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고 영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고 비슷한 말들이 이어질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전화를 걸었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난 건 아닌 듯했다. 다행이었다. 자신이 원래 지닌 우울감에 재현의 절망감이 합류하여 벌어진 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라앉은 마음 위로 슬픔이 소스처럼 뿌려지는 느낌이었다. 통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스의 양은 질퍽하게 늘어나리라.
“시간 되는 대로 문자 보내주세요. 끊을게요.”
그리고 영기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결혼했으면 재현과 비슷한 상태로 살고 있으리라, 하고 영기는 생각했다. 재현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겠지, 아마도.
영기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는 외투와 바지와 양말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만 싶었다. 우울증 약을 먹어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마저 스며들었다. 이런 상태가 며칠간 지속된다면 약을 먹지 않고서는 헤어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악령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며, 사람끼리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온몸으로 생생하게 실감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외로움이 짙어지면 우울증에 걸리고, 우울증이 짙어지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인식 또한 온몸을 휘감아왔다.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건 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영기는 자각했다. 이럴 땐 차라리 겨울잠에 빠져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많은 동물들이 괜히 겨울잠을 자는 건 아닐 것이다. 오랜 진화의 과정 속에서 그것이 생존과 생활에 이롭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에 자연히 선택했으리라.
그동안 몸부림치며 살아왔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나아지기는커녕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숙이 늪에 빠져드는 상태가 되었고, 그럴수록 마음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언제 손님이 찾아올지 몰라 마음 졸이며 오전 아홉 시만 되면 꼬박꼬박 문을 열었고, 저녁을 먹고 나서도 손님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무실에 불을 켜고 앉아 있은 적도 많았다. 일이 생기면 주말이고 휴일이고 가리지 않고 일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쉬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돈벌이가 괜찮아질까,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를 궁리하며 틈틈이 철학책, 심리학책, 자기계발책 등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때로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강연을 찾아다녔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성공의 비법 같은 내용들을 둘러보며 노트에 필기를 하고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시선만 이리저리 분산되고, 허망한 기분만 남겨질 따름이었다. 숱한 정보를 접할수록 커가는 건 불안감, 소외감, 박탈감 같은 감정들이었다. 남들은 저렇듯 잘나가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강박 증상까지 나타났다. 문을 잠그고 나서 다시 잘 잠겼는지 확인 또 확인하게 되었고, 아파트나 계단이나 횡단보도 같은 것을 보면 몇 개로 나뉜 층이나 선인지 숫자를 세어보는 습성까지 생겼다. 사소한 걸로도 화가 나고, 욕구불만에 사로잡히고, 그러나 해소할 길이 없어 밤이면 술을 마시고 잠에 빠져드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삶이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때때로 들긴 했지만 깊이 헤아리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 채로 그저 하루하루 일상의 물살에 몸을 내맡긴 채 흘러가는 시간들이었다.
인간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하는 이유가 겨울잠을 자지 않아서임이 분명하다고 영기는 결론을 내렸다. 한 달, 아니, 까짓것 두 달 동안 겨울잠에 빠져든다고 해서 큰일 날 게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런 뒤에라야 진정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계시처럼 몸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나자 몸에서 우울의 입자가 몇 개 빠져나간 듯 느껴졌다. 두 달 간의 월세를 충당할 일이 걱정스레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건 깨어난 이후에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영기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을 먹고 나서 스튜디오로 향했다. 종이에 굵직한 펜으로 ‘당분간 휴업’이라고 쓴 다음 출입문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두 달 간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양의 두유, 땅콩과 아몬드와 호두를 샀다.
집으로 돌아온 영기는 다시 옷을 벗고 스마트폰의 전원을 끈 다음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