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아 보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음식점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빚만 떠안게 되었고, 지금은 막노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아내로부터는 이혼을 당했고, 오랜만에 한 번씩 만나는 아들로부터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딸로부터는 냉대를 당한다고 했다. 결혼을 안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영기는 잠시 했다.
“내 나이 50이지만 아직 인생은 많이 남았어. 100세 시대니까 이제 반밖에 살지 않은 거라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내가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아서 막노동을 하고 있지만, 머잖아 대한민국 최고의 사업체를 꾸리게 될 거니까 그리 알아!”
재현은 소주를 마시며 큰소리쳤다. 어떤 사업을 할 거냐고 영기가 묻자,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샘솟고 있어. 아물거리는 그것들이 딱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 조만간 올 거야. 그때가 되면 마누라가 날 찾아와 싹싹 빌겠지. 아들놈도 딸년도 아버지를 우러러보겠지. 흐흐. 그때가 되면 내 자네에게도 한 자리 마련해 줄 테니까 나한테 잘 보여야 돼! 한 달에 천만 원 이상 벌게 해줄게.”
재현은 실현 가능성 없는 얘기들을 계속해서 주워섬겼다. 그런 허황된 꿈만이 그를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인 듯했다. 그러나 그가 큰소리칠수록 풍겨오는 건 절망의 기운이었다. 영기는 재현에게서 끼쳐오는 절망의 기운이 자신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2차는 값나가는 걸로 마시자고. 싸구려만 먹고 마시면 싸구려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야.”
영기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2차를 가고 말았다. 술을 마실 때면 한두 번 겪어온 일이 아니다. 맨정신일 땐 1차만 마시고 헤어져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일단 술을 마시고 나면 절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 날 숙취 상태로 힘들어하며 후회하는 일이 매번 반복되었다. 삼겹살집에서 밖으로 나왔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걸었고, 그러나 12월의 차가운 밤공기 탓에 빨리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었고, 하여 ‘카페’라고 쓰인 간판을 발견하자마자 그곳으로 들어갔다.
재현이 호기로운 목소리로 양주와 과일안주를 시켰다. 마담이 재현의 옆자리에 앉았고, ‘지숙’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영기의 옆에 앉았다. 재현은 다시금 실현 가망성 없는 사업 얘기를 곧 도래할 현실인 양 떠벌렸고, 마담과 지숙은 어머, 어머, 감탄을 연발했으며, 영기는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겼다.
영기는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어, 그래, 영기야.”
호기롭던 목소리는 모두 증발해버린, 한없이 침울한 목소리였다. 술 마시기 전에 보였던, 무엇엔가 심하게 짓눌린 듯한 태도와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잘 들어가셨어요?”
“응, 뭐, 그럭저럭.”
“제가 뭐 실수한 건 없나요?”
“실수? 그런 건 없고…… 그냥 조용히 얘기만 듣고 있었어.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느껴지던데. 얌전한 새색시 같았어.”
“아, 다행이네요. 필름이 끊겨서 기억나는 게 없어요.”
“나도 잘 기억나지 않아. 일어나 보니까 오후 두 시더라고.”
“몇 시쯤 밖으로 나왔나요? 나와서 바로 헤어진 거죠?”
“정확히는…… 모르겠어. 아마 두세 시쯤 되었을 거야. 영기 너는 걸어서 가겠다고 했고, 나는 택시를 탔지.”
“술값은 누가 냈나요?”
“내가 냈어.”
“많이 나왔나요?”
“뭐, 그냥…… 50도 안 돼.”
“50만 원이요?” 영기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제가 반절 낼 게요. 문자로 계좌번호 보내주세요.”
“걱정하지 마. 카드가 있으니까 문제없어.”
카드가 있어 문제될 게 없다니, 이 무슨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영기는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며칠 노가다 뛰면 될 일인데 뭘…….”
“안 됩니다. 그런 큰돈을……. 꼭 계좌번호 보내주세요.”
“1차는 영기 네가 냈으니까 2차는 당연히 내가 내야지. 게다가 양주 마시자고 한 건 나니까.” (#3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