 땡기고, 프로그램 내용을 좀 더 내실 있게 다듬어 소득증대 프로그램과 긴밀하게 연계될 수 있도록 계획을 보완해야 했다. IPDI(사업 상세 계획서)의 복잡한 엑셀 시트 위에서 숫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PM(Project Manager)을 건축 분야에 둘 것인가, 아니면 개발 분야에 둘 것인가. "PM을 어디다가 넣어주느냐는 사실 돈의 문제와 책임의 문제잖아요. 어저께 우리가 얘기 나눈 건, 국내 INGO에서 그걸 하는 게 일은 하겠는데 책임이나 이런 걸 다 지기 되게 부담스러울 것 같고… 건축 쪽에서 전체 사업 PM을 하되, 그분이 이쪽 파트에 소득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다 모르니까 이쪽에서 한 명이 대표로 서서 하도록, 그걸 한 2급으로 하자는 말씀이시죠?" "성과 관리가 2급이면 PM이고, 성과 관리를 하나 더 두는데 이걸 3급 혹은 4급을 주고 오히려 교수님 같은 분이 맡는 거죠. 행정 부분은 생각보다 별로 없어요. 도시 부분만 있고… PAO 안 쓰고 내부에서 다 할 겁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국내외 MM(Man-Month) 배분은 적절한가. 현지 NGO 역량 강화 예산은 충분한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촘촘하고도 지난한 조율의 연속이었다. "PM은 건축 쪽에서 총괄하되, 소득이나 교육 프로그램처럼 전문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해당 분야 전문가가 실무 책임을 지는 형태로 가죠. 그리고 전체 사업의 성과 관리는 외부 전문가를 3급 정도로 초빙해서 객관성을 확보하고요." "하지만 PM 자격 요건을 2급 이상으로 해야 경쟁력 있는 업체가 들어올 텐데요. 3급으로 낮추면 너무 많은 업체가 몰려서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2급으로 제한하면, 우리가 발굴한 현지 NGO 중에서 참여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져요. 그들의 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것도 이 사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인데…" 팽팽한 논리 대결과 때로는 감정 섞인 설득 끝에, 우리는 겨우겨우 합의점을 찾아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추며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예루살렘의 찰나, 성스러운 슬픔과 한 줌의 위안

오전 11시 15분, 숨 가쁜 최종 조율을 마치고, 우리는 아주 잠깐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둘러볼 시간을 가졌다. 신 교수님은 오후에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 함께하지 못했지만, 카카오톡으로 "추천하는 기념품 상점입니다. 요 근방으로 옆집들 들어가 보시고 가격 흥정 하심 됩니다"라며 친절하게 상점 정보를 남겨주었다. 이곳은 누구에게도 온전히 속하지 않은 채, 수천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성스러운 공간이자 동시에 첨예한 갈등의 현장이었다.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모두에게 의미 깊은 이곳에서, 종교와 국적을 초월한 어떤 근원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듯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의 육중한 문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자, 헤롯 시대의 아치형 구조물이 나타났다. 수천 년 전의 돌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듯,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저게 예루살렘 스톤이래요. 바늘에는 저렇게 지나가면 이렇게 뭐가 많이 지나가 가지고 이렇게 된대요." 누군가의 설명이 아득하게 들렸다.


오래된 가게들이 즐비한 시장 골목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평범한 여행객이 된 듯 기념품을 골랐다. 한 동료가 능숙하게 상인들과 흥정을 벌여 좋은 가격에 몇 가지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친구야, 좀 싸게 해줘. 괜찮게 주면 이것저것 더 살테니까" 그의 넉살좋은 언변에 상인도 웃음을 터뜨렸다. 남 과장님은 팔순 노모를 위해 소박하지만 정교한 자개로 장식한 올리브 나무 십자가를 골랐고, 나 역시 성당에 다니시는 어머니를 위해 작은 십자가와 성수가 담긴 작은 병을 샀다. 이 작은 성물들이 이곳의 평화를 향한 간절한 기도가 되어주기를, 그리고 멀리 한국에 계신 어머니들께 이곳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랐다. 또 다른 동료는 어제 화장품 가게에서 가격을 잘못 보고 잔뜩 골랐다가, 계산대에서 669달러라는 말에 식겁했던 아찔한 경험담을 털어놓아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다행히 카드가 안 긁혀서 살았어요. 내일 아침에 다른 카드 가지고 온다고 했는데, 지금쯤 그 가게 주인은 저를 기다리고 있겠네요." 그의 익살에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 근육이 잠시나마 풀리는 듯했다. "저도 제가 내년까지 기다릴 정도로 비싸더라고요, 금액이." 다른 동료의 맞장구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찰나였다. 오후 2시 체크아웃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둘러 호텔로 뛰다시피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최 코디에게 짧지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마침내 공항으로 향하는 벤에 올랐다.


보이지 않는 벽, 떠나는 자의 고초: 벤구리온의 붉은 딱지

공항으로 향하는 벤 안, 창밖으로 익숙한 듯 낯선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남은 셰켈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여기 바로 옆에 환전하는데 있던데." "한국에서는 환전 안 되실 거니까, 공항에서 하시거나 기념품을 사시는 게…" "공항 환율은 안 좋겠죠?" "베들레헴 환전상은 완전 사기꾼이던데. 40만 원 바꿨는데 나중에 계산해보니 8만 원은 거져 먹었더라고요." 씁쓸한 경험담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전 최 코디는 공항에서의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이제 거기 가시게 되면 옆에 이렇게 딱 서 있고 사람들이 둘씩 서 있어요. 분위기를 먼저 보고 사람들이 스캔하는 있거든요. 되게 친절해요. 영어도 잘하고. 근데 거기서 하면 번호 스티커를 붙여줘요. 옛날에는 번호가 높아질수록… 요즘도 똑같아요. 이스라엘이 제일 싫어하는 게 거기서 거짓말하는 거거든요." "여권 기록에 예전에 여러 번 오셨던 분이 있었나 봐요. 서안지구 갔는데 안 갔다고 했다가 걸리신 거예요. 근데 왜 거짓말했냐니까, 너네가 뭐라 할까 봐 거짓말했다고 솔직하게 말하니까 그냥 넘어갔대요." "아랍어로 된 우리 자료 있잖아요. 그거 저는 꼭꼭 숨겨놨어요." "예루살렘에서 누가 선물 줬다고 하면 안 돼요. 가방까지는 잘 안 열어보는데, 혹시라도 가방이나 핸드폰을 열고 이메일, 전화번호 검색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물병에 붙은 라벨조차 신경 쓰였다. "코디님, 이거 이렇게 팔레스타인 라벨 붙어 있는 상태로 물병 들고 다니면 좀 그렇죠?… " "그런 철저함, 좋습니다." 핸드폰의 팔레스타인 사진은 이미 다 지웠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다시 한번 스마트폰을 점검했다.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요새와 같은 삼엄한 경계 태세가 우리를 맞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오후 9시 55분,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카톡을 남기자마자, "헛, 방금 공항 직원이 영어 제일 잘하는 두 사람 찾더니 따로 데려갔어요 ㅎㄷㄷㄷ"라는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신 교수님과 서 전문가님이 지목된 모양이었다. "오오오~~~ 별일 아닐 거예요. 사람들이 7명이나 되니 효율적으로 일하려고 그러는 걸 겁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출국장 입구, 보딩패스와 여권을 확인하는 첫 번째 관문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 차장님의 여권을 보던 직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레드, 레드 라이트. 이상 신호가 뜹니다." 그러고는 저쪽 시큐리티 데스크에 가서 다시 확인을 받고 오라고 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시큐리티 데스크의 여성 직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 차장님과 그를 따라나선 김 팀장님을 번갈아 보며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나? 동행자 그룹은 총 몇 명인가? 여행 오기 전에 서로 아는 사이였나? 팔레스타인 간 적 있나? 라말라, 베들레헴, 제리코? 어느 호텔에 머물렀나? 체류 기간은? 여기 있는 동안 뭐 했나? 방문한 곳 다 말해봐. 직업은? 뒤에 저 사람들 일행 맞나? 선물이나 기념품 받은 거 있나? 다른 사람 부탁받은 물건 있나?" 마치 취조실에 앉은 듯한 압박감. 최대한 침착하게, 미리 준비했던 대로 답변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미심쩍었는지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10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다른 남성 직원을 대동하고 나타나서는 더욱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이 바코드는 어디서 받았나? 당신 짐은 계속 직접 소지하고 있었나?" 마치 그들이 뭔가 숨기거나 위험한 물건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몰아붙였다. 결국 그들은 여권에 붙어 있던 기존 바코드를 떼어내고, 새로운 바코드를 붙여주며 마지못해 통과시켰다. 카톡방에는 "한 20분 잡혔다 1차 저지선은 통과했습니다. 체크인 줄에 왔어요. ^^"라는 안도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코디님은 "축하드립니다. 나름 빠른 속도입니다!!! 아주 좋구만요!!!"라며 격려를 보냈다.


그렇게 첫 번째 관문을 겨우 통과하고 짐 검사대로 향했다. 노트북, 태블릿, 휴대용 모니터, 심지어 C-타입 케이블까지 전부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 차장님의 개인 가방이 문제였다. 직원은 그의 가방을 옆으로 빼더니, 안에 있던 내용물들을 일일이 다 펼쳐놓고 확인했다. 하다못해 케이블 뭉치까지 꼼꼼히 살폈다. "가방에 장비가 많으시군요." 비꼬는 듯한 말투. 심지어 가방 깊숙이 넣어둔 작은 전자기기까지 발견하고는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냥 개인용 물품입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통과시켰다.


마지막 관문은 출국 심사대였다. 자동 출입국 심사 기계에 여권을 스캔했지만, 남 차장님의 화면에는 계속해서 오류 메시지만 떴다. "패스포트 확인 불가. 보더 컨트롤로 가시오." 네 군데의 기계를 전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직원의 안내에 따라 ‘보더 컨트롤’이라고 적힌 작은 사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여성 직원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 차장님의 여권과 보딩패스를 받아들고는 아무 말 없이 빨간색 카드를 내밀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레드 카드인가. 이제 정말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건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직원이 나타나더니 그 빨간 카드를 회수해 휴지통에 버리고는 그냥 가라고 손짓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순간, 안도감보다는 깊은 허탈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전 옷 벗는 거 빼고 다 걸린 거 같네요 ㅎ" 남 차장님의 카톡 메시지에는 씁쓸한 유머가 묻어났다. 김민종 소장님은 "ㅎㅎㅎ 이스라엘은 두 분을 픽하셨군요 샬롬"이라며 애써 분위기를 풀려 했지만, 우리는 웃을 수 없었다.


우리 팀 중 유독 남 차장님과 김 팀장님이 집중적인 고초를 겪었다. 다른 동료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했지만, 그들 역시 보이지 않는 감시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곳에서 ‘합리적인 이유’란 얼마나 허약하고 자의적인 개념인가.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은 존재일 뿐이었다.


잿빛 하늘 너머, 세바스티아의 평화를 꿈꾸다

마침내 모든 관문을 통과하고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깊은 피로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아이고야, 7시 40분이네. 생각보다 시간이 꽤 남았어요. 딱 2시간 뒤 출발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시계를 확인했다. 게이트 앞에서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방금 겪었던 황당한 일들을 곱씹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최영순 전문가님이 "모두 무사히 들어오셨으니 간단하게 음료나 샌드위치 어떠세요? 게이트 앞에 카페가 있어요"라고 제안했지만, 다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빅맥 세트가 한국 돈으로 만 육천 원이 넘는다던데, 여긴 두바이보다 더 비싼 것 같아요." "원래 성지 순례객들 바가지요금이 역사와 전통이 깊다고 하잖아요. 십자군 원정시대부터 예루살렘은 이미 그런 도시였다고…" 공항 면세점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한 푸념은, 어쩌면 방금 전까지 겪었던 극도의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우리 나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은 마치 지난 열흘간 우리가 마주했던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압축해 놓은 듯했다.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하며 작아지는 불빛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세바스티아를 떠올렸다. 그곳의 아이들,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 그리고 우리가 함께 그렸던 미래의 청사진들.


우리의 짧은 방문과 서투른 계획들이 과연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총구 앞에서 돌멩이를 던져야 했던 아이들의 위태로운 일상에, 우리는 어떤 위로와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하필 어린이날에 마주했던 그 비극적인 현실은, 쉽게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로 남았다.


국제 정치와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은 때로는 너무 쉽게 외면당하고 잊힌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그들의 삶과 열망은, 단순한 통계 숫자나 뉴스 기사 한 줄로 치부될 수 없는 살아있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그들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세바스티아가 그저 평범한 웃음과 일상이 가득한 마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잿빛 하늘 너머, 그곳에는 분명 우리가 심고 온 희망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비행기가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고, 다시 한번 환승을 기다리는 동안 신 교수님은 카톡방에 조금 전 벤구리온 공항에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잊어버리기 전에 기출문제 남기고 갑니다’라며 상세한 출국 심사 가이드라인을 올렸다. 그 친절함과 세심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우리는 이 지난한 여정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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