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집 앞 골목을 따라 노을이 내려앉던 저녁,
아이의 가족은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다.
“얼른 옷 갈아입어. 아빠 친구네랑 같이 고기 먹으러 간다.”
아빠의 목소리는 요즘 보기 드물게 가벼웠다.
엄마도 오랜만에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거울 앞에서 급히 바르는 붉은 빛이
피곤이 아닌, 조금은 기대 같은 표정을 얇게 덧칠했다.
가난한 동네 국도 옆,
간판 불빛이 오래된 기름처럼 눌어붙어 있는 삼겹살집.
철제 문을 열자,
숯불에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얼굴을 감쌌다.
이미 안쪽 자리에는
아빠의 친구 가족이 먼저 와 있었다.
“어이, 왔네 왔어!”
넓은 어깨, 웃을 때마다 짙게 패이는 팔자주름,
하지만 눈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처럼
상대의 얼굴을 한 번에 훑는 기색.
사람들은 그를
“사업 잘된 ○○ 형님”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그냥
‘사업가 아저씨’였다.
옆에는 말끔한 셔츠를 입은 이모와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또래 남자애가 앉아 있었다.
그 집 아이의 운동화는
훨씬 새것처럼 보였다.
“야, 이게 몇 년 만이냐.”
아빠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사업가 아저씨는 고기집 천장에 매달린 환풍기를 한 번 훑어보더니
아이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 눈빛은
‘어린애를 보는 눈’이 아니라
마치 장수 후보를 평가하는 군주의 눈 같았다.
“얘가 그 아들내미지? 많이 컸네.”
아이는 인사를 하려다
괜히 목이 말라 물컵만 들었다.
고기가 불판 위에 올라가자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기진 냄새가 퍼졌다.
배 속이 다시 한 번 조용히 웅크렸다.
잠시 어른들 사이 잡담이 오가다가,
사업가 아저씨의 목소리가
불판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들었어. 라면 사건.”
공기가 아주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아빠의 웃음소리가 헛기침에 섞였다.
“에이, 애가… 그냥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지 뭐.”
엄마는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사업가 아저씨는
고기를 한 번 뒤집으며 말했다.
“철이 없어서? 글쎄.”
그는 불꽃이 튀는 불판을 보다가
천천히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렇게 안 봐.”
그 말투에는
비난도, 위로도 없었다.
마치 전쟁터 지도를 펼쳐놓고
지형을 설명하는 사람처럼 담담했다.
“솔직히 말해볼래?”
그가 물었다.
“그때, 왜 그 라면을 들고 나왔냐?”
준호는 숨을 들이켰다.
수많은 어른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던 그 이야기.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직접 묻지는 않았다.
“그냥… 배고파서요.”
말이 나오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빈약한 대답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사업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부분의 사건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냥, 배고파서.’”
그는 쪽가위로 고기를 잘라
불판 한가운데로 모아두며 말을 이었다.
“삼국지 좋아하냐?”
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였지만,
아저씨의 눈빛은 이미 다른 전쟁터를 펼쳐놓고 있었다.
“거기 나오는 놈들도 다 결핍 덩어리들이야.
유비, 조조, 손권… 다 집안 사정 꼬이고,
가난하거나, 인정 못 받고,
세상에 대한 배고픔이 있었지.”
아저씨는 젓가락 끝으로 공중에 선을 그렸다.
“근데 말이다.
결핍은 두 갈래로 나뉜다.”
불판 위 고기에서
기름이 떨어지는 소리만 잠시 들렸다.
범죄가 되는 결핍.
성공의 동력이 되는 결핍.”
말투는 마치
장수들을 분류하는 책을 읽는 것처럼 단단했다.
“라면 하나 훔친 애를 보면서
어른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지.
‘도둑놈 될 싹수가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해.
‘아이고, 가난해서 그렇지 뭐… 불쌍한 애야.’”
엄마의 손이 살짝 떨렸다.
아빠는 소주잔을 괜히 한번 돌렸다.
“근데 난 그렇게 안 본다.”
사업가 아저씨의 눈빛이
조용히 날카로워졌다.
“나는
‘저 결핍을 견디는 방식이 뭐가 되겠냐’를 본다.”
그는 불판 위 고기를 하나 집어
접시에 옮겨놓으며 말했다.
“어떤 애는 결핍 때문에 남의 걸 훔친다.
어떤 애는 그 결핍 때문에 일찍부터 일 나가고,
어떤 애는 공부를 파고들고,
또 어떤 애는 사람을 모으는 법을 배운다.
결핍 자체는 죄가 아니야.
결핍을 어떻게 씹어 삼키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가른다.”
그 말은
불판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아이의 가슴을 스쳤다.
지금까지는
결핍이라는 단어 앞에
늘 ‘불쌍한’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줄 알았다.
아니면 ‘문제 있는’이라는 말이 붙거나.
그런데 이 아저씨는
결핍을 칼처럼, 연료처럼 말하고 있었다.
“유비는 결핍을 가지고도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으로 바꿨다.
조조는 결핍을
판단력과 잔혹한 결심으로 태워버렸고.
손권은
어린 나이에 나라를 맡으면서도
버티는 근성으로 삼았지.”
아저씨는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든다.
못 견디면서도,
끝내 아무것도 안 하는 식으로.”
옆에서 아저씨 아들은
고기만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결핍이라는 단어를 꺼낼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사업가 아저씨는
다시 아이를 바라봤다.
“너 라면 훔친 거,
솔직히 말하면 뭐 대단한 사건도 아니다.”
그 말에 엄마가 흠칫했다.
“다만 그건
너 안에 있는 결핍이
한 번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이지.
그래서 중요한 건
‘훔쳤다’가 아니라
‘그 다음에 뭘 배우냐’야.”
‘그 다음.’
지금까지 누구도
그 다음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
다들 그날을 붙잡고만 있었다.
사업가 아저씨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
라면보다 훨씬 큰 걸 훔친 놈들도 많이 봤다.
회사 돈 빼돌리고,
직원들 월급 떼먹고,
세금 안 내고…
근데 이상하지?
애가 라면 하나 훔치면
세상이 더 난리야.
왜 그런지 알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빠도, 엄마도,
옆자리 이모도.
아저씨가 대답했다.
“라면을 훔친 애는
아직 스스로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니까.
그래서 다들 겁나는 거야.
‘저 결핍이 앞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지.”
그 말은
아이에게는 일종의 판결문 같았다.
단지 죄를 확정하는 판결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방향을 내라는 요구서 같은.
“그러니까 묻자.”
사업가 아저씨의 시선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꽂혔다.
“너,
배고픈 김에 훔치는 쪽으로 살래?
아니면 배고팠던 걸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렇게 안 살아보려고 머리를 굴리는 쪽으로 살래?”
질문은 단순했지만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무거웠다.
아이는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하면
정말로 무언가가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업가 아저씨는
아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고
오히려 더 만족한 듯 웃었다.
“괜찮다.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돼.
유비도, 조조도, 손권도
자기 길을 한 번에 안 정했다.
전쟁 몇 번 치르고,
배신도 당해보고,
굶어도 보고,
그러면서 방향이 결정된 거지.”
그는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중요한 건
네 안에 이미 결핍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결핍은
언젠가 반드시
너를 끌고 어디든 데려갈 거라는 것.”
고기가 접시 위에 수북이 쌓였다.
아빠는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애가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뭐.”
사업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어리니까.
그래서 중요한 거야.”
그는 마지막으로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집어
아이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이건 그냥 고기고,
네 안에 있는 결핍은 연료다.
라면 하나 때문에
‘나는 원래 이런 애야’라고 스스로를 정리해버리면
거기서 끝이다.
근데
‘아, 내가 이렇게까지 배고픈 적이 있었지’ 하고
그 감각을 기억해두면,
나중에 돈 벌어도, 성공해도
사람 함부로 안 건드릴 수 있다.
그 차이가
사기꾼이 되느냐,
진짜 인물이 되느냐를 가른다.”
진짜 인물.
그 말은
삼국지 책 표지에서 튀어나온 단어 같았다.
아이일 때는
그저 책 속 장수들의 이야기였던 말.
이제는
자신에게도 어쩐지
조심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은 말.
아이는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짠맛과 기름기가 입안에 번졌지만,
머리는 묘하게 더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아이의 속마음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속삭였다.
“나도…
정말로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답을 갖지 않은 채로
가슴 한가운데 천천히 내려앉았다.
라면 가게 사장은
자신을 도둑이라고 불렀다.
부모는 집안의 수치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규칙을 모르는 문제아라 했다.
심리상담사는 상처받은 아이라고 불렀고,
신경과학자는 미완성의 뇌라고 말했다.
동물행동학 이모는
배고픈 동물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
사업가 아저씨는
조용히 다른 이름 하나를 건넸다.
“결핍을 가진 아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아이.”
아이는 아직
그 말의 무게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운 골목을 걸으며
스스로에게 아주 조심스레 되뇌었다.
“나는…
라면을 훔친 아이로 살지,
그날의 배고픔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살지…
언젠가는
내가 정해야겠지.”
그 생각이
아직은 서툴고 흔들리긴 했지만,
분명히 하나의 방향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마음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생각이
아직은 서툴고 흔들리긴 했지만,
분명히 하나의 방향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마음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사장님, 소주 하나만 더요!”
사업가 아저씨의 목소리가
불판 위의 연기를 뚫고 튀어 올랐다.
아빠가 슬쩍 말렸다.
“야, 벌써 많이 마셨잖아. 내일도 일 나가야 한다며.”
“에이, 오늘은 좀 마셔야 돼.”
아저씨는 웃으면서 소주잔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미 그의 볼은 은근하게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깊게 패이던 팔자주름이
이번에는 묘하게 헝클어진 표정처럼 보였다.
소주가 잔에 채워지고,
한 잔, 또 한 잔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대화의 흐름도 술기운을 따라 점점 거칠어졌다.
“야, 세상 말이야…”
그가 중얼거리듯 시작했다.
“세상이 누구 편 들어줄 것 같냐?”
아빠와 엄마는 눈을 맞추지 못했다.
옆자리 이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없는 놈 편?
결핍 있는 놈 편?
애 키우느라 죽어라 버티는 집,
은행 대출이 목줄을 쥐고 있는 집…
누가 그 편 들어주냐고.”
그의 목소리는 서서히 커지며
거칠어진 숨과 섞였다.
“신문 보냐?
뉴스 보냐?
맨날 나오는 놈들만 나온다.
돈 있는 놈, 빽 있는 놈,
애초에 결핍 같은 거 모르는 놈들.”
사업가 아저씨는 허공을 향해 소주잔을 한번 들어올리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건배를 올리듯 말했다.
“그래, 잘났다.
너희는 태어날 때부터 꽉 찬 놈들이고,
우리는 비어 있는 놈들이다.
근데 말이지…”
그는 잔을 턱 하고 내려놓았다.
탁자 위 유리잔이 얇게 떨렸다.
“비어 본 놈들이
끝까지 무릎 꿇지 않고 버티면,
세상은 언젠가 그 놈을 무시 못 한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야, 애들 있는데 너무 또 흥분하지 말고…”
“흥분? 야.”
사업가 아저씨는 갑자기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술 냄새와 고기 냄새, 탄 냄새가 뒤섞인 호흡이
아이의 얼굴 가까이서 느껴졌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준호요.”
“그래, 준호야. 잘 들어.”
아저씨의 손이
잠깐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힘을 주어 움켜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볍게 올려놓은 것도 아닌,
묘하게 떨림이 섞인 온도였다.
“라면 하나 때문에
넌 벌써 세상한테 무릎을 꿇어본 거야.
사장한테, 부모한테, 선생한테…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미안합니다’ 하고 고개 숙였겠지.”
아이의 머릿속에
그날의 장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가게 앞에서,
집에서,
교무실에서.
바닥만 보던 시선,
갑자기 커진 어른들의 목소리,
자신에게 붙여졌던 말들.
“근데 말이야.”
사업가 아저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세상에 무릎 꿇는 건,
딱 한 번이면 족하다.”
그는 소주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진짜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라면 하나 훔쳤다고?
그래, 잘못이지.
근데 거기서
‘나는 원래 이런 놈이구나’ 하고
자기한테까진 무릎 꿇어버리면,
그때부터는 누구도 못 일으켜 세운다.”
아저씨의 눈빛이
술기운과 함께 번들거렸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 또렷한 무언가가 박혀 있었다.
“세상이 뭐라 해도,
너 스스로한테는 무릎 꿇지 마.
‘나는 원래 도둑이다.’
‘나는 원래 망가진 애다.’
‘나는 원래 안 되는 놈이다.’
이런 말,
절대로 네 입으로 먼저 하지 마라.”
그 말에
엄마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아빠도 표정을 굳힌 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아주 옅은,
그러나 분명한 피로가 스며 있었다.
“나도 옛날에…
훔친 적 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고백에
탁자 위 공기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학교 다닐 때,
친구 도시락 반찬 훔쳐 먹고,
편의점에서 소시지 슬쩍하고,
공사장 철근 빼다가 팔아본 적도 있다.”
아빠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야, 너 그런 말 처음 하는데?”
“말 안 했지.
말했다간 사람들 다 도망가니까.”
아저씨는 허탈하게 웃었다.
“근데 말이야,
그때 나도 너처럼 배고팠어.
진짜로, 속이 비어 있는 느낌.
그래서 처음엔
세상 탓만 했다.
‘왜 나만 이 모양이냐.’
‘왜 우리 집만 이러냐.’
그러다 어느 날
골목길에서,
쓰레기봉투 뒤지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야, 이대로 가면
나는 평생 남의 것 훔치는 인생으로 끝나겠구나.’
그게 너무 싫더라.
진짜, 토할 것처럼.”
아저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래서 그날,
내가 나한테 명령을 하나 내렸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두 번 툭툭 쳤다.
“‘그래, 세상한테는 무릎 꿇을 수 있다.
근데, 나 스스로한테는
두 번 다시 무릎 꿇지 말자.’
그게 시작이었다.”
아저씨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굳은살과 흉터가 뒤섞인 손.
“그 뒤로는 훔치는 대신
뭐라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처음엔 노점,
그 다음엔 중고 장사,
그 다음엔 공장,
그 다음엔 회사.
돈을 버는 동안
무릎 꿇을 일은 수도 없이 많았어.
고객한테, 거래처한테, 은행한테…
근데 단 한 번,
딱 한 군데에는
무릎 안 꿇으려고 버텼다.”
그는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나를 아무렇게나 규정하는 순간.
그때만큼은 무릎을 안 꿇었다.”
불판 위 고기가 어느새 타기 직전까지 익어 있었다.
엄마가 허둥지둥 뒤집으며 말했다.
“타겠어요, 형님. 잠깐만요.”
아저씨는 잠깐 웃더니,
다시 잔을 들고 술기운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준호야.”
아이의 이름을 또렷하게 불렀다.
“세상은 너한테 계속 말 걸 거다.
‘넌 도둑이야.’
‘넌 문제아야.’
‘넌 상처받은 애야.’
‘넌 뇌가 덜 큰 애야.’
별별 이름을 다 갖다 붙이겠지.
근데 마지막에
너한테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는
너한테 달렸다.”
아저씨는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러니까, 세상 말 다 듣되,
세상에 무릎은 꿇지 마라.
한 번 꿇을 때마다
너 자신에게는
조금 더 고개를 들 수 있어야 해.
그게,
결핍을 가진 놈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마지막 말은
거의 외침처럼 탁 튀어나왔다.
“세상에 무릎 꿇지 마!”
옆 테이블 손님들이
슬쩍 이쪽을 쳐다봤다.
아빠가 급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 형님 취해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귀에는
다른 어떤 소리보다
그 한마디가 깊게 박혀 있었다.
세상에 무릎 꿇지 마.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가로 아까보다 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아빠와 엄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옆에서
아이의 그림자도 조용히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속마음이
불쑥, 그러나 또렷하게 속삭였다.
“나는…
그날 라면을 집어 들던 애로 남을지,
그날 이후에도 계속 일어나는 애가 될지…
언젠가,
정말로 내가 정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