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사진에 취미를 붙이면서부터 덕진공원에 종종 오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가끔씩 주로 약속의 장소로 덕진공원을 이용하는 정도였다.
사진을 찍으면서부터 똑같은 장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스레 ‘발견’하였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나 상황을 접하게 될 때면 뿌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창포꽃 가득한 장면을 보았을 때, 물닭의 어미가 새끼를 양육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연꽃의 형태와 색감을 보았을 때 등등. 공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또한 각기 다른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앵무새를 어깨에 올려놓은 채 산책을 나온 여인도 있었고, 벤치에 앉아 악보를 보며 색소폰을 연습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외국인도 종종 마주치게 되는데, 2010년 봄에 만난 외국인 두 명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다.
4월 30일이었다. 벚나무에 꽃이 진 자리에서 나온 신록이 연한 초록빛으로 나무를 물들이던 때였다. 벚나무 아래로는 하양, 분홍, 빨강의 철쭉꽃들이 울긋불긋 피어나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공원의 둘렛길을 천천히 걸으며 가끔씩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외국인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남자는 흑인이었고 여자는 백인이었다. 궁금했다.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그러나 낯선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건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남자가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콤팩트 카메라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Excuse me, could you take a photo of us?”
(실례합니다만,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에게서 콤팩트 카메라를 건네받았다.
“Sure.”
(물론이죠.)
남자와 여자가 밀착한 채 다정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했고, 나는 거리를 조절하며 움직이다가 멈춰선 다음 콤팩트 카메라의 액정을 보며 셔터를 눌렀다. 그런 다음 목에 걸고 있던 내 DSLR을 가리켜 보이며 ‘이걸로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자도 환한 웃음을 내보였다. 나는 행복에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을 DSLR에 담았다.
“Thank you.”
(고맙습니다.) 남자가 다가와 말했고,
“You’re welcome.”
(천만에요.) 하며 나는 그에게 콤팩트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그런 다음 궁금하던 것을 입에 올렸다.
“By the way…… where are you from?”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디서 오셨어요?)
“Jamaica.”
(자메이카에서요.) 남자가 대답했다.
“Then…… lady……?”
(그렇다면…… 여자 분은요?) 여자를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I’m from Russia.”
(저는 러시아에서 왔어요.) 여자가 대답했다.
자메이카 남자와 러시아 여자라……. 궁금증이 더 짙어졌다.
“How do you know each other?”
(두 분은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그러자 남자가 온화한 표정으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Yula visited Jamaica for tourism seven years ago, and we happened to meet on the road. I guided her to several tourist attractions. Then we had a cup of coffee at the cafe, and we had a good feeling of each other. So She asked me to visit Russia if there's any chance. 3 years later from that day, I visited Russia, and we became lovers and traveled together.”
(7년 전에 율라가 자메이카에 여행왔었고, 길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죠. 제가 율라에게 몇 번 길 안내를 해 주었고, 함께 커피도 마시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어요. 자메이카를 떠나면서 율라가 기회가 되면 러시아에 놀러 오라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3년 뒤에 율라를 만나기 위해 러시아로 갔어요. 이후로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되었죠.)
말을 하면서 남자는 가끔씩 여자를 쳐다보았고, 그때마다 여자는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Wow, I can call it meeting by destiny.”
(와, 운명적인 만남인가 보네요.)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말을 받았다.
“I think destiny is not fixed, rather than, we can make destiny ahead of us. Every moment is precious moment which will not come again.”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매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귀중한 순간이잖아요.)
가슴에 깊이 파고드는 말이었다.
“Oh… it's wonderful to hear that.”
(오, 멋진 말이네요.)
나는 다시금 감탄하며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 중에서도 전주에는, 전주 중에서도 덕진공원에는 어떻게 하여 오게 되었는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남자가 “Nice meeting you.”(만나서 반가웠습니다.)라는 말을 했고, 나는 그래서 “Nice meeting you. Have a good trip in Korea.”(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멋진 여행 되세요.)라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It was nice meeting you.”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여자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들은 다시 가던 길을 갔고, 나는 멈춰 선 채 그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매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귀중한 순간이니까.’ 여자의 말이 가슴속에서 계속 울렸다.
10년이 흐른 지금도 간헐적으로 여자의 말이 가슴속에서 메아리친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