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집 안에는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흘렀다.
엄마의 친구 두세 명이 집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고, 애 키우느라 고생 많지.”
“괜찮아? 요즘 좀 수척해 보이네.”
엄마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잔을 들고 있는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아이는 멀리서도 느꼈다.
아이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TV 앞에 앉아
리모컨을 장난처럼 눌렀다.
그러다 화면 속에서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푸른 초원,
흐르는 바람,
뛰노는 아기 사슴 무리.
그리고 그 뒤를
조용히 추적하는 암사자.
아이의 눈동자는
그 장면에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화면 속에서
사자는 숨을 죽인 채 몸을 낮추고,
순간적으로 뛰어올랐다.
아기 사슴은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TV 화면이 잠시 정적을 삼킨 뒤,
사자의 송곳니가 사슴의 목덜미를 잡는 장면이
선명하게 잡혔다.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사자가… 저기서… 아기를 잡아먹은 건…
나쁜 거야?”
엄마는 대답을 못 했다.
너무 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사실 아이가 던진 질문의 무게를
엄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음…”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그때였다.
엄마 친구 중 한 명
동물행동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모가
오래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좋은 것도 아니고.”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모는 아이의 눈높이까지 몸을 숙이며 말했다.
“사자는 배고프면 먹이를 찾아.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건
그냥…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야.”
아이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근데… 아기는…
불쌍한데…”
“맞아, 불쌍하지.”
이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자연에서는
불쌍함이 기준이 되지 않아.
살아남는 게 기준이 되는 거야.”
이모의 목소리는
판단이 아닌, 설명의 온도였다.
누구를 비난하지도, 감싸지도 않는
조용한 사실의 목소리.
“사자가 사슴을 먹는 건
악해서가 아니야.
그냥… 살아야 해서 그래.”
아이는 그 말을 오래 바라보았다.
사자.
배고픔.
생존.
도덕 없음.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 라면을 집어 들었을 때
자신은 ‘도둑’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배고팠다.
정말…
그냥 배고팠을 뿐이었다.
아기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사자는 나쁜 게 아니고…
사슴도 잘못한 게 아니고…”
“맞아.”
이모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그냥…
각자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야.”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 말이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복잡하게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럼…
나는 그냥…
배고픈 동물이었던 걸까…?”
그 질문은
목소리로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의 가슴 안쪽에서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도덕의 언어,
심리의 언어,
뇌의 언어를 지나
이제 아이는
더 본원적인 질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날의 나는
도둑이었던 걸까?
상처입은 아이였던 걸까?
아직 덜 큰 뇌였던 걸까?
아니면…
그냥 배고픈 동물이었을 뿐일까?”
TV에서는
사자가 먹이를 나누어 새끼에게 주는 장면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아이는 그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TV 화면 속에서는
사자가 찢어놓은 고기를
작은 새끼들이 덜덜 떨리는 턱으로 받아먹고 있었다.
잔인한 장면이었지만,
어떤 이상한 평온함이 있었다.
사자는 피 묻은 얼굴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다시 새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누군가를 해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존재처럼 보였다.
아이는 그 장면이
도무지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슴은 죽었는데…
사자는 살아났어.
그리고 사자의 새끼들도 살았고…”
아이의 마음 안에서
도덕과 본능의 경계가
아주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잘못한 건가?
사자인가?
사슴인가?
아니면
아무도 잘못한 게 아닌가?
그 질문이
바로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왔다.
“그럼…
나는 누구였지?”
도둑?
상처받은 아이?
미완성의 뇌?
배고픈 동물?
그리고 마음속에서
아주 조용히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났다.
“…혹시…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라면 한 봉지를 집어 들었던 그 순간,
자신은
나쁜 생각을 품지도 않았고,
남을 해치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배 속이 너무 비어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을 뿐이다.
사자도 그랬을까?
사슴도 그랬을까?
아이의 눈은
사자 새끼들이 먹는 장면을 보며
점점 더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이모가 조용히 말했다.
“저게 자연의 모습이야.
미움도 없고,
비난도 없고,
도덕도 없어.”
아이의 손가락이
리모컨을 꼭 쥐었다.
이모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좀 달라.
본능만으로 사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도덕도 생기고,
책임도 생기고,
잘못이라는 것도 생기지.”
아이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이모는
아이가 어느 부분에서 걸려 있는지
한 번에 알아챈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그날 라면 봉지를 들었던 건…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처럼
이를테면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이었을 수 있어.”
아이는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걸 ‘맞다·틀리다’로 판단하는 건
인간 세계의 언어고,
너는 지금
그 둘 사이에서 헷갈리고 있는 거야.”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맞다.
자신이 헷갈리는 건
라면 한 봉지 때문이 아니라,
그 라면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과 언어 때문이었다.
임의로 규정된 도덕,
전문가의 진단,
뇌과학의 설명,
본능의 해석까지…
아이는
자신이 무엇인지 묻는 것조차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모는 아이의 머리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야.
자연은 너를 판단하지 않아.
도덕은 너를 규정하지 않아.
뇌는 너를 대신하지 않아.
심리학은 네 마음을 전부 말하지 못해.”
아이의 눈이 천천히 이모를 향했다.
이모는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너만의 답’을 찾는 중인 거야.”
TV에서는
사자가 하품하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초원 바람이 털을 스쳤다.
아이의 마음속에도
살짝 비슷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정말 그날…
무엇을 몰랐던 걸까…”
사자도, 사슴도,
도둑도, 상처도,
뇌도, 본능도 아닌
아이 자신만의 대답.
그러나 그 대답은
아직 말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