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번째 사랑.

다시 사랑해도 될까요?

by 아르칸테

서울 외곽의 작은 언덕, 공원묘지 한쪽.

저녁 햇빛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빛은 바람에 흩날리는 풀잎 사이로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김대식은 한 손에 흰 국화를, 다른 손에 살구주스 작은 캔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오래도록 돌보지 못한 한 묘 앞에 멈췄다.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비석.
거기엔 그의 아내, 그와 함께했던 세월이 누워 있었다.

한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숨소리마저 무겁게 내려앉아, 고요가 무덤 주위를 감쌌다.
그는 마치 말을 꺼내는 순간, 이곳의 기억까지 다 흩어져버릴까 봐 두려운 듯했다.

“나 왔어.”
짧고 낮은 목소리.
대식은 국화를 묘비 앞에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렸고, 무릎이 저릿하게 굳어갔다.

“그동안.. 미안했어.
네가 떠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여기 매달려 있었거든.
웃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다 미안해서.. 제대로 못 했어.”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빛이 흔들렸다.

“근데.. 이제는 보내야 할 것 같아.
아무리 붙잡아도, 넌 여기 있고, 나는 살아 있어야 하니까.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

그 말 끝에 바람이 스쳐갔다.
풀잎이 흔들리고, 작은 곤충 소리가 들려왔다.
대식은 그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마지막에 그랬지. 꼭 다시 사람 만나서 결혼하라고.
그 말.. 난 오랫동안 이해 못 했어.
왜 그런 말을 남기고 갔는지, 그땐 원망스럽기까지 했어.
당신이 나를 떠나면서,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냐고..”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는 이미 젖어 있었다.

“근데 이제 알 것 같아.
내가 당신을 못 떠나보낼 줄 알고, 미리 말해준 거였지?
미리 그 말을 남겨주지 않았으면..
난 분명 누구를 만나도 죄책감에 묶여, 끝내 깔끔하게 사랑하지 못했을 거야.”

대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 말이 있었으니까.. 이제야 내가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는 것 같아.
고마워. 미안하고, 또.. 고맙다.”

그는 살구주스 캔을 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당신이 싫어하던 술 말고, 이걸로 왔어.
이제부턴 술 대신 이걸로 기도할게.
그리고… 더는 여기 자주 안 올 거야.
오늘이 마지막 인사야.”

대식은 무릎을 꿇고 묘비에 이마를 댔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닦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흘리며 속삭였다.

“잘 있어. 이제 나, 갈게.
나도 이제, 내 사람한테 가야 해.”

그는 손끝으로 묘비를 한번 쓸고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걸음이었지만, 그 뒷모습에는 분명히 다른 결심이 서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길 끝, 도시의 불빛이 켜진 골목.
김대식은 주머니에 꼭 쥔 살구주스를 다시 꺼내 들었다.
손바닥엔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가슴은 여전히 무겁게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이번엔 뒤가 아니라 앞을 향했다.

그가 향한 곳.
최영란의 집 현관문 앞.해는 이미 지고,

거리는 붉은 기운만 어스름히 남아 있었다.
최영란의 집
거실 불빛 아래,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영란의 손이 문득 멈췄다.

띵동
초인종 소리.
누굴까. 이 시간에?

영란은 책을 덮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문 앞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익숙한 그 얼굴이, 어설픈 표정으로,
손에는 주스 하나 들고 서 있었다.

“김대식?”
“그... 그게, 저기..”
그는 잠시 말을 더듬었다.
영란은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었다.
“이 시간에 웬 주스?”
“살구주스입니다.”
“...뭐?”
“당신은.. 술은 싫어하고, 과일은 좋아하고,
근데 너무 달면 또 안 좋아하니까..
그래서 살구쯤이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영란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주스 하나 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단정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 더는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요.
당신 따라 여섯 명의 과거를 만났고,
나도 내 과거를 다 보여줬어요.
이젠..
당신 옆에 있고 싶어요.
같이 살아요. 우리.”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초롱은 2층 방 창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어폰을 한 쪽만 끼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그 장면을 조용히 담고 있었다.
엄마의 표정,
대식의 숨결,
그리고 그 짧고 강한 정적까지.

거실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아직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최영란이 입을 열었다.

“참, 어설프다.”
“네?”
“그래서 더 설득력 있네.”
“그럼.. 제 마음을, 받아들인 거죠?”
“들어와.”

그 말에 대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찰나, 초롱은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새 문서 파일.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
제목을 썼다.

《0번째 사랑 – 누군가의 마지막이 되어줄 사람》

그녀는 천천히 타이핑을 이어갔다.

사랑은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대단한 대사도 없고, 불꽃도 없다.
그저, 문 앞에서 망설이던 사람이
끝내 들어와 함께 늙고 싶다고 말해줄 때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나는 누군가의 마지막 사랑이 되어준 사람을 믿는다.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입력했다.

사랑은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과, 함께 문을 닫을 수 있는 용기다.

초롱은 노트북을 덮으며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엄마의 웃음소리가 작게, 그러나 분명히 들려왔다.
그 소리에,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됐어.
이제 진짜,
끝이 아니라 시작이네.”

시간은 흘렀고

여정이 끝나고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고, 다시 여름이 왔다.
서울의 시간은 여전히 분주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계절을 살아간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그 계절의 온도가 예전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최영란은 다시 새벽에 일어나는 삶으로 돌아갔다.
신문을 넘기며 커피를 마시고, 오래된 머그컵을 닦으며 창밖을 보는 아침.
달라진 건 한 가지.
그 창가 옆, 커피 두 잔이 함께 놓인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 때때로 불쑥 건네는 뻔한 농담,
아무 일 없는 날의 저녁 밥상.

김대식은 종종 말한다.
“사랑은 화려해서 좋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해 매일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기는 거라고.”

영란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밥 위에 김을 잘게 올려주며 말없이 웃는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물어보지 않는다.
기억은 그들이 이미 함께 여행한 길 위에 놓여 있으니까.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 기억들은 더 이상 아프지 않다.
그저 이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장식처럼,
그들의 마음 속에 조용히 놓여 있다.

나는 그 모든 걸 지켜봤다.
엄마가 다시 누군가를 바라보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
김대식이라는 남자가, 과거에서 현재로 건너오는 그 모든 장면을.

그리고 나는, 작가로서의 직감을 믿었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하다고.
그리움 속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아직 ‘지금’이라는 단어를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여정이 말해줄 수 있다고.

사랑은 한 사람의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울지 않았다.
그건 눈물보다 오래가는 문장이 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김대식과 최영란의 지금.

요즘 그들은 자주 다툰다.
화장실 물 내리는 법, 리모컨 어디 뒀는지, 누구 먼저 빨래를 개야 하는지.
사소하고 유치하고 고집스럽다.
하지만 싸움은 길지 않다.

“대식씨, 나가서 산책이나 해.”
“같이 가요. 싸우고 혼자 나가는 건 반칙이에요.”

그리고 둘은 마트에 간다.
장바구니에는 고등어, 마늘쫑, 살구주스 한 병.
그 안엔 ‘기억의 보상’ 같은 게 담겨 있다.

어느 날, 영란이 물었다.
“너는 나 왜 좋아해?”
대식은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를 화나게 하면서도 보고 싶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영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밤, 그의 이불을 끝까지 덮어주고 나서야 잠들었다.

그들은 단순한 부부가 아니다.
애정이란 이름도 정확히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산다.
말보다 긴 호흡으로,
다정보다 깊은 믿음으로.

마지막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

‘0번째 사랑’.
나는 그 단어를 처음 쓰면서도 어쩌면 이게 가장 처음이자 가장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종종 첫사랑을 기억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마지막까지 함께 남는 사람’이다.

처음은 우연이지만,
마지막은 선택이다.

엄마는 여섯 명의 과거를 지나왔다.
그 길은 기억이 아닌, ‘검증’의 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 앞에 김대식이라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
망설이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함께 주방에서 주스를 꺼내 마실 사람.

사랑이란 건, 결국 이런 것이다.
누구를 향해 내 손을 뻗었을 때,
그 사람이 이미 내 손 안에 있는 것.
이름 없이, 조건 없이, 조용히 옆에 앉아주는 것.

독자에게 보내는 초롱의 한 마디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서,
나는 독자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한 마디가 생겼다.

과거는 돌아볼수록 아름답고,
현재는 함께할수록 깊어진다.

사랑은 과거의 사람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매일을 살아내는 것.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둘 때 가장 따뜻하고,
사랑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을 때 진짜가 된다.

엄마는 그렇게 사랑했고,
김대식 아저씨는 그렇게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을 보며 이 말을 글로 남긴다.

“당신이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다시 찾는 여행도 좋다.
하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봐라.
사랑은 그 사람과 함께 오늘 저녁 반찬을 고르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여정을 한 문장으로 남긴다.

“0번째 사랑, 그것은 마지막에서 처음을 선택하는 용기다.”

– 임초롱, 작가.
『그 시절, 여섯의 이름으로』

-다시 사랑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