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해도 될까요?
교도소로 향하는 길
“그 자식, 참 웃긴 놈이었지”
서울 외곽.
회색빛 도로 위로 자동차가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창밖엔 스산한 겨울 나무들만 휙휙 스쳐갔고, 차 안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최영란은 팔짱을 낀 채, 조수석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김대식은 운전대를 잡은 채,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됐어.”
“네.”
“.......”
“그래도 조금 긴장되시죠?”
“......”
“혹시… 그 사람하고는 어떤 사이였는지, 여쭤봐도 돼요?”
“......”
한참을 침묵하던 영란이
갑자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스무 살 때였어.”
“네?”
“그 자식, 주병진. 나한텐… 인생에서 제일 뜨거운 불 같았던 놈이었지.”
대식은 슬쩍 눈을 크게 떴다.
지금껏 영란은 한 번도 그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었다.
“처음 본 건 대학 축제였어.
내 친구 따라 간 학교에서 기타 치던 놈.
키도 크고, 말빨도 좋고, 뭐랄까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어.
그때만 해도 난 그런 게 멋져 보였거든.”
“그래서 만나셨던 거예요?”
“응.
그날 밤, 걔가 했던 말 아직도 기억나.
‘나는 여자한테 거짓말 안 해요.
거짓말 할 시간에 그냥 솔직하게 살아요.’
그딴 말을 하는 놈을 내가 믿었다, 이 말이지.”
영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딱 6개월 만났어.
근데 그 사이에 내 통장 깠지, 내 이름 팔아먹고
내 친구들한테 돈 꿔달라 했지,
내 오빠한테는 ‘사업 같이 하자’고 투자 받았지.”
“헉”
대식은 놀란 숨을 삼켰다.
“처음엔 진짜 몰랐어.
그 자식, 거짓말을 진심처럼 해.
울면서 ‘내가 너 없으면 죽는다’ 그러는 놈을
어떻게 의심하겠냐고.”
영란은 입꼬리를 한 쪽만 올려 비웃듯 말했다.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어떻게요”
“내 오빠한테 맞고 튀었어.
돈 다 빼돌리고, 연락 끊고, 사라졌지.”
“.......”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요..”
“나, 그 자식 찾으려고 2년을 돌아다녔어.
그땐 화도 화지만
진심이었거든.
내가 뭔가 놓친 게 있었을까 봐.
혹시라도 오해였을까 봐.”
김대식은 할 말을 잃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놈을 내가 왜 다시 보러 가는 줄 알아?”
“....정리하려고요?”
“정리?
아니지.
내가 그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야.”
영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말야.
혹시라도 그놈이 아직도 똑같은 말투로 살아있다면,
그 말 해주고 싶어서.”
“어떤 말이요?”
“‘넌 여전히 웃기다, 병진아.’
내 감정 다 짓밟아놓고,
결국은 교도소에 들어앉은 꼴이라니.
자업자득이지.”
김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오시길 잘하셨어요.
말 안 하면, 평생 목에 걸려 있을 테니까요.”
“그런 건 없어.
난 원래 털면 잊는 성격이야.
근데 그 자식은 털리질 않더라.”
잠시 후, 교도소 진입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대식이 브레이크를 천천히 밟았다.
“다 왔네요.”
“그래.”
“영란 씨.”
“응?”
“진짜… 잘했어요. 여기까지 온 거.”
“알아.”
영란은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끝장 보러 가는 거야.”
교도소 입구.
회색 담벼락과 철제 대문, 망루 위에 있는 CCTV까지.
이곳은 사람이 아니라 죄가 사는 곳 같았다.
차에서 내린 최영란은 말없이 선글라스를 썼다.
그녀는 바람결에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이제 진짜 끝장 보러 간다.”
김대식은 고개를 숙이며 따라 걸었다.
접견 신청서 작성, 신분증 확인, 방문증 수령.
모든 절차를 마치고, 금속탐지기를 지나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칸막이와 투명 유리벽, 수화기를 든 사람들.
다들 무언가를 포기한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최영란은 꿋꿋하게 앉았다.
손은 떨렸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교도관의 안내로 수형자 한 명이 걸어들어왔다.
유리벽 너머 주병진이 들어섰을 때,
영란은 처음으로 가슴이 ‘철컥’ 하고 잠긴 느낌을 받았다.
그 얼굴,
참 낯설게 늙어 있었다.
눈 밑은 퀭하게 꺼져 있고, 입가는 힘이 없었고,
걸음걸이조차 예전의 그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뭔가를 속이려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익숙한 눈동자. 그게 가장 불쾌했다.
수의번호가 적힌 잿빛 옷, 핼쑥한 볼, 내려앉은 어깨.
그리고 그 얼굴. 주병진.
“....영란이냐?”
그 한 마디에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나다. 네가 그렇게 모른 척하던 그년.”
주병진은 수화기를 들었다.
영란도 천천히 들었다.
“이럴 줄 몰랐어.”
“당연히 몰랐겠지. 넌 늘 그래.
그날도 그랬잖아. 네 말만 하고, 네 욕심만 챙기고,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진 안중에도 없었잖아.”
병진은 고개를 떨궜다.
“그땐 미안하단 말도 못 했네.”
“그래서 내가 왔어. 그 말을 들으러.”
병진은 마지못해 한마디 던졌다.
“..미안하다, 영란아.”
영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걸로 됐어.”
“정말이야?”
“그래. 근데 그 말은 지금 네가 나한테 한 게 아니라,
과거의 나한테 해준 거라 생각할게.
지금의 나는 너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야.”
주병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래도 너를 잊은 적은 없어.”
“거짓말 그만해.
넌 사람 잊는 게 아니야. 사람을 기억에서 꺼내 쓸 뿐이지.”
영란은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놨다.
“잘 살아. 아니, 잘 벌 받아.
넌 말이야, 사랑을 이용했고, 사람을 속였고,
끝까지도 네 감정을 정리 못 해.”
“'''''''.”
“이게 마지막이야. 난 더는 뒤 안 돌아봐.”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교도관이 수형자를 데리고 나가려는 순간,
병진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영란아, 나 진짜 그때 널”
“됐어.
진짜였는지 아닌지는, 이제 상관없어.”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 나왔다.
차로 돌아오는 길, 김대식은 묵묵히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영란이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끝났다.”
“.....네.”
“이상하게 허하진 않아.
그냥, 시끄럽던 내 머릿속이 잠잠해졌달까.”
김대식은 시동을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해주길 바랐어요.”
“나도 몰랐지.
이렇게 깔끔하게 끝날 줄은.”
“그 사람, 후회하더라고요.”
“그건 그 사람 몫이지.
나는 나 자신이 안쓰럽지 않아진 게 중요해.”
창밖엔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었다.
조용한 오후,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잠시 후, 김대식이 입을 열었다.
“이제 다음 사람 보러 가실 건가요?”
영란은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응. 다음은 좀 오래 생각했던 사람이야.”
“힘들겠네요?”
“모르겠어. 근데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김대식은 조심스레 물었다.
“영란 씨.
혹시... 그 여섯 명 다 보고 나면,
어디로 가실 건데요?”
그 질문에 영란은 처음으로 조용히 웃었다.
“글쎄.
그때 당신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앉아볼까?”
김대식은 아무 말 없이 운전대 위에서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뻗어가는 노을빛에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