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_다시 모이는 내 자식들

팔자

by 아르칸테

대전의 겨울은 유난히도 찼다. 비닐창이 덜덜 떨리는 원룸.


그 작은 방에 영란은 아이 둘과 함께 숨을 죽이며 살고 있었다. 첫째 아들, 그리고 둘째 아들.

이 작은 방은 그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였지만, 동시에 불안과 절박함으로 가득한 피난처이기도 했다.


영란은 매일 새벽 장에 나가 허드렛일을 했다.


김치를 담그고, 설거지를 하고, 물건을 나르고, 오후엔 식당에서 일했다. 밤이


되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재우고, 새벽 세 시면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단 하루도 예외 없이. 하지만 단 한 번도


아이에게 그 피곤함을 들키지 않았다. 늘 웃는 얼굴로, 따뜻한 손길로.

그렇게 영란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마가 내리던 밤이었다.


영란은 시장에서 일하다 젖은 옷 그대로 집에 돌아왔다. 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아이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가슴이 조여왔다. 그날 밤, 병원에 실려갔다. 과로와 탈수, 그리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담석증.


막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눈을 감고 있던 영란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건...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떨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야... 나.. 나 엄마 데려가줘... 제발... 나 이제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아.


아빠 무서워… 매일 술 먹고, 엄마 욕하고, 나랑 동생 보고도 소리 지르고...

밥 하라고 하고 청소하라고 하고 맨날


맨날 나한테만


머라 하고 맨날 막냇동생은 자기 얼굴 닮았다고 좋아하고


그리고 할머니는 내가 엄마 닮았다고 욕하고 싫어하고


또 큰아빠는 막내랑 나랑 나가서 엄마 찾아오라 그러고


안 찾아오면 죽인다 그랬고 공짜로 있지만 말고


집청소 하래.."


"엄마.. 너무 무서워"


제발 엄마 데리러 와줘..."


그녀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고.


눈물이 나기엔 너무 깊었고, 그 눈물조차 슬픔이 먼저 삼켜 버렸다.


영란은 숨을 삼켰다. 수술을 마친 지 하루, 아직 링거가 손등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떤 고통도 무의미했다. 엄마로서의 본능만이 남았다.


그녀는 수액을 머리에 올리고 병원복을 걸친 채 간호사를 속이고 몰래 나와 전화를 했다.


"택시 불러주세요. 지금 가야 해요. 지금 당장."


대전에서 출발한 새벽 택시. 차 안은 말없이 흘러가는 전조등 불빛과 빗소리만 가득했다.


영란은 병원복 만을 걸친 채, 아이가 있는 집 주소를 손에 쥐고 있었다.


온몸이 떨렸지만, 마음만큼은 단단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초등학생 딸이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아이가 영란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뒤에 현관에서 반쯤 몸을 걸치고 막 사냥이


끝난 짐승처럼 술에 취해 곤히 자고 있었다.


"엄마... 엄마아!!!"


영란은 한쪽 팔로 수액을 잡고 한쪽팔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숨도 못 쉴 만큼.


"우리 딸... 엄마 왔어.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엄마가 데려갈게. 절대 다시 안 놔줄게..."


그 옆방에서 막내딸이 나왔다. 동그란 눈에 놀람이 담겨 있었다. 그 아이도 몇 초간 얼어붙더니, 울먹이며 잔뜩 겁먹은 채로


"엄마... 나도 갈래... 나도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 나도 아빠 싫어..."


영란은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다시 울었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동시에 그 아이들의 체온이 영란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날 밤, 모녀는 다시 택시에 올랐다. 밤길, 영란은 아이들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엄마가 지켜줄게. 절대, 다시는 그런 데 안 보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같이 살 거야."


"우와! 진짜 이제 아빠랑 큰아빠랑 할머니 안 봐도 되는 거야?"


"우와 이제 우리 밥 먹고 집에서 뛰어놀 수 있겠다.!!"


"아빠는 맨날 집에 오면 술에 취해서


치킨만 사다 주고."


"맨날 우리한테 안마만 시켰어."


그녀는 아이들의 순수한 목소리로 악의가 들어가 있지 않는 말투로


그저 아빠를 혼내달라는 그 아이들의 목소리에


그녀는 많은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대전의 원룸에 도착했을 때, 첫째 아들과 둘째가 문 앞에서 서 있었다.


형은 아무 말 없이 막내들을 끌어안았고,


셋째는 주방에서 미리 끓여 놓은 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


좁은 방. 한쪽에는 전기장판, 한쪽에는 작은 식탁. 하지만 그날 밤만큼은 그 좁은 공간이 무대를 닮아 있었다.


재회와 눈물, 온기로 가득한 무대.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영란은 그 사이에 앉아 따뜻한 밥을 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시작이야. 이번엔 진짜로... 다시는 안 뺏겨.”


그녀는 그렇게, 또 한 번 가족을 되찾았다.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앞치마도 제대로 두르지 못한 채, 마루에서 걸레를 짜던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받기 전부터 느낌이 왔다.


"어디야, 씨 X아."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잠든 사이에 몰래, 씨 X-야, 그게 네가 할 짓이냐?"


술기운이 덜 빠진 쉰 목소리. 비틀거리는 혀끝. 그놈이었다.


“애들 다 데려갔냐? 내 허락도 없이? 미친 X이 진짜—”


“말해봐. 어디 있냐. 당장 안 데리고 오면 진짜 죽여버릴 줄 알아.


씨 X, 내가 네 인생 망가뜨렸냐? 왜 자꾸 피해자 코스프레야, 어?


지 새끼들 데리고 도망 다니는 게 그렇게 멋있냐?”


엄마는 한 박자 숨을 들이마시고, 수화기를 귀에서 살짝 떼었다. 그리고 그대로 소리쳤다.


“야이 개 XX야!!!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애들 건드리지 말라고!!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참고 살았는 줄 알아?


너 술 쳐 먹고 애들한테 소리 지르고, 쌍욕 하고, 손찌검한 거 내가 다 못 본 줄 알아?


내가 사람이라서 참았지.


그런데 이제 끝났어.


내가 오늘 이 순간부터, 네 인생에서 니 애들 싹 다 끊어준다.”


“야… 너 지금—”


“닥쳐!!!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이 개 같은 새 X야.


"아 X발 머 하냐 안 닥쳐"


"나 머 하냐고? 청소한다


네 새기 썩은 냄새 다 지우고 있는 거야."


네가 처먹고 자빠진 동안 나는 내 새끼들 챙기느라 단 하루도 편히 못 잤어.


너 같은 인간한테 애들 맡긴 내가 X신이지.”


“너 지금 내 자존심을”


“자존심?! 너한테 자존심이 있어?


"자존심이 뭔지는 알고 떠드는 거야?"


남의 등골 빠지게 벌어다 준 돈 처먹고, 다른 년이랑 바람피우고,


집구석에서 똥개처럼 술 퍼마시고 누워있던 새 X가 자존심 운운하냐?”


"네가 자존심을 알아?"


"자존심 아는 새기가 그렇게 살아?"


엄마는 수화기를 움켜쥔 손에 핏줄이 섰다.


거거실 넷째 딸은 조용히 어린 동생을 안아주었다.


"아 너 씨 X-아 아가리 안 닥쳐?"


그녀는 더 힘찬 목소리로 그를 몰아내듯이 다시 소리쳤다.


"입 다물어! 말하지 말라했지!!"


“오늘부로 끝이야. 애들한테 전화 한 통만 해봐.


찾아오기만 해 봐. 그때는 네 손, 네 다리, 네 이빨부터


하나하나 차례대로 부셔줄게.


내가 너를 인간으로 안 본 지 오래야.”


“.....여보?...”


“여보? 내가 왜 네 마누라야


다신 전화하지 마.


다신 오지 마.”


뚝.


그녀는 숨을 고르지 않았다. 바로 전기포트를 올리고, 다시 바닥을 닦았다.


눈엔 물기가 맺혔지만, 그녀의 손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몰아낸 듯했지만


그 후로도 뜨문뜨문


그는 영란에게 문자로 용서를 구했고


그녀가 용서를 받아주지 않으면


욕을 하고 영란을 다시 원망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댔고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그녀를 하염없이 괴롭혔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피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렇게 안 해주면 또 그놈이 찾아와 이번엔


가족을 다 앗아 갈 거라는 공포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