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해도 될까요?
서문진, 겉만 반짝였던 남자
서울 근교, 단아한 전원주택.
붉은 벽돌과 하얀 담장이 어우러진 조용한 마당 위로 겨울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정원엔 작은 온실과 감나무가 있고,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창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김대식이 대문을 열며 들어섰다.
손엔 선물용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김대식은 말없이 마당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와 진짜 잘 살아. 이 동네에서 이런 집은 처음 본다.”
그때 초롱이가 툇마루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김 대식아저씨~ 이제 왔어요?”
김대식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초롱아. 너는 또 왜 이렇게 성큼성큼 자라냐? .”
초롱이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김대식을 위아래로 훑었다.
“대식 아저씨도 전보다 멀끔해졌네요? 혹시 우리 엄마 앞이라서?”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예의잖아. 원래 나 이런 사람이야.”
“하긴. 엄마가 말하긴 하더라. 아저씨는 딱 착한 사람이라고.”
그 말에 김대식은 괜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도 착하기만 하면 안 되는데 뭔가 결단력 있는 사람이어야지.”
“오? 그 말, 엄마한테 해봐요. 아마 웃다가 등짝 때릴걸요.”
잠시 뒤, 현관문이 열렸다.
최영란이 검은 터틀넥에 회색 울 코트를 걸친 채 나왔다.
간결하고 단정한 스타일이지만,
어딘가 강단 있는 기품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최영란은 둘을 보며 말없이 구두를 신었다.
김대식이 말을 건넸다.
“집이 참 예뻐요. 잘 어울려요, 영란 씨랑.”
최영란은 짧게 웃으며 말했다.
“칭찬 말고, 배고프니까 빨리 나가자.”
초롱이는 엄마 옆에 서며 말했다.
“엄마, 아저씨가 오늘 파스타 먹자고 했어요. 분위기 좋은 데 있대.”
최영란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파스타? 내가 좋아한 적 있었나?”
김대식이 곧장 대답했다.
“처음 드시는 줄 알았어요. 기회가 되면, 좋아질지도 몰라서요.”
초롱이는 팔짱을 끼며 킥킥 웃었다.
“두 분 진짜 영화 같다. 저 없을 땐 무슨 얘기 하는지 궁금하네.”
최영란은 장갑을 끼며 초롱이를 흘겨봤다.
“넌 궁금한 게 왜 이렇게 많냐. 네가 안 나오면 조용해서 좋기만 하거든.”
“그러게. 내가 없으면 어색해서 밥도 못 먹는다고 했던 분이 누구셨더라~?”
김대식이 웃으며 중재했다.
“자자, 싸우지 말고 얼른 타요. 예약 시간 지나면 기다려야 해요.”
세 사람은 함께 차에 올랐다.
서울 연희동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실내는 꽤 붐볐다.
창가에 앉은 세 사람,
마치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단단했다.
“이거 봐. 내가 이런 데 오면 안 된다고 했지.”
최영란이 포크로 파스타를 휘저으며 말했다.
“딱 봐도 여자들이 좋아할 분위기잖아.
나 이런 데 불편하단 말이야.”
김대식은 웃으며 와인 잔을 밀어주었다.
“불편하셔도 드시는 건 아주 자연스럽네요.”
“그건 배고파서 그래.
배고프면 장소 따지냐?”
초롱이 피자를 들고 킥킥 웃었다.
“엄마는 배고플 땐 혁명도 안 하겠다.”
“그래. 배고프면 정권도 넘겨줄 수 있어.”
김대식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언이네요. 밥 앞에선 다 평등하니까요.”
최영란은 씩 웃었다.
“넌 말은 잘해. 근데 왜 이렇게 순해, 대식아.
사람 좀 물어 뜯을 줄도 알아야지.”
“제가요?
물어뜯다가는 영란 씨한테 먼저 맞을까 봐요.”
“맞을 짓 안 하면 안 때려.”
셋은 웃었다.
분위기가 흐뭇하게 무르익을 무렵, 김대식이 천천히 물었다.
“그... 네 번째 남자 얘긴 안 해주셨어요.
괜찮으시면, 어떤 분이셨어요?”
최영란은 와인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다녀온 여행처럼 아득한 먼 기억이 담겨 있었다.
“서문진.
그때 내가 서른셋이었고, 그놈은 서른여섯.
광고기획사 대표였고, 말도 번드르르하게 잘했지.
딱 보면 ‘어머님이 좋아하실 스타일’이야.
차도 벤츠 몰고 다녔고, 옷도 항상 맞춤 정장.
나는 그때 걔랑 결혼할 뻔했어.”
“왜 그만두셨어요?”
김대식이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엔 몰랐어.
근데 점점 알겠더라.
걔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고,
자기 옆에 둘 만한 ‘명함’으로 본 거야.
예쁘고 똑똑하고 돈도 좀 있는 여자를 옆에 두고
자기 완벽한 세계관을 완성하려고 했지.”
“아..”
김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뭔지 알 것 같아요.”
“그 사람, 항상 말을 이렇게 했어.
‘영란이는 분위기가 좋아, 내가 데리고 다니면 다 부러워하더라.’
내가 뭐 애완견이야? 데리고 다니게?”
초롱이 입을 틀어막고 킥킥거렸다.
“엄마 말 진짜 세다.”
“세게라도 안 하면 어째.
그때 파혼 안 했으면, 내가 지금 감옥 갔을 수도 있어.
살인미수로.”
김대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근데 잠깐만요.
그 이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왜?
또 뭔데?”
최영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김대식은 한 장의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넓은 잔디 위에서 찍힌 결혼식 사진.
꽃 장식 아래, 정장 입은 남자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고,
그 뒤로는 조용한 하객들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혹시 이 사람 아니에요?”
최영란은 화면을 보는 순간,
포크를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맞아.
저 얼굴, 내가 어떻게 까먹겠냐.
서문진, 저놈 맞아.”
“우와”
초롱이 들썩이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저씨, 이 사진 어디서 난 거예요?”
김대식은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3년 전에요.
제 친구 여동생 두 번째 결혼식이었어요.
그 신랑이 서문진이었고
제가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세상에
엄마 전남친이 아저씨 친구 여동생이랑 결혼했다고요?!”
초롱은 거의 책상에 엎드릴 듯 놀라며 외쳤다.
최영란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인간 재혼한 것도 웃기고,
그 재혼식을 네가 가 있었단 것도 신기하네.”
“그 결혼도 쉽지 않았대요.
제 친구 말로는 여동생이 워낙 반해서 주변 반대 다 무시했대요.
지금은 연락 안 하지만
그 사람이 아직 강남에 사무실은 있는 걸로 알아요.”
“그렇구나”
최영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보자.”
“정말요?”
김대식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그래.
가서 말이라도 해줘야지.
‘너 그때 나한테 빌린 470만 원, 기억은 나냐’고.”
초롱이 터지듯 웃었다.
“엄마 진짜 대박이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내 돈은 절대 안 잊어.
사랑은 잊어도 돈은 안 잊어.”
김대식은 웃으며 말했다.
“영란 씨, 진짜 멋있으십니다.”
“칭찬하지 마.
사람 약해지니까.”
“네 아니, 알겠습니다.”
초롱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이번 미션은 ‘서문진 만나러 가기!’
사랑 탐정단, 출동 준비 완료~!”
“야, 그만 좀 떠들어.
가만히 있어도 피곤해, 너.”
김대식은 초롱을 보며 웃었다가, 조용히 영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내일 출발할까요?”
강남 도산대로.
유리로 둘러싸인 오피스 빌딩 사이,
‘문진컬처앤크리에이티브’라는 회사명이 새겨진 간판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최영란은 빌딩 앞에서 잠깐 멈췄다.
회색 울 코트 깃을 세운 그녀는, 마치 오래된 무언가를 꺼내는 사람처럼
입가를 굳게 다문 채 시선을 위로 향했다.
김대식이 옆에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볼까요?”
최영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초롱이는 아래 커피숍에 있으라 그래.”
“네. 벌써 자리 잡고 앉았대요.
엄마 긴장하지 말라고…
‘거기 남자 좀 못생겼을 것 같아’ 이러던데요.”
최영란은 피식 웃었다.
“얘는 진짜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웠는지 몰라.”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멈췄고,
문이 열리자 고급스러운 마감의 사무공간이 펼쳐졌다.
“안녕하세요.”
직원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떤 분 찾으세요?”
“서문진 대표님 계신가요?”
김대식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
“잠시만요. 지금 통화 중이신데 이름 전해드릴까요?”
최영란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최영란입니다. 옛날 이름이라도 기억나면, 나오겠죠.”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최영란은 사무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들을 바라봤다.
거기엔 고급스러운 행사 사진들,
해외에서 진행한 전시 풍경들,
그리고 아직도 완벽해 보이는 서문진의 옆모습이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가 들어왔다.
서문진.
짙은 네이비 슈트, 은빛 뿔테 안경.
주름이 더해졌지만,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외모는 여전히 ‘관리된 사람’의 인상을 풍겼다.
“영란아?”
그는 반가운 듯, 그러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랜만이야.”
최영란은 담담히 말했다.
“3년 전 결혼은 잘 했나 보네?”
서문진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웃었다.
“그걸 어떻게...”
“난 기억력 좋잖아. 네가 나한테 그랬었지.
‘영란이는 계산 잘하고 기억력도 좋고, 나한테 딱 어울려.’
아직도 그런 말 습관은 여전하더라?”
서문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 얘기 기억해?
너답다”
약 30년 전, 젊은 영란의 시절
압구정 어느 루프탑 바.
불빛은 푸르게 흐르고, 와인잔과 칵테일 잔이 반짝이며 부딪혔다.
“영란 씨는 참 신기해요.”
서문진이 말을 꺼냈다.
“똑똑한데 차가운 건 아니고 말할 땐 예리한데, 듣고 있으면 편안하달까.”
최영란은 잔을 돌리며 말했다.
“그게 말이야, 욕이야?”
“아니. 그냥 매력 있다는 거죠.”
그 시절의 최영란은,
서문진이 던지는 칭찬과 ‘의미 있는 시선’을
처음엔 조심스레 받아들였다.
그는 손등을 스치듯 잡았고,
사람들 앞에서는 과하게 웃지도, 대놓고 자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할 때
조금 더 허리를 펴고, 손을 끌어당기곤 했다.
서문진은 말했다.
“이 여자, 내 여자야.
아무 말 안 하고 그렇게 보여줬다.”
어느 날.
호텔 식당에서 열렸던 클라이언트 만찬.
그는 그녀에게 ‘조용히 앉아만 있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정한 척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했다.
“영란 씨는 평소엔 사업도 잘하지만,
이렇게 곁에 있을 땐 조용히 빛나는 존재예요.”
그 순간,
최영란은 식기가 짧게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배경’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뒤.
그녀는 말없이 반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넌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네 옆을 채울 마지막 퍼즐을 찾았던 거야.
그리고 그걸로 완성된 그림을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었던 거지.”
서문진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뭐가 나빠?”
“그게 사랑이 아니니까.”
현재 – 다시 2025년
“그때 내가 왜 너랑 헤어졌는지 이제 이해돼?”
최영란은 조용히 말했다.
서문진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땐 몰랐지.
너무 자신만만했고
다른 사람 생각 안 했어.”
그는 이젠 조금은 늙었고,
그 눈빛은 어딘가 피곤하고 공허해 보였다.
“근데 너는 여전히
멋지다, 영란아.”
“고맙다.
근데 그 말, 지금 말고
그때 했으면 더 좋았을 거다.”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김대식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왜? 하고 싶은 말 있냐?”
최영란이 먼저 물었다.
“아뇨.. 그냥,
그 사람이랑 있으실 때는 좀 다르셔서요.”
“다르긴 뭐가 달라.
내가 그 인간한테 속았던 기억이 있으니까 경계했을 뿐이야.”
“질투 난 건 아니고요?”
김대식이 장난처럼 웃으며 물었다.
“웃기지 마.
질투는 네가 할 일이지.
난 다 끝난 감정 정리하러 온 거야.”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초롱이 커피를 마시며 손을 흔들었다.
“어땠어요? 그 아저씨 많이 늙었죠?
엄마가 훨씬 멋있어요.
진심이에요.”
최영란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래.
늙었더라.
근데 더 위험한 건 그 인간의 말투였어.
여전히 포장된 단어로 사람을 마비시키더라.”
김대식은 묵묵히 걷다가 말했다.
“다음은 어디죠?”
최영란은 가방을 어깨에 걸며 말했다.
“다섯 번째 남자.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을 믿었던 사람.
그 사람 아직 정신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은 적 있어.
찾아가야지.”
김대식은 깜짝놀라
"아..어디가 아프시구나....지금은 많이 좋아지셨을까요.?"
영란은 휴대폰을 보며
"몰라 나도 그때이후로는 연락이 없었으니까."
둘의 분위기를 읽던 초롱은 크게 소리치며 말한다.
“사랑은 진짜, 영화보다 더 복잡하다!!!”
최영란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초롱은 잠깐 고민하더니 명언 같은 말을 던진다.
“추억은 손을 잡을 수 없고, 사람은 다시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김대식은 그소리를 듣자마 하늘을 쳐다보고
추억은 별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초롱과 영란을 쳐다보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추억은 추억일때 가 가장 아름답고 추억다운것 같아요”
초롱은 그말을 듣자마자 한마디 던진다.
“어? 엄마한테 별소득 없으니까 그만 찾으라는 소리세요?”
김대식은 화들짝 놀라면서 영란의 눈치를 보고,
초롱은 놀리는 맛이있다며 재미있어한다.
그렇게 4번째 사랑 결혼까지 갈뻔했던 사랑은 ,
길에서 스친 인연보다도 못하게
정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주일뒤 주병진의 소식이 들려오고
그가 00교도소에 들어가있다는 연락을 받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